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7화. 소슬하니 부는 바람에 (9)
앞으로 촬영할 부분은 비담이 살수들과 싸우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본래 검이었던 게 활로 바뀐 결과, 비담은 겁도 없이 활로 근접전을 하는 캐릭터가 되었다. 그것도 일대 다수로.
도현은 그것을 소화해야 했다.
“상대는 여덟 명. 그중에서 한 명은 화살을 맞아 절명했으니 남은 건 일곱 명이야. 일곱의 동선을 익혀야 해. 제일 먼저 오른편에 있던 살수가 네게 검을 휘두를 거야.”
액션 감독, 조주만의 지시에 스턴트맨이 시범을 보였다. 그가 촬영용 소품으로 만들어진 검을 내리치자, 조주만이 활을 들어 올려 검을 막았다.
“여기, 천을 칭칭 감아둔 곳. 딱 여기로 막아야 해. 여기만 겉 부분도 단단한 뿔로 되어 있거든.”
목재가 활의 주재료다 보니, 철로 만들어진 검과 부딪쳤을 때 베이거나 부러질 수가 있었다. 그래서 비담은 활의 안쪽 부분과 손으로 쥐는 줌통 부분을 소의 뿔로 덧대었다. 향각궁-양이나 소를 이용해 만든 활-이었다.
“이렇게 막고 나면, 설마하니 활로 검을 막을 줄은 몰랐던 살수가 당황해서 틈을 보일 거야. 그러면 거기를 파고드는 거지. 자, 이렇게 안쪽으로 파고들어서.”
조주만은 도현이 눈에 담을 수 있도록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당황하는 이의 몸에 파고들어, 뒤쪽을 선점한 조주만이 활을 살수의 목에 둘렀다. 활시위가 살수의 목을 조르는 모양새가 되었다.
“목을 졸라서 죽, 큼, 아니, 기절시키는 거지.”
이미 살수 중 한 명은 화살로 심장을 관통까지 했던 뒤인데 이제 와 말을 검열한들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도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양쪽에서 너를 공격할 거야. 그럼 왼쪽은 목을 졸라 죽, 기절시킨 살수의 몸을 방패로 삼아서 막고… 오른쪽은 이렇게 피해서.”
조주만이 오른손으로 우악스럽게 살수의 턱을 틀어버렸다. 아니, 실제로 그러하진 않았으나 그런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하면 돼. 일단은 여기까지만 이어서.”
“완전히… 난투네요.”
“활로 싸우잖아. 검처럼 고상하게 베어버릴 수가 없으니까.”
검이 고상한 거였구나. 이걸 보기 전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조주만의 시범을 보고 나니 이해가 되었다.
활로 근거리에서 싸운단 건 결국 몸싸움을 벌인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코앞에서 칼을 휘두르는데 활시위에 화살을 메길 수는 없으니 말이다.
“사실 원래는 그냥 발로 차는 거였거든.”
“바뀐 건가요?”
“그래, 네 말을 듣고 바꿨어. 활을 쓰는 비담에게는 조금 더 야만적이고 거친 전투방식이 어울릴 것 같아서. 어때, 할 수 있겠어?”
본래라면 촬영 전에 연습이 충분히 들어갔어야 했다. 그러나 도현이 처한 상황이 특수하다 보니 이뤄지지 못한 것이었다.
‘시켜보고 안 될 것 같으면 대역을 세우자.’
이것이 조주만 감독의 생각이었다.
그는 도현이 어느 정도까지 소화 가능한지 확인하고 안전한 선에서 자를 계획이었다. 액션 장면은 약간의 실수만으로도 부상을 초래할 수 있으니까 신중해야 했다.
“한번 해볼게요.”
“일단 외워야 하니까 몇 번 더 보여줄게.”
“아뇨, 동작은 다 외웠어요.”
벌써?
조주만은 의심이 들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익숙해질 때까지는 천천히 맞춰볼 생각이었으니까.
‘보고 틀릴 때 알려주면 되겠지.’
틀리지 않을 거란 가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주만은 입을 조금 벌린 채 도현이 하는 양을 보았다. 처음에는 옆에서 개미가 지나가는 게 더 빠를 정도로 천천히 맞추더니, 한 합, 한 합 맞출수록 조금씩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다섯 번째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의 실수도 내지 않았다.
