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6화. 소슬하니 부는 바람에 (8)
휙, 휙- 주변 풍경이 빠르게 변화했다. 수레를 끌고 가던 한 상인이 갑자기 튀어나와 앞을 가로지르는 이에 간신히 수레를 멈춰 세웠다.
“거, 조심 좀… 흐익!”
성을 내려던 상인은 척 보아도 수상한 무리의 남자들이 연이어 그 앞을 지나가자 도로 입을 다물었다.
앞서 달려 나간 소녀, 덕만은 표정을 굳혔다.
‘점점 인적이 드물어지고 있다.’
충동적으로 궁 밖에 나온 것이 실수였을까. 아니면 인파가 많은 저잣거리라서 마음을 놓은 것이 문제였을까.
무엇이 문제였든 결과적으로 지금 그녀는 쫓기고 있었다. 적어도 호위무사는 동행했어야 했는데.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었다.
잠깐 외진 골목길 사이에 등을 붙인 덕만이 숨을 죽였다. 타다닥. 다행히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 무리가 덕만이 있는 골목을 지나쳐갔다.
“윽!”
옷자락을 걷은 덕만이 눈살을 구겼다. 화살을 맞은 옆구리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창백한 얼굴로 짧게 심호흡한 덕만이 화살을 뽑았다.
흐윽, 한껏 억눌린 신음이 작게 울렸다. 고통을 삼켜낸 덕만이 옷자락을 찢어서 환부를 압박했다. 응급처치를 끝내고 나니 이마며 목덜미가 온통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해.’
여기는 안전하지 않다. 가만히 있다가는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될 뿐이었다. 그리고….
덕만이 손을 쥐었다 폈다. 분명 제 손을 움직이고 있는데, 남의 몸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움직임도 평소보다 굼떴다.
“…마비 독.”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면 극독을 발랐을 터였다. 적어도 목숨은 보전할 수는 있단 걸까? 그렇다면 그나마 희소식이라면 희소식이었다.
“천명, 어마마마….”
그들에게 또다시 가족을 잃는 슬픔을 줄 수는 없었다. 덕만은 주먹을 움켜쥐고 결연히 눈을 빛냈다.
잠시 후, 숨을 죽인 채 골목 밖의 동태를 확인하던 덕만이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텅 빈 거리에 안심하며 한 발짝 뗀 순간이었다.
챙!
덕만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턱 아래 서슬 푸른 칼날이 번뜩였다. 덕만은 꼼짝없이 서서 곳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이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
“…너희들은 누구냐.”
검은 복면의 무리는 조용했다. 덕만은 포기하지 않고 재차 입을 열었다. 혀까지 마비되어 입술이 잘게 떨렸으나, 덕만은 혀를 깨물어가며 또렷하게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한 짓을 저지르는 건가?”
“공주님 아니십니까.”
대답한 건 목에 칼날을 드리운 자였다. 덕만이 뒤를 돌아보려고 하자 칼이 더욱 바짝 다가왔다. 목에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포기하시지요. 반항하면 다치실 겁니다.”
“이러고도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글쎄요. 공주님께서 걱정하실 바는 아니라고 봅니다.”
복면인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내내 굳건하던 덕만의 표정에 처음으로 동요가 피어났다. 도망칠 수 없다. 덕만이 주먹을 세게 틀어쥐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대로, 정말….
그때였다.
“웬 놈이냐!”
챙! 복면인들이 일제히 칼을 꺼내 들었다. 칼끝이 향하는 방향을 본 덕만이 눈을 크게 떴다.
제 또래의 소년이었다.
긴 머리카락을 아래로 늘어트린 소년은 겁도 없는지 제게 검을 겨누는 이들을 향해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심각한 상황 속에서 홀로 마실이라도 나온 듯이 껄렁하게 걷는 소년이라니.
이질적인 광경에 덕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체 저자는…?’
덕만은 보이는 상황 자체에 집중했지만, 복면인들은 달랐다.
‘기척이 없었다.’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있는지조차 몰랐다. 아무리 신경이 공주에게 쏠려 있었다고 한들 마찬가지였다. 숙련된 살수들이 고작 어린애 하나를 눈치채지 못하다니?
그들의 등 뒤로 땀이 흘렀다.
소년의 발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이가 위협적으로 칼을 들어 올리며 낮게 을렀다.
