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4화. 소슬하니 부는 바람에 (6)
한적한 주차장에 차 한 대가 들어섰다. 차에서 내린 소년은 새삼스럽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와 함께 촬영장으로 향했다.
“그거 여기로 옮… 헉!”
후배에게 일을 지시하던 한 스태프는 손바닥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의아한 표정을 하던 후배가 뒤를 돌아봤고, 이어 그도 숨을 삼켰다.
그들의 시선을 느낀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전보다 조금 더 날카로워진 선이 풍기는 분위기에 두 사람이 흠칫했다. 그러나 차가운 인상은 소년의 눈이 다정한 곡선을 그리면서 녹아내렸다.
“안녕하세요?”
“아, 네, 네!”
“저 먼저 가볼게요.”
“어, 네, 네!”
방금 굉장히 바보 같은 대답을 한 것 같았지만, 그들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두 사람은 멀어지는 소년의 뒷모습을 넋을 놓고 보았다.
“이도현이네….”
한참 뜨거웠던 인물, 이도현의 귀환이었으니까.
후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되게 멀쩡해 보이네요.”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남자가 눈매를 찡그렸다.
“멀쩡하긴. 딱 보니까 살 빠졌잖아.”
“…아,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남자는 후배를 조금 더 타박할까 하다가 관두었다. 저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니까. 그만큼 도현의 낯빛은 태연했다. 그런 고초를 겪고 돌아온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쯧, 혀를 찬 남자가 고갯짓했다.
“그거나 마저 옮겨. 그만 멍 때리고.”
“하지만 이도현이….”
“쟤가 그 난리를 겪고 와서 여기서도 시선 속에 있어야겠냐?”
“헙, 제,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알면 하던 거나 마저 해.”
“네!”
두 사람은 다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촬영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부족했다.
* * *
시끌벅적하던 촬영장에 차가운 침묵이 깔렸다. 그들의 시선은 단 한 명의 소년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어쩌면 기이하기까지 한 광경 속에서 도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성진수 감독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에 뵙네요, 감독님.”
그 인사는 시발점이었다.
“…아이고!”
난데없이 통곡한 성진수 감독이 허리를 굽혔다. 양손으로 도현의 어깨를 쥔 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또다시 ‘세상에….’ 하는 탄식을 뱉었다.
“정말 고생 많았어요. 얼굴이 반쪽이 됐네, 반쪽이 됐어.”
반쪽까진 아니지 않을까.
도현이 애매한 표정으로 제 뺨을 더듬다가 그냥 웃었다. 멀쩡하다는 어필이었지만, 살이 빠진 탓에 오히려 처연해 보이는 효과를 냈다. 주변에 있던 스태프들의 눈이 한층 더 아련해진 걸 모르는 도현이 태연하게 말했다.
“생각한 것만큼 힘들진 않았어요.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그보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촬영장 분위기가 안 좋았다고 들었어요.”
“누가 그래요, 대체? 어떤 놈이?”
“…어, 하하.”
도현은 차마 말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진윤아-덕만의 아역배우-는 대본 리딩날 받아 갔던 번호를 참 알차게도 써먹었다. 논란이 터지자마자 괜찮냐는 문자 폭탄을 보내더니, 이후에 스스로 정보원이 되길 자처해서 촬영장 분위기를 실시간으로 전달해준 것이다.
‘그걸 말할 수는 없지.’
상대가 호의로 한 행동을 원수로 갚으면 안 될 것 아닌가.
도현이 말할 생각이 없다는 듯 웃어 보이자, 성진수 감독은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뗐다.
“정말 미안합니다.”
“감독님.”
“면목이 없어요. 현장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제 탓이에요. 도현 씨가 너무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 것 같아서, 그게 제일 미안하네요.”
해명 글이 올라온 이후 성진수 감독과 SBC 측은 도현에게 연락을 취했다. 사과하기 위함이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도현이 아니었더라도 이들이 사과했을까?’
