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22화 (423/582)

제422화. 소슬하니 부는 바람에 (4)

도현이 피의자와 대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부모님은 조건을 걸었다. 그 자리에 당신들 중 한 명과 변호사가 동석할 것. 도현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루머 유포자를 대면하기 전 먼저 합류한 사람은 변호사와 서혜나였다.

“네가 굳이 그런 사람과 마주할 필요는 없어.”

그러나 허락을 해줬을 뿐이지, 이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지난 며칠간 저 말을 열 번 정도는 듣지 않았을까.

“괜찮아요. 저 혼자 대면하는 거 아니잖아요.”

무거운 한숨을 내쉰 서혜나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그건 그녀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변호사와 매니저, 그리고 서혜나와 약속했던 만남 장소에 들어서자 미리 와 있던 이가 벌떡 일어났다. 도현은 상대의 행색이 상당히 멀끔하다는 것에 놀랐다.

“아, 안녕?”

얼굴만 멀끔하구나.

빠른 깨달음을 얻은 도현이 단조로이 말했다.

“사이좋게 인사 나눌 사이는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예의는 차려 주시고요.”

생각했던 상황이 아닌지 남자의 얼굴에 당혹이 차올랐다. 아직 상대가 어리니까 친근한 척 다가가 정에 호소하면 되리라 생각했는데, 반응이 예상과 달리 무심하고 일견 냉정하기까지 했다.

‘이게 아닌데?’

도현은 그가 당황하든 말든 맞은편 자리에 가서 앉았다.

“아, 어, 미안, 아니, 죄송해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남자가 어정쩡하게 사과했다. 그러나 도현이 그 말에 대답하지 않자, 움츠러든 채 눈동자만 굴려댔다.

그 상황에서 입을 열어 분위기를 주도한 건 변호사였다. 그는 사건의 경위를 물었고, 남자는 준비해온 것처럼 줄줄이 말을 쏟아냈다.

도현은 그 모든 것을 가라앉은 눈으로 들었다.

남자는 게시글에 적은 것처럼 방송국 직원이 아니었다. 그의 정체는 <왕의 길>에 합류한 보조출연자였다. 남자는 그때의 대화를 어떻게 들었고, 어디서부터 오해가 생겼는지 설명했다.

“정말 실수였어요. 두 사람의 대화를 오해해서… 둘이 정말 친한 사이인 줄 알았다면 그런 터무니없는 오해는 안 했을 거예요.”

그가 자칫 억울해 보이는 불쌍한 낯으로 호소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서 표정을 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까부터 맹렬한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던 서혜나가 입을 열었다.

“오해? 오해 때문이라고요?”

“네, 정말….”

“스태프인 척 가짜로 꾸며내서, 과거에 있었던 일을 거짓으로 지어내고, 의도적으로 피해를 주고자 했으면서. 그게 다 오해였다고?”

“그, 그건….”

그녀가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내가 묻잖아요. 왜 말을 안 해. 아까는 잘하더니.”

남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우물쭈물했다. 달변가처럼 말을 쏟아내더니, 지금은 또 입을 꾹 다문 모양새였다. 서혜나가 하, 하는 헛숨을 내뱉었다.

“사람을 우습게 봐도 정도가 있지.”

한기가 몰아치는 목소리였다. 멈칫한 도현은 조금 놀란 눈으로 서혜나를 보았다. 그렇게 화난 얼굴은 두 번째로 보는 것이었다. 첫 번째는 스위스 여행 중 도현이 돌발행동을 저질렀을 때였다.

하지만 그때도 서혜나는 도현에게 저토록 차가운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남자를 대하는 서혜나는 도현이 알던 것과 괴리가 있었다. 도현이 낯섦을 느끼는 사이 경찬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두 모자를 번갈아 보았다.

‘닮았네.’

아무리 봐도 도현은 부계보다는 모계 같았다. 이목구비를 뜯어보면 이장혁과 닮은 부분도 많았지만, 도현의 분위기나 성격은 서혜나와 판박이였다.

그녀의 화난 모습을 보니 더욱 확 와닿았다. 며칠 전의 도현이 자신에게 풀풀 풍기던 느낌과 아주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도현이 재차 한마디 하려던 서혜나를 만류했다.

“제가 물어볼게요.”

도현은 잔뜩 움츠러든 남자를 응시했다. 이렇게 보니까 촬영장에서 지나가듯 본 것도 같았다.

부모님은 도현이 면담을 받아들인 게 마음이 약해서, 혹은 지나치게 착해서라고 여겼다. 그들은 종종 도현이 날개 잃은 천사라도 되는 양 구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남자가 올린 게시글은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었지만, 모두 거짓인 건 아니었다. 정희운과 대화. 그걸 알고 있다는 건 그때 촬영장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거니까.