“…진짜 다 외웠네?”
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사이에 도현은 다시 합을 맞춰보고 있었다. 이제는 거의 촬영 때 해야 하는 속도만큼 빨라진 상태였다. 검을 막고, 목을 조르고, 시체, 아니, 기절한 몸뚱이를 발로 차고, 날아오는 검을 피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물처럼 유연했다.
아니다, 유연하다기보다는…. 조주만이 미간을 좁히며 정확한 표현을 찾아내기 위해 애썼다. 그때 옆에서 감탄사가 들려왔다.
“와, 춤추는 거 같다….”
“!”
그래, 그거였다!
도현은 꼭 하나로 이루어진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춤이라고 칭할 만큼 고상한 동작들이 아니었음에도, 모든 동작이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그렇게 느껴졌다.
비단 천이 너울거리듯이 도현은 유려하게 움직였다. 조주만이 시범을 보였을 때는 산적이 야만적으로 싸우듯이 우악스러움이 느껴졌는데, 같은 동작임에도 도현이 하자 다른 느낌이 풍겼다.
본래 의도했던 느낌과는 약간 결이 달랐지만….
‘…좋은데?’
비담은 본래 궁에서 나고 자랐다.
그리고 지금 도현이 보여주는 전투방식은, 꼭 저잣거리의 왈패처럼 싸우려고 함에도 몸에 밴 과거의 고귀한 신분이 언뜻언뜻 드러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사이 도현은 일곱 번째 연습을 마쳤다. 조금 배어난 땀을 닦아낸 소년이 움직임 탓에 상기된 낯으로 싱그럽게 웃었다.
“이거 발레랑 비슷하네요!”
조주만은 저도 모르게 본심을 뱉어내고 말았다.
“발레 학원에서 뭘 배우는 거야?”
“네?”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조주만은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쳐다봐야 할 게 누군데?
대체 어떻게 해야 실수 한 번을 안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스텝 한 번을 안 꼬이고?
“어떻게 한 번을 안 틀려?”
“별거 아니에요. 다른 분들이 잘하셔서 저는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요.”
“아이고, 역시 이도현 배우님!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시지!”
연습을 시작하기 전까지 완전히 죽상이었던 성진수 감독은 도현이 수월하게 해내자 ‘어?’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제는 ‘횡재다!’라는 낯이 되었다.
이렇게 잘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저는 정말 액션 연기도 잘할 줄 알았어요. 도현 씨가 못하는 게 세상에 어디 있어!”
성진수 감독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조주만은 기분이 한껏 좋아진 성진수 감독과 그를 상대하는 도현을 보며 생각했다.
‘별거 아닐 리가.’
그게 별거 아니었으면 스턴트 배우가 왜 존재하겠는가. 별거니까, 보통은 할 수 없으니까 전문적인 배우가 존재하지!
‘국궁 사용한 게 두 번째라고 했지.’
그 사실 여부는 신경 쓰지 않았으나, 내심 축소해 말한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걸 보고 나니 진실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도현의 습득력이나 신체 통제 능력은 경악스러웠다.
조주만의 시선이 소년의 웃는 낯으로 향했다.
이거 잘하면…?
그는 무언가 결심한 낯으로 도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신중하게 진행된 리허설이 완전히 마무리되고.
“레디, 액션!”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도현은 깊이 심호흡을 했다.
폐에 가득 찬 숨이 빠져나가자 덩달아 머릿속이 고요해졌다. 도현의 시야에서 카메라와 스태프들이 사라졌다. 보이는 것은 오직 그를 응시하는 적들뿐이었다.
전문 배우들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된다는 것은 진심이었다.
모든 동작은 준비 동작이 존재했다. 검을 내리칠 땐 몸을 비튼다든지, 어깨를 젖힌다든지. 주의 깊게 보면 보였다. 그걸 보면 굳이 동작을 외우거나 의식하지 않더라도 어느 각도로 공격이 올지 알 수 있었다.
가장 먼저 공격이 들어오는 건 오른쪽 대각선 방향. 오른팔이 익숙한 궤적으로 들렸다. 동시에 칼날과 활대가 부딪쳤다.
공격이 막힌 살수가 주춤했다. 도현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틈.’