이재준이 쓴 게시글은 분명 거짓과 날조로 가득했다. 하지만 도현이 거기서 아무런 깨달음을 얻지 못한 건 아니었다.
- 그의 세계적인 유명세가 사람들의 입을 막았던 것뿐이니….
그 문장. 그것은 도현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내가 쌓아온 것들이 다른 사람들한테는 너무 높고, 아득하게 보일 수 있겠구나 싶어서.
이재준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 잘못된 선택을 했다. 그러나 그가 왜 그런 잘못된 마음을 품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이런 것부터 시작해서, 그에게 주어진 세상과 도현의 세상은 달랐을 테니까.
그렇다고 성진수 감독이 악인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냥 본인한테 이익인 쪽으로 행동할 뿐이었다. 보조출연자에게는 열악한 환경을 제공하면서 도현에게는 최대한 비위를 맞추고 다정하게 구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게 이재준은 참을 수 없이 미웠겠지.
“감독님 탓이라고요….”
생각에 잠기듯 중얼거린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감독이 허리를 굽히고 있어서 시선은 금방 맞닿았다.
“그럴 수도 있겠죠. 조금 더 검증된 사람을 고용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어요.”
“큼, 흠….”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거 아시잖아요.”
글을 올린 게 <왕의 길> 보조출연자이긴 하지만, 그게 성진수 감독이나 SBC 측의 실책은 아니었다. 보조출연자들은 전문 업체로부터 지원받는 것이었으니까.
도현이 담담히 말했다.
“스태프부터 보조출연자, 그리고 아르바이트까지. 한 명 한 명 검증하는 건 비현실적이고 사실상 불가능하잖아요. 특히나 이렇게 인원이 많이 투입되는 작업에서는요. 그러니까 이건 그냥… 운이 없었던 거죠.”
“도현 씨….”
성진수 감독이 감동한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도현은 그것을 잘라내듯 단호히 말했다.
“감독님을 위해서 한 말은 아니에요.”
역시 화가 난 것인가. 성진수 감독의 얼굴에 슬그머니 우려스러운 기색이 올라올 때였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린 건 촬영에 지장이 생기지 않았으면 해서예요. 그건 그냥 운이 없었던 것뿐이니까 촬영장 분위기까지 이어질 필요는 없겠죠. 촬영 날 비가 내렸다고 다 같이 우울해할 필요는 없잖아요.”
“…허.”
성진수 감독은 놀란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분명 열넷 아니었나.’
도저히 열네 살의 아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생각이 깊었다. 게다가 대범하기까지 했다. 그 난리를 겨우 비에 빗대다니.
더욱 놀라운 건 그 말을 한 게 이도현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화를 내고, 분풀이해도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못할 사람. 그게 이도현이었다.
당연한 것 가지고 너무 띄우는 거 아닌가 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은 원래 적응의 동물이었다. 제게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어느 순간 인식조차 하지 않는 게 인간의 본성이었다. 오랫동안 감독으로 일했던 성진수 감독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애가 아니라 상남자였네.’
단정하면서도 어딘가 예민해 보이는 낯. 그러나 그건 단지 생김새일 뿐이었다. 이 순간 성진수는 도현이 상당히 터프하다는 사실을 새로이 깨달았다.
“비가 내린 것뿐이라.”
되뇌듯 중얼거린 성진수가 목소리를 키워서 외쳤다.
“다들 들었죠? 잠깐 비가 내린 것뿐이니까 요란스럽게 굴지들 맙시다. 날도 좋은데 빨리빨리 움직이죠. 갈 길도 먼데!”
“네!”
스태프들이 저마다 소리 내어 대답하자, 도현이 등장한 순간부터 내려앉았던 기묘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깨져 나갔다. 도현은 다시금 분주해진 촬영장을 보면서 작게 웃었다.
역시, 이런 분위기가 더 좋았다.
* * *
분위기가 정리된 후, 도현은 스태프를 따라서 분장실로 갔다. 도현에게 주어진 옷은 비싼 천으로 만든 건 아니었지만, 꽤 깔끔했다.
