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25화 (426/582)

제425화. 소슬하니 부는 바람에 (7)

도현은 활을 배우고자 했을 때 자연스럽게 양궁장을 찾았다. 목적 자체가 르옌 누바라라는 캐릭터를 위한 것이었으니 서양식 활을 배우는 게 당연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도현의 손에 들렸던 활은 리커브 보우였다. 현대화에 맞추어 인위적인 합성소재와 무게조절기, 안전장치, 조준기 등이 달린 최신식 활.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품에 떠넘겨진 활은 달랐다. 합성소재가 아닌 목재를 주재료로 사용한, 원시적인 형태의 활. 덧대어진 천 외에는 아무런 보조 장치가 없어 민둥하기까지 했다.

“연습해봐도 될까요? 과녁은….”

말하자마자 커다란 과녁판이 등장했다.

“…….”

성진수 감독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갑작스레 활이 생각난 것처럼 말했지만, 실은 이미 이야기가 된 사항이었다. 논란 탓에 촬영도 지연된 마당에 태평하게 ‘검 쓸래요, 활 쓸래요?’ 물을 수 없어 전달이 늦어졌을 뿐.

잠시 후.

사람들은 도현과 과녁 주변을 피해서 뒤편에 자리 잡았다. 실력도 모르는 상황에서 위험하게 주변에 서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도현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사람이 한 명 존재했다.

바로 액션 감독, 조주만이었다.

‘양궁 배운다고 했던가.’

흠, 짧게 소리 낸 그가 생각했다.

양궁과 국궁은 달랐다.

점수 계산 방식 같은 규칙도 다를 뿐만 아니라, 화살의 위치도 완전히 반대였다. 도현이 양궁에 재능이 있다고는 하나, 실제로 국궁을 잘 다루는 건 어려울 것이다.

어차피 자신과 성진수 감독이 도현에게 기대하는 바도 별것 없었다.

활시위를 그럴듯하게 당길 줄 아는 것.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애초에 적당한 흉내보다 더 많은 걸 바랐다면 국궁 선생님이라도 초빙했을 것이다. 그는 별다른 기대 없이 말을 꺼냈다.

“도현 씨. 제가 알려드릴….”

조주만의 말이 도중에 끊겼다.

성진수 감독이 뭐 하냐는 눈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조주만은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에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낸 후 도현에게 집중했다.

검은 눈이 과녁과 그 주변, 그리고 하늘을 훑는다. 섬세한 바람이 소년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조주만의 머릿속에서 한 문구가 떠올랐다.

선관지형 후찰풍세(先觀地形 後察風勢).

먼저 지형을 관찰하고 후에 바람의 흐름을 살핀다.

‘설마.’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속에서 ‘혹시’ 하는 생각이 일었다. 반쯤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가만히 지켜보니, 미동 없이 서 있던 소년이 자연스럽게 발의 위치를 옮겼다.

앞꿈치나 뒤꿈치 쪽이 크게 벌어지지 않은, 평행한 상태였다.

이후에 이어진 동작은 하나의 연결된 프레임처럼 유려했다. 왼손으로 활의 줌통을 쥐고 오른손으로는 화살을 현의 절피에 끼운다. 척추는 기울어짐 없이 바르게 세운 채였다.

조주만이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발의 위치는 정(丁)자도 아니고, 팔(八)자도 아니며, 가슴은 넓히고 배에 힘을 주어 숨을 가득 채운다….”

비정비팔 흉허복실(非丁非八 胸虛腹實).

그의 얼굴에 헛웃음이 걸렸다.

혹시 했는데… 진짜였다. 저 할리우드 스타는 지금 집궁제원칙(執弓諸原則)을 따르고 있었다!

집궁제원칙이 무엇인가.

국궁을 처음 배우기 시작할 때 배우는 사법(射法)에 대한 지침이었다. 다른 말로는 집궁팔원칙이라고 불렀다. 팔 원칙인 이유는 총 네 개의 문구가 하나당 두 개의 원칙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원칙을 모아서 세운 것은 한국 근대 궁도이니, 시기상 맞진 않았다. 하지만 원칙의 의의 자체가 바른 자세로 과녁을 맞히기 위함임을 따져보면 도현의 선택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사이 도현이 활을 쥔 줌손과 활시위를 쥔 깍짓손을 동시에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줌손은 태산을 밀듯이, 깍짓손은 범의 꼬리를 움키듯이. 이마로부터 뺨을 스쳐 귀 뒤를 지나, 어깨 끝에 이르자 활이 완전히 팽팽해졌다.

전추태산 발여호미(前推泰山 發如虎尾).

그리하여 만작(외형상 밀며 당기기의 완성형)한 소년은 그 상태로 고요히 과녁을 응시했다.

