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28화 (429/582)

제428화. 소슬하니 부는 바람에 (10)

카메라 앞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였다. 방금 찍은 장면을 모니터링하기 위해서였다. 소년이 칼날을 피해 몸을 숙이자 긴 머리카락이 허공에 너울대며 잔상을 남겼다.

“와….”

그들은 몇 번째일지 모를 감탄사를 토해냈다.

“어떻게 이걸 하지….”

이미 한차례 직접 봤음에도 촬영된 영상이 믿기지 않았다. 이거 그대로 올리면 조작이라고 하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들 정도로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배우라서 몸 쓰는 것도 잘하는 건가?”

“배우 중에서 몸치가 얼마나 많은데요.”

스태프들의 대화를 듣던 경찬호가 조주만에게 어깨를 붙잡혀 액션 스쿨에 오라는 유혹을 받고 있는 도현을 돌아보았다. 경찬호의 표정은 조금 모호했다.

‘분명 몸치라고 전해 들었는데….’

도현의 부모뿐만 아니라, 언젠가 도현 스스로도 몸 쓰는 일에는 재능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이게 몸치면, 세상에 몸치가 아닌 사람이 대체 어디 있다는 건데.

경찬호는 헛웃음을 지으며 머릿속의 정보를 수정했다.

그러는 사이, 다음 촬영 준비가 모두 끝났다.

“촬영 시작합니다!”

성진수 감독은 더는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이 곧장 외쳤다. 실제로 그는 빨리 촬영을 진행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지금 당장, 이 페이스가 끊기기 전에 찍어야 한다.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레디, 액션!”

한층 높아진 목소리가 촬영장에 울렸다.

* * *

복면인의 우두머리 역할을 맡은 배우가 긴장한 낯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잘한 상처를 단 소년이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아까 전, 그는 저 어린 배우의 연기에 휩쓸렸다. 액션 연기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놀랍긴 했지만, 그는 전문 액션 배우였다.

상대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한들 초보자. 실력으로 눌리는 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를 당황케 한 것은….

‘위압감.’

어깨를 압박하는 듯한, 등줄기에 소름이 내달리는 듯한 기이한 감각. 소년과 계속 마주한 그였기에 누구보다 선명히 느꼈다.

그는 잡생각을 최대한 치우려고 노력하며 대사를 읊었다.

“…너는 누구지? 이자가 누군지 아는가?”

“꽁꽁 싸맸는데 어떻게 알아.”

심드렁하게 대답한 소년은 계속해서 가까워졌다. 남자는 주춤, 주춤 물러나며 조급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을 쏟아냈다.

“그렇다면 상관없는 이라는 소리군. 놓아줄 생각은 없는가? 보상은 섭섭지 않게 하지.”

거칠 것 없던 소년의 걸음이 처음으로 멈추었다. 가만히 멈춰 선 채로 남자를 응시하던 도현이 입꼬리를 뒤틀며 웃었다.

“내가 뭘 바랄 줄 알고?”

“상관없다. 나의 주인께서는 네가 바라는 게 무엇이든 이뤄줄 수 있는 분이시다.”

주인에 대한 말을 꺼내는 것은 금기였다. 하지만….

‘공주를 데려가는 게 우선이다.’

저 소년의 처우는 그 후에 결정하면 될 일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미 두려움에 마비된 상태인 걸 모르고.

남자는 희망을 품은 채 소년을 보았다. 하지만 도현은 이미 모든 흥미가 식은 후였다. 뭐든 들어줄 수 있는 자라도 그의 바람만큼은 이루어줄 수 없으니.

“그건 됐어. 근데 아저씨. 내가 한마디만 할게.”

소년이 가볍게 턱짓했다.

“그거, 너무 쉽게 본 거 아니야?”

그가 말을 채 이해하기도 전이었다. 품 안쪽에서 서늘한 것이 반짝였다. 머리로 인지하기도 전에 그는 뒤로 물러섰다.