미실은 비담을 궁 밖으로 내쫓을 때 제 사람을 붙였다. 비담이 걱정되어 그런 것은 아니고, 비담이 혹여나 헛된 짓을 벌이거나 누군가와 접촉할까 봐서였다. 한마디로 감시였다.
그 탓에 비담이 미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걸 생각하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미실의 수하로부터 지속적으로 돈을 받았던 덕에 비담이 거지 생활을 면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또 아이러니했다.
옷을 입은 도현은 거울을 확인했다. 쥐색의 저고리는 엉덩이를 모두 덮고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길이였고 허리끈으로 허리를 잘록하게 묶은 채였다. 바지는 품이 커서 편안했다.
도현이 나오자, 스태프가 도현의 머리카락을 손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나니 어느새 귀밑까지 오던 짧은 머리카락이 날개뼈 밑으로 길어져 있었다. 정확히는 하나로 모아 아래로 내려 묶은 모양이었는데, 머리 끈 역할을 한 긴 천이 등 뒤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이건 비담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스타일이기도 했다.
도현은 고개를 살짝 흔들어 보았다. 날개뼈 아래까지 오는 머리카락이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은 꼭 진짜 같았다.
“…청순해!”
스타일리스트가 감탄을 내뱉었다.
“청순….”
어디가…?
거울 속의 소년은 오른쪽 턱에 붉은 상처를 달고, 얼굴 곳곳엔 먼지를 묻히고 있었다. 그다지 청순하게 보이진 않았다.
그 감탄사를 듣고 모인 스태프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청순한 악역이라니, 완전 최고잖아.”
“덕만이 미인계에 넘어갈 만하네요. 설득력 있어.”
“비담 등장할 때 난리 나겠는데요?”
그들은 도현을 주접 감옥에 가두려는 건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괴로워진 도현이 어색하게 도망치면서 그 소란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복병은 또 있었다.
“허억, 존잘!”
진윤아가 도현을 보자마자 내뱉은 말이었다.
“와, 오빠 나 방금 덕만이 부러워졌어.”
“…….”
“하지만 친구들은 날 부러워하겠지. 훗. 그런 의미로 사진 한 장만.”
논란 이후 이런저런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도현이 많이 편해진 듯한 모습이었다. 원하는 대로 사진을 찍은 진윤아가 뿌듯하게 코를 쓱 쓸었다.
어째, 촬영장에 도착한 지 두 시간밖에 안 됐는데 벌써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기진맥진해진 도현이 터벅터벅 걷자, 성진수 감독이 그를 반겼다.
“준비 끝났어요? 이야, 훤칠하네! 역시 잘생기면 먼지도 장식이 되는구나 싶네요, 하하!”
이 사람들이 단체로 나를 놀리려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던 도현은 옆에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경찬호를 보고 말을 잃었다. 형은 또 왜 그러고 있는 건데….
그때였다.
“아, 도현 씨. 전에, 그 전지적 참견쟁이들에서 말이에요.”
성진수가 갑자기 꺼낸 화제에 도현이 의아하게 눈을 깜빡였다.
“거기서 양궁 배우지 않았어요? 지금도 배워요?”
“아, 네… 주에 한 번은 가요.”
“그럼 한번 써볼래요? 활.”
“활을요?”
도현에게 주어진 대본에서 비담이 활을 쓰는 장면은 없었다. 비담은 단검과 장검을 동시에 쓰는 검사였다.
“잘하는 게 있는데 묵히는 것도 아깝잖아요. 한번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요? 아니면 다시 검으로 바꾸면 되는 거고.”
그래도 되냐고 물으려던 도현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재밌을 거 같아.’
재밌으면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재밌을 것 같다 → 그럼 한다의 간단한 사고 과정을 거쳐 명쾌한 결론을 내린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검이 시시해서 활을 무기로 쓰는 재수 없는 천재, 비담 캐릭터의 시작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