도현은 그냥 확인하고 싶었다. 확인해서, 확신하고 싶었다.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현이 단정하듯 말했다.

“초면이네요, 저희. 아니면 만난 적 있던가요?”

“…어, 아뇨. 제가 일방적으로 본 것 말고는 없….”

“네, 그럼 제가 괴롭힌 적도 없겠네요. 초면이니까.”

남자는 그제야 말의 의도를 이해했는지 어깨를 움찔 떨었다.

혹시, 정말 혹시나 했다.

만에 하나 내가 의도치 않게 누군가한테 피해를 준 적이 있을까 봐.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잘못이 존재할까 봐서.

그런데 아니었다.

정말 초면이었다.

같은 촬영장에 있었으니 한 번쯤 스쳐 갔을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그 정도의 사이였다.

도현은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짐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런데 왜 그러셨어요? 초면인 사이에?”

도현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것이었지만, 주변에서 보기에는 조금 달랐다. 경찬호는 감탄했다. 쟤는 비꼬는 것도 고상하게 하는구나.

남자가 어물거리자 인내심이 바닥난 서혜나가 차갑게 일갈했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하세요. 할 말이 있으니까 우리 도현이한테 자꾸 보자고 한 거 아니야. 아니면 우리가 당신 생각할 시간까지 줘야 해요?”

이번에는 도현도 말리지 않았다.

차가운 독촉에 못 이겨 쩔쩔매며 변명을 입에 담기 시작하는 남자를 보며 도현은 확신했다. 지금 이 순간이 저 남자와 처음 마주하는 순간이고, 동시에 마지막 순간일 것이다.

더는 그를 마주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어른으로서 제가 더 엇나가지 않길 바란다고 했던가요.”

그러니, 마지막으로 이 말만큼은 해야겠다 싶었다.

“제가 엇나가는 것처럼 보였다면 참 유감인데….”

검은 눈이 남자를 훑었다. 나이 먹을 만큼 먹고선, 멍청한 짓을 저질러 십 대 소년에게 굽신거리고 있는 남자를. 남자는 그 무심한 시선에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뻣뻣하게 앉아 목덜미만 새빨갛게 붉혔다.

내 앞에서 이러는 게 수치스러운 걸까. 잠깐 의문이 들었지만, 곧 사그라들었다. 도현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자에게 진심 어린 물음을 던졌다.

“저를 신경 쓸 시간에 본인부터 되돌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 * *

“오늘 감사했어요.”

“아닙니다. 별로 한 것도 없는걸요. 그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도현은 오늘 면담에 동석해준 변호사를 배웅했다. 다음으로는 경찬호도 배웅하고, 서혜나와 같이 차에 탑승했다.

“제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서혜나는 남자를 마주하는 내내 날이 서 있었다. 그토록 날카로운 모습은 처음일 정도로. 그제야 도현은 이게 그녀에게 어려운 결정이었으리란 걸 깨달았다.

“도현아, 엄마는… 네가 바라는 건 뭐든 들어주고 싶지만… 이번 건 잘 모르겠더라. 그런 사람과 네가 만나야 할 이유가 뭔지….”

“만났으니까 확실해졌잖아요.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단 거.”

남자와의 만남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망스러웠다. 남자가 멀쩡한 건 정말 겉모습뿐이었다. 그는 스태프인 척 꾸며내어 글을 썼던 것과 다르게, 도현의 앞에서 한없이 비굴했다.

남자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싸늘함이 사라지지 않자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이 얼마나 기구한 삶을 살았는지 읊기 시작했다. 지루한 사연팔이였다. 덕분에 도현은 그가 삼남 중 차남이었으며, 그 탓에 위아래로 비교를 당하며 자랐고, 대입에 실패해서 집안의 천덕꾸러기가 되었으며, 아는 지인을 통해 일자리를 바꿔가며 살았다는 과도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

그 와중에 보조출연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고, 열악한 환경에서 구르는 자신과 달리 모두에게 대우받는 도현의 모습에 후회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게 장황한 이야기의 끝이었다.

그는 말하는 도중 감정이 북받쳤는지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꽹과리까지 칠 기세였다. 도현은 그 모든 걸 시시한 연극을 보는 심정으로 관람했다.

- 무, 물론 제가 잘못한 건 인정해요. 제가 정말 잘못했는데… 근데 정말 의도적으로 해하려거나 악의적인 마음을 품은 건 아니었어요. 그냥 제가 속에 불만이 많아서….

또 핑계, 변명, 거짓말이었다.

잘못했으면 잘못한 거지 잘못은 했는데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는 게 어느 세상 헛소리인가. 그는 반성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이 상황을 벗어나고자 안달할 뿐이었다.

참 부족한 어른이었다.