간신히 몸을 피한 남자는 천천히 제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갈라진 상의 사이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선뜩한 통증은 한 박자 늦게 찾아왔다.

“…어떻게?”

뒤늦게 몸을 물린 덕에 치명상은 아니었다. 남자는 제 상처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창백하게 질린 낯의 소녀가 서 있었다. 그를 향해 피에 젖은 단도를 겨누며.

남자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분명 지금쯤이면 완전히 마비됐을 텐데? 거동도 어려워야 정상이건만 대체 어떻게….

하지만 그는 더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진짜 멍청하다니까.”

한심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남자는 등골이 싸하게 식었다. 그는 자신이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깨달았을 땐 이미 맹수에게 빈틈을 내준 후였다.

푹-

부정하고 싶은 통증에 남자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넋이 나간 채 제 가슴께를 더듬다가, 마지막 힘을 다해 고개를 들었다. 그가 살아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소년의 비릿한 미소였다.

그렇게 남자의 몸이 허물어졌다.

두 눈을 부릅뜬 채 절명한 시체를 내려다보던 도현이 이미 들을 수 없는 이를 향해 무감하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쓸데없이 겁이 많댔잖아. 어차피 다 죽일 건데. 안 그래?”

도현은 동의를 구하듯이 고개를 들었고.

“…….”

땅바닥에 엎어진 지 오래인 소녀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발로 툭툭 쳐 보았지만 기절한 건지 뭔지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숨은 쉬고 있었다.

도현이 잠시 현실을 외면하듯이 허공을 응시했다. 인적이 뜸한 골목길, 여덟 구의 시체. 그리고 시체는 아닌데 시체처럼 쓰러진 여자애….

“저걸 어쩐다….”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어째, 일이 좀 귀찮아질 것 같았다.

* * *

도현이 하늘을 응시했다. 푸르렀던 가을 하늘에 밤공기 특유의 서늘함이 더해졌다. 리허설 시간이 길었던 터라 전투 장면을 모두 찍고 나니 온전한 저녁에 접어들었다.

저녁에 찍어야 하는 장면도 있으니 추가 촬영을 진행해도 되지만, 하지 않았다. ‘못했다’라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그 장면에도 비담이 등장하고, 비담의 변화는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될까.’

이번 변화는 이야기의 큰 줄기에 영향을 끼치진 않더라도, 비담 캐릭터와 비담과 덕만의 관계에 있어서는 꽤 커다란 파장을 가지고 올 것이다.

큰 기대는 하지 말자.

도현도 하나의 드라마가 탄생하는 데 얼마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지 대충은 알았다. 이만큼의 자본이 투입되는 일이 간단하게 이뤄진다면 더 이상했다.

‘…그래도 재밌었지.’

그런 전투 장면을 찍는 건 처음이었다.

꼭 춤을 추는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이 팔을 뻗으면 도현은 다리를 뻗고. 하나씩 하나씩 박자를 맞춰나가면서. 여러 번 반복하자 어느 순간 그 속에서 일정한 흐름이 느껴졌다.

그 흐름 속에서 탁 트인 자유로움을 맛보았다. 내 신체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감각. 이루 말할 수 없는 짜릿한 해방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도현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았던 게 얼마 전까지의 일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변했을까.

도현은 찬찬히 기억을 되새겨보다가 문득 눈을 깜빡였다.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 체육 시간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기이했다. 원래 내 것이었던 내 몸을 돌려받은 기분이 이러할까. 도현은 복잡한 눈빛으로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움직임은 더없이 자연스러웠다.

도현은 제 나름대로 이 현상을 분석해 보았다. 그가 몸치였던 건 영혼과 육체의 부조화 탓이었다. 병원에 있던 시기에는 불완전한 영혼이라서였고, 이후에는 빈 껍질 같았던 육체가 두 영혼을 감당하게 되니 균형이 깨져서였다.

아마, 도현의 영혼이 안정되어 갈수록 육체도 안정되었을 것이다. 발레를 배운 지 꽤 오래되었다는 것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거기다 양궁으로 집중력까지 좋아졌다.