활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도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는지, 저마다 숨을 죽였다. 긴 머리카락을 아래로 내려 묶은 소년이 정갈한 낯으로 활시위를 메기는 모습은 어딘가 신비롭고 사연 많은 분위기를 풍겼기에, 몇몇은 아예 넋을 빼놓고 있었다.

그러나 조주만이 놀란 부분은 달랐다.

‘힘이 무슨….’

저 모든 동작은 하나로 이어진 춤사위처럼 유려했지만, 빠르진 않았다. 그 소리인즉, 소년이 아까부터 계속해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촬영용으로 가볍게 나온 활이라고 해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렇게 활은 온 힘을 다해 밀고, 활시위는 반대 방향으로 당기고 있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힘을 필요로 했다.

조주만의 눈이 소년의 팔과 어깨, 단단히 세운 곧은 등과 땅에 뻗은 뿌리처럼 흔들림 없는 하체에 닿았다. 그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그냥 마른 줄만 알았는데 지금 보니 몸의 균형이….

그때였다.

핑-! 마지막으로 폭발시키듯이 깍짓손을 뒤로 당긴 소년이 활시위를 놓자, 바람을 가로지르는 파공음이 들렸다. 팍! 무언가 꽂히는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과녁으로 향했다.

오직 조주만을 제외하고.

활을 잘 쏜 사람의 잔신은 줌팔이 만작 자세에서 흐트러짐이 없이 쭉 뻗어 있고, 깍짓손이 어깨 뒤로 빠져 하늘로 치솟아 있다.

그래, 마치 저 소년처럼!

“헉!”

“맞혔어…!”

때마침 사람들의 감탄사가 들려왔다.

조주만은 그 말에 놀라지 않았다.

만작부터 잔신까지 완벽했는데 결과가 어설픈 게 더 이상하니까. 조주만의 주먹은 어느새 꽉 쥐어져 팔목에 핏줄이 도드라진 채였다.

그의 심정을 전혀 모를 소년은 살짝 좁힌 눈으로 과녁을 확인한 후, 짧게 탄식하더니 별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약간 흔들렸네요. 마지막에 집중이 조금 흐트러졌어요.”

발이부중 반구저기(發而不中 反求諸己).

쏘아서 맞지 않으면 자신의 자세와 마음가짐에서 문제를 찾아야 한다.

“허….”

대체 뭐 하는 애지?

왜 국궁의 미래를 밝힐 인재가 여기서 드라마를 찍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 * *

탁!

여섯 번째로 화살이 과녁에 박혔다. 과녁판을 향해 꼿꼿이 들린 팔을 천천히 내렸다. 도현은 손을 몇 번 쥐었다가 폈다.

‘처음엔 낯설었는데 이제 좀 손에 익네.’

물론 완전히 익숙해지려면 한참 멀었다. 보조 장치가 없어서인지 기존에 쓰던 활보다 정확도가 떨어졌다. 50m까지는 괜찮은데 더 멀어지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람의 흐름을 눈으로 볼 수 없었다면, 정확도가 지금보다 훨씬 더 형편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촬영장에서 계속 연습할 수는 없으니까.’

적당히 만족하고 끝내기로 한 도현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아요. 근데….”

도현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다들 왜 그러고 계세요?”

도현이 본 풍경은 이러했다.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선 사람들이 두 손을 꼭 모은 채 부담스럽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누가 보면 단체로 기도라도 하는 줄로 오해할 만한 광경이었다.

파하, 숨을 토해낸 진윤아가 흥분으로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진짜 대단해!”

진윤아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원래도 동경으로 가득 차 있던 눈이 한 단계 더 발전해 거의 경외로 빛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5m, 10m씩 뒤로 이동하면서도 과녁을 벗어나지 않는 도현의 모습은 상당히 멋졌다. 옛 복식과 바람에 조금씩 살랑거리는 긴 머리카락이 이루어내는 시너지 효과도 대단했다.

“진짜 화랑 같아!”

“고마워. 너도 공주 같아.”

“아니, 나 진심으로 한 말인데…!”

“나도 진심인데?”

“으윽….”

반박하고 싶지만, 순수하게 눈을 깜빡이는 도현의 모습을 보니 말이 쏙 들어가 버렸다. 소년의 진실한 검은 눈을 마주하자니 다 무슨 상관인가 싶어진 진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빠는 오늘부터 화랑이고 나는 오늘부터 공주다.

소녀가 깔끔하게 납득하는 사이, 한 덩치 큰 남성이 조급한 걸음으로 소년에게 다가갔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뜨거운 눈길을 보내는 남자는 조주만이었다.

“국궁도 배웠던 겁니까?”

“아, 네. 양궁처럼 정식으로는 아니지만요.”

“정식이 아니면?”

“양궁 선생님의 권유로 한번 체험해본 적이 있어서요.”

“한 번….”