“더 이상 접근하지 마라.”
“으음, 그건 어렵겠는데.”
무거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말투였다. 저를 위협하는 게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듯, 혹은 그따위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될 수 없다는 듯이.
그것을 보고 있던 성진수 감독은 조금 전에 있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 그런데 감독님, 대사를 조금 수정해도 될까요?
- 대사를요?
- 네, 활 때문에요. 활은 일반적으로 원거리에서 사용되는 무기잖아요. 이런 근접전에서 검이 아니라 활을 썼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그 짧은 사이에 거기까지 생각했단 말인가. 갑작스레 국궁을 연습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을 텐데 그사이에 그런 생각까지 했다는 게 놀라웠다.
-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비담은 어쩌면 검을 쓸 필요가 없었을지도 몰라요. 검까지 꺼내지 않아도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정말 놀라운 말은 그다음에 나왔다.
- 비담은 아주 어렸을 때 버려지는 경험을 했어요. 그것도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요. 그건 비담의 안에서 어떠한 방어 기제를 불러일으켰을 거예요. 사람과 관계를 두려워한다든지, 또다시 버려지는 걸 무서워한다든지, 그런 거 말이죠. 그리고….
기억 속의 소년이 흑나비의 날개 같은 속눈썹을 팔랑이다가 연하게 웃었다.
-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포장하고 숨기는 데 능숙하거든요.
그리고 현재에 존재하는 소년이 걸어 나왔다. 역광에 가려져 있던 소년의 낯이 드러났다.
얼굴에 자잘한 상처와 먼지가 붙어 있지만, 그로도 가려지지 않는 곱상한 낯이었다. 그러나 곱상한 낯을 제외하면 평범한 소년일진대 왠지 모를 위화감이 일었다. 방심하는 순간 목덜미를 물릴 것 같은….
- 비담은 궁에서의 자신과 완전히 다른 가면을 쓰고, 스스로를 가렸을 거예요. 버림받는 게 두려우니 타인이 접근을 꺼릴만한 가면으로요.
“흐음.”
기억 속의 목소리와 현실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의미 모를 검은 눈동자로 덕만을 응시하던 소년이 짧은소리를 내었다가, 금방 흥미 없다는 듯 시선을 거뒀다. 소년의 관심을 끈 건 덕만을 제압한 복면인이었다.
“거기 아저씨, 강해?”
긴박한 상황과 맞지 않는 느긋한 말투였다. 덕만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소년이다.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존재한다면 저 소년이 유일했다.
“도와…! 윽.”
그러나 복면의 사내는 덕만이 말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위협적으로 턱 끝에 와닿는 칼날에 덕만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소년은 덕만이 위협을 받는데도 가만히 구경할 뿐이었다. 울컥한 덕만이 천으로 가린 하관을 형편없이 일그러트렸다.
그때였다.
소년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냥 내가 확인할게.”
반응할 찰나도 없었다.
푹!
채 인지하기도 전에 한 복면인이 가슴 정중앙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어느새 소년은 활과 화살을 쥐고 있었다.
다시금 활시위에 화살을 건 소년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자, 머리카락을 묶은 천 자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뭐 해? 안 덤벼?”
“…쳐라!”
- 그렇다면, 비담은 조금 재수 없게 구는 쪽을 택한 게 아닐까요? 부러 상대를 낮잡아보고, 무시하고, 성격 나쁘게 구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대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굳이 검 대신 활로 상대하는 거죠. 너는 이래도 나한테는 안 된다고요.
“그래, 그래야지. 하하!”
소년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둥근 호를 그려 냈다. 사납게 치솟은 입꼬리 사이로 송곳니가 언뜻 비추었다.
동시에 성진수 감독의 외침이 울렸다.
“컷! OK!”
넋을 놓고 있던 스태프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차렸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들의 시선이 쓰러진 더미에 닿았다.
도현의 적중률을 확인했음에도 안전상의 이유로 더미로 대체했을뿐더러, 화살의 끝부분도 화살촉 대신 고무를 달았다. 그럼에도 그 더미는 정확히 심장을 뚫린 채 쓰러져 있었다.
심지어.
“활 쏘는 거 본 사람…?”
“나 본 것 같은데… 언뜻….”
활시위에 화살을 메기는 모습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게, 뭔…?