자세가 흐트러지며 파고들 틈이 보였다. 도현은 주저 없이 상대가 내어준 사각지대를 이용했다. 작은 몸체를 백분 활용하여 옆구리 사이로 쏙 빠져나간 다음, 상대가 반응하기 전에 활을 목에 둘렀다.
“컥, 커헉…!”
목이 졸린 살수가 끓는 소리를 내었다. 그가 팔을 휘저으며 반항할수록 도현은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버둥거리는 움직임이 점차 잦아들다가 멎는다.
그때, 양쪽에서 번뜩이는 칼날이 날아들었다.
몇 번이고 연습한 장면이었다. 도현의 행동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축 늘어진 살수의 목덜미를 잡아 던지자, 칼에 박히는 소리가 났다. 도현은 거기에 시선을 주지 않고 곧장 오른팔을 뻗었다.
뚜둑!
“으아아아악!”
우악스러운 손짓에 남자의 목이 꺾였다. 털썩, 단숨에 절명한 살수가 뒤로 넘어가며 흙먼지가 일었다.
그 모든 게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목이 졸리고, 턱이 돌아가 죽은 두 구의 시체. 일반적이지 않은 죽음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제 동료의 몸에 박힌 검을 빼낸 살수가 주춤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것을 제일 먼저 알아챈 건 공주를 제압하고 있던 복면인이었다. 그는 이를 으득 간 후 사납게 외쳤다.
“물러서지 마라! 놈은 한 명이야!”
그럼에도 살수들은 쉬이 도현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그들의 본능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저놈은 맹수라고. 어린 새끼의 거죽을 뒤집어쓴 잔인한 맹수.
도현이 가볍게 목을 꺾었다.
“쓸데없이 겁들이 많네.”
가벼운 비웃음을 머금고.
타앗! 다음 순간 도현이 땅을 박찼다. 당황한 살수가 검을 들어 올렸지만,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동요는 겉으로 드러난 지 오래였다.
채앵- 궤적이 흔들린 검을 귀찮은 것 치우듯이 활대로 쳐내자 검이 머리 위를 날았다. 도현은 한 손으로 남자의 목을 틀어쥔 채 한 손으로는 허공에서 추락하는 검을 잡았다. 그리고 가차 없이 살수의 복부에 쑤셔 박았다.
살이 꿰뚫리는 환청이 들렸다.
소년이 선심 쓴다는 낯으로 손아귀의 힘을 풀자, 복부가 꿰뚫린 남자가 뒷걸음질 치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도현은 사냥하는 맹수처럼 그에게 느긋하게 다가가.
“끄륵….”
검의 손잡이 부분을 발로 지그시 눌렀다.
실로 잔혹한 광경이었다.
‘다른 사람이 잘해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저게 따라가는 수준인가?
조주만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리허설 때도 잘했지만 이건 마치… 연기가 아니라 실제 같았다. 짜인 극본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쯤 되니 감탄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말을 잃은 채로 도현을 보았다. 심드렁한 낯으로 상대를 잔인하게 죽이는 소년은 맹수, 아니, 악귀의 형상 그 자체였다.
‘역시 정답이었어.’
조주만은 도현에게 모든 연기를 원테이크 안에 시도해 보자고 말했다. 도현은 재밌겠다며 눈을 빛냈다.
그 결과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공주를 제압한 살수는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는 것을 느꼈다. 어디서 저런 괴물이 나타난 거지? 벌써 반절 가까이 저 악귀에게 당했다. 이내 그는 입술을 짓쳐 물었다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인질을 데려가는 게 우선이다! 후퇴해!”
“하아.”
도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멍청하기까지.”
진심으로 안쓰럽다는 듯이 중얼거린 도현이 에이씨, 하며 머리를 벅벅 긁다가 등 뒤의 화살통에서 화살 세 개를 꺼냈다. 그걸 보던 스태프들은 깨달았다.
맞다, 저거 활이었지.
활을 너무 활답게 쓰지 않은 통에 그들도 깜빡 잊은 것이다. 그러나 본디 활이란 것은 멀리 있는 목표물을 맞히기 위해 존재했다.
푹, 푸욱!
연사로 날린 화살이 두 명의 살수의 몸통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들은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으나 그보단 도현이 더 빨랐다.
콰득.
그의 손에서 떠난 화살이 다른 한 명의 목을 꿰뚫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