활은 상당히 섬세한 무기다.

약간의 흔들림만으로도 커다란 차이를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그 흔들림은 신체의 흔들림이기도 했고 정신의 흔들림이기도 했다. 두 가지 모두 단단하며, 섬세하게 통제할 수 있는 이만이 활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활은 섬세한 만큼 변화에 예민했다. 화살의 위치가 왼쪽에서 오른쪽이 된 것만으로. 쏘는 장소가 실내에서 실외가 된 것만으로. 당기는 자세가 바뀐 것만으로 많은 것이 달라지는 게 활쏘기였다.

그런데 눈앞의 소년은 그것을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 해냈다고 말하고 있었다.

겸손인지, 과장인지 의심이 들 수 있는 상황.

그러나 조주만은 그러한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혹시, 직접 액션 연기해볼 생각 있어요?”

“조 감독…!”

조주만의 눈에는 놀란 성진수 감독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온 신경을 소년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가르쳐보고 싶다!

조주만의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잘 다듬으면 값비싼 보석이 될 인재를 발견한 액션 감독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미리 말하는데, 위험할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어요. 물론 최대한 조심해서 할 거지만, 원래 액션 연기라는 게 항상 위험을 동반하는 거거든요. 안전하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그럼에도 한 자락 남은 양심이 그의 이성을 붙들었다. 차마 어린아이를 속여 위험한 일을 권유할 수 없었던 조주만은 부러 겁먹을 만한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애타게 중얼거렸다.

좋다고 해라, 좋다고 해라….

그의 간절한 바람을 하늘이 들어준 것일까.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던 소년이 눈동자를 반짝이더니,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말했다.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해볼게요.”

“!”

“아니, 도현 씨!”

깜짝 놀란 성진수 감독이 도현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다가 다치면 어떡해요! 물론 의욕 넘치는 건 좋지만 그래도 도현 씨는 아직 어리니까….”

“안 다치게 노력해 볼게요.”

이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성진수가 황망히 쳐다보자 도현이 장난이었다는 듯이 웃었다.

“걱정하시는 건 이해해요. 하지만 저는 여기에 어린애가 아니라 배우로서 온 거예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하고 싶어요.”

성진수 감독이 도움을 요청하듯 경찬호를 보았다. 배턴을 넘겨받은 경찬호는 잠깐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고 싶어?”

“네.”

“그래, 그럼. 대신 조심해서 해야 해.”

“네!”

“아니, 매니저님….”

“큼, 흠.”

경찬호가 성진수 감독의 배신감 어린 시선을 피했다. 이쪽도 어쩔 수가 없는 사정이 있었다. 얼마 전에 도현을 믿어주지 않아 그 사달을 냈는데, 지금 또 그럴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런 속사정까지 알 리 없는 성진수는 속이 타들어갔다. 지금 나 빼고 다들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인가. 이 답 없는 상황 속에서 그는 차라리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이러다 다치면 나만 쪽박 쓰는 건데!’

지금이야 좋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다쳐봐라. 그때도 괜찮다고 말할까? 만약 도현이 기분이 상하기라도 하면 성진수만 새 되는 거였다.

“감독님, 안 될까요?”

“그게….”

그런데 딱 잘라서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이쪽의 현장 관리 미흡을 관대하게 넘어가 준 도현이 아닌가. 고작 이 정도 부탁도 안 들어준다고 불만이라도 품으면?

성진수는 어딜 골라도 꽝인 선택지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왜, 왜 하고 싶은 건데요?”

“원래도 액션 연기에 관심 많았어요.”

부족하다 여겼는지 한마디를 덧붙인다.

“몸 사리면서 연기하는 건 취향이 아니기도 하고요.”

아, 그랬지…. 얘 생긴 것만 이렇고 속은 거의 상남자였지.

잠깐 잊었던 것이 다시 떠오르자 그는 그만 아찔해지고 말았다.

그 난리를 겪고도 비가 왔다며 쿨하게 넘어가는 패기 넘치는 소년이 고작 위험하다는 이유로 물러설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예라는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성진수 감독은 처참한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 그럼, 조심해서. 정말 조심해서. 각별하게 조심해서!”

“네, 조심해서.”

검은 눈이 그에게 닿았다. 오늘 하루 동안 본 얼굴 중에서 제일 초롱초롱한 데다가 생기까지 돌았다. 여기서 안 된다고 하면 나쁜 놈이 될 것만 같은 말간 눈빛이었다.

결국, 그는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래요, 합시다. 해요. 한번 해보자고요.”

“감사합니다!”

안색이 확 밝아진 도현이 기쁘게 말했다. 딱 봐도 신났다는 게 보이는 얼굴이었다.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린 성진수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느 쪽이든 꽝이라면 차라리 도현의 터프함에 걸어보자….

성진수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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