연기를 하랬더니 무술 영화를 현실로 만들고 있다. 스태프들과 여기까진 상상치 못했던 조주만이 얼이 나간 눈빛을 하다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뀌어서 도현을 응시했다.
그러나 진기 명기한 기술에 혼이 쏙 빠진 이들보다 더욱 놀란 사람이 존재했다. 바로 성진수 감독이었다.
그는 본래의 대본을 떠올렸다.
살수 : 더 이상 접근하지 마라.
비담 : 그건 어렵겠는데. (덕만과 눈을 맞추며) 도움이 필요한 거 맞지?
덕만이 도와달라고 말하지만, 도중에 위협을 받고.
비담 : 그래, 알았어. (검을 휘두르며 살수를 처리하고) 뭐 해, 안 덤벼?
살수 : …쳐라!
비담 : (호기롭게 웃으며) 그래, 그래야지!
달랐다, 많이….
바꾼 건 두 문장밖에 없는데 그 두 문장으로 인해서 비담의 캐릭터가 완전히 변해버렸다. 기존에는 덕만을 도우려는 것처럼 보였다면, 지금은 덕만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뿐일까. 도현의 말대로 비담은 상대를 낮잡아보고, 무시하고, 성격 나빠 보였다.
성진수의 눈이 흔들렸다.
‘이래도 되는 건가?’
어째 화제 몰이 좀 해보려고 검을 활로 바꾼 게 일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느낌이었다. 아니, 실제로 그러고 있었다.
이건 완전히 비담의 성격을 바꿔버리는 일이니까.
그의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총감독이라지만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작가와 상의해야 하고, 윗선과도 이야기해봐야 하고….
물론 작가나 위쪽에서도 쉬이 물리지는 못할 것이다. 이걸 제안한 상대가 이도현이니까. 특히 SBC 측은 이번 일로 도현이 기분 상했을까 안절부절못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독님, 괜찮았을까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도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진수 감독은 아까와 달리 말간 눈빛을 한 소년을 쳐다보았다.
무엇보다, 문제는.
“…뒷부분 촬영 이어서 해보죠.”
“! 네!”
그가 도현이 그려 낸 비담을 계속 보고 싶다는 거였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연기를 보고도 대체 어떻게?
조금, 아니, 조금 많이 골치 아파지겠지만, 성진수는 이도현 버전의 비담이 미치도록 궁금했다. 그것이 비단 개인적인 호기심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이건… 된다.’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먹은 이로써 막연히 그런 감이 들었다.
작가한테는 미안하지만, 대본보다 도현의 비담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재수 없는 천재라니. 상대를 모욕하려고 굳이 활을 쓰는 더러운 성깔머리에, 너는 이래도 나한테 안 된다는 그 독보적인 자신감만 해도 매력적인데….
‘그게 사실은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자 방어 기제라고.’
헛웃음만 나왔다.
궁에서의 모습과 달라진 성격에 설득력은 물론이고, 심지어 알고 보면 그때의 여린 아이와 연장선 위에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버림받는 걸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확실히 매력적인 설정이었다. 놓치기 아쉬울 만큼. 성진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냈다.
첫 베니스 시상식.
그때 난리 난 건 최연소 수상 소식뿐만이 아니었다.
시나리오 공동 저자.
도현의 연기력과 필모가 워낙 대단했기에 상대적으로 묻히고 있었는데, 도현은 첫 영화 데뷔부터 공동 저자라는 타이틀을 따낸 아이였다. 그것도 당시 고작 8살에.
‘이제야 이해가 가네.’
직접 촬영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도현의 연기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도현의 연기를 볼 때마다 느꼈다.
참 영악하다고.
소년은 어떻게 해야 연기로 사람을 홀릴지 알고 있었다. 본능적이든 의식적이든.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재능과 겉모습까지 갖췄다.
타고난 배우다. 그리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연기가 전부가 아니었다. 그냥 도현은 그 분야에서 특출 난 천재였다.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고, 움직이는데 말이다.
성진수는 어느새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소년을 보았다. 능숙한 것 같다가도 칭찬이 쏟아질 때면 어색한 듯, 쑥스러운 듯 귓가를 붉히는 소년을.
‘…애가 착해서 다행이다.’
정말로 신라시대에 태어났으면 나라 하나 말아 먹지 않았을까.
꽤 설득력 있는 생각에 성진수 감독은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