그 사실을 온전히 느끼고 나니, 도현은 조금 허탈해졌다. 이런 사람 때문에 내가….

“정희운이랑 반 애들한테 고맙다고 해야겠어요.”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고작 이런 사람 때문에 땅굴을 파고 있었을 것 아닌가. 그리 생각하니 뒷골이 다 당겨왔다. 친구들 덕분에 빠르게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었다.

“아, 그래. 그 친구들 집에 한번 부르지 않을래? 엄마 아빠가 너무 고마워서….”

“반 애들은 괜찮지만….”

정희운은 곤란했다.

물론 고마운 일인 건 맞고, 바라진 않았다고 하더라도 인사 한 번으로 입을 싹 닦을 생각은 없긴 했지만….

‘그래도 집에 부르는 건 조금.’

서로에게 당황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정희운은… 그다지 친하지 않아서요.”

“그 친구가 친한 친구라고 썼던 건….”

“저를 도와주려고 한 말이죠. 그냥 적당히 아는 사이예요.”

“그래? 그래도 한 번은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어쩐다.”

도현은 고민하다가 말했다.

“나중에. 나중에 제가 얘기 한번 꺼내 볼게요.”

“그렇게 할래? 곤란한 거 아니야?”

“어차피 곧 촬영이고… 그때 한번 얘기 꺼내 보면 되니까요.”

“그래?”

서혜나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이왕이면 그 친구가 무슨 음식 좋아하는지도 물어봐 줘. 혹시 필요한 거는 없는지도… 아, 옷 좋아하려나? 집 주소만 알면….”

“필요한 건 모르겠지만, 오이 들어간 건 싫어해요. 피망 같은 것도요. 과일은 별로 안 좋아하고, 채소류보다는 육류 좋아해요. 해산물은 비려서 못 먹고요.”

“…그러니?”

도현은 생각에 잠겨 있느라 서혜나의 묘한 눈빛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형의 기억과 여전히 같을까. 기억 속의 정희운은 오이나 피망은 쏙쏙 골라내서 먹는 아이였다. 고기반찬이 있으면 채소는 절대 손 안 대고, 조개 같은 건 먹자마자 뱉었다.

도현은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지금도 그럴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렇구나….”

묘하게 말끝을 흐린 서혜나가 말했다.

“그 친구, 꼭 만나보고 싶네.”

“…음.”

“그 친구 부모님도 같이 보면 더 좋을 거….”

“부모님이요?”

“어? 응, 부모님.”

도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까지 루머 유포자의 앞에서도 무심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너무 선연한 변화라서 서혜나가 흠칫할 정도로.

“싫어요.”

상처 입은 작은 짐승이 그르렁대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래서 서혜나는 한 박자 늦게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분명, ‘안 돼요’가 아니라 ‘싫어요’라고….

“그들이랑 만날 일은 없어요.”

절대로요. 거칠게 튀어나온 음성에 담긴 것은 선명한 적의였다. 검은 눈동자는 푸른 불길로 세차게 타오르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상대가 있다면 당장에라도 무슨 일이 터지지 않을까 싶을 만큼 적대적인 모습이었다.

…왜? 서혜나의 눈이 혼란에 젖었다. 정희운의 부모님과 도현은 아무런 접점이 없을 텐데. 그런데 왜 제 아이는 저렇게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가.

서혜나의 입술이 들썩였지만, 결국 소리로 화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마치 스크린 너머의 사람처럼 분노를 삼키는 도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종종 느꼈다. 도현은 비밀이 많은 아이였다. 그것이 도현의 안에서 일어나든 일이든,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든. 그리고 이럴 때면 서혜나는 그녀의 아들과 자신의 사이에 존재하는 벽을 실감했다.

절대로 넘어갈 수 없는 두꺼운 벽.

도현은 단 한 번도 저와 남편을 그 안으로 허락한 적이 없었다. 퇴원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 어떤 순간도 진실로 그들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서혜나와 이장혁은 이번에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논란이 터지고 나서도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도움은 고사하고 속내조차 내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로 뼈저리게.

기다리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 불쑥 겁이 났다.

기다리는 그 순간이 영영 오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번처럼, 도현이 아무리 힘들어해도, 아프고 슬퍼해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면? 결국 영영 벽 밖의 사람으로 남게 되면….

그 순간 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서혜나는 재빨리 얼굴에 떠오른 공포를 지우고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래, 엄마가 잘못 말했네.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아빠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태연함을 가장한 노력이 통한 걸까. 도현은 한층 풀린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답답해하면 안 돼. 서혜나는 차에 시동을 걸면서 스스로에게 되새기듯 몇 번이고 생각했다. 더 알려고, 선을 넘어가려고 하면 안 됐다.

그건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은 일이니.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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