그렇다면 이게 원래 내가 가졌어야 할 육체인 걸까?

…아니, 아니다. 영혼과 육체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 과거에 육체의 재능이 영혼의 틈을 메꾸었듯이, 지금은 넘치는 영혼이 육체의 틈을 메꾸었을 확률이 높았다.

결국, 이것도 형이 준 것이었다.

도현은 익숙한 아득함에 가라앉았다. 받은 게 너무 커서 어떻게 돌려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아득한 막막함. 그 바다 깊은 곳에 내려앉아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너무 깊어 캄캄했던 바다.

그 수면 위로 햇살이 투과되고 있었다.

* * *

“하아….”

<왕의 길>의 작가, 윤정아는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촬영 일자 맞춰서 대본 보내느라 죽을 것 같은데….

- 게다가 멍청하기까지.

화면 속의 소년이 한탄했다.

안쓰러움과 한심함이 절묘하게 조화된 얼굴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마치 우리 집 고양이가 나를 볼 때 짓는…, 큼. 아무튼.

장면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뒷부분은 분명 기존의 대본과 같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의도했던 느낌과 전혀 달랐다.

단 두 문장.

앞서 애드리브로 수정한 단 두 문장이 만든 변화였다.

그러나 작가인 윤정아는 알았다.

그 두 문장이 핵심이라는 걸.

덕만에게 도움이 필요한지 묻는 대사를 살수를 보며 강하냐고 묻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러자 행동의 원인 자체가 바뀌어 버렸다. 덕만을 돕는 것에서 본인의 흥미로.

또한 도와달라는 덕만의 말에 ‘그래, 알았어’라고 하는 말을 ‘그래, 정했어’라고 바꾸었다. 그게 뭐 큰 차이인가 싶을 수 있겠지만… 그녀는 이전의 문장보다 이것에 더욱 놀랐다.

상대의 도움에 응하는 것과 상대의 의사와 상관없이 스스로 행동을 결정하는 것. 그건 전혀 다른 거니까.

이게 큰 문제인 이유는 후에 일어날 사건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비담은 미실의 명령으로 덕만을 배반하게 된다. 기존의 비담에게는 자연스러웠을 선택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어버리면….

‘어색해져.’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는 건 환경과 상대에 따라 흔들릴 가능성도 적어진다는 거니까. 비담이 미실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듣는 게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으아, 미치겠네.”

그녀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이미 산발이 되어 있던 머리카락이 더욱 엉망이 되었다. 윤정아는 앓는 소리를 내며 두 손에 눈을 묻었다.

“스토리 변화가 없긴 무슨….”

이 파일을 보낸 성진수 감독은 변하는 게 많이 없을 거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것이든, 진심이든. 그녀는 정말이지 기가 찼다.

이게 어딜 봐서 변화가 없어.

아주 스토리 라인을 뜯어고쳐야 할 것 같은데!

- 그래서 내가 쓸데없이 겁이 많댔잖아. 어차피 다 죽일 건데. 안 그래?

노트북에서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 특유의 미성이 들려왔다. 윤정아는 몇 시간 사이에 퀭해진 눈으로 화면을 보았다.

- 저걸 어쩐다….

소년이 한숨을 푹 내쉬자, 윤정아도 덩달아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게, 어쩐다.”

편하게 가려면 수정하지 않겠다고 말하면 된다.

말하면 되는데….

“아악! 왜 쓸데없이 연기를 잘하는 거야!”

그녀는 다시금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책상에서 식빵을 굽고 있던 러시안블루 고양이가 제 주인을 흘끗 쳐다보더니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고양이가 유유하게 빠져나간 방 안에는 괴로워하는 여성만이 남아 있었다.

* * *

다음 날.

촬영장에 나온 도현은 환한 낯의 성진수 감독을 마주했다. 그는 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로 도현을 반기더니, 곧장 본론을 꺼냈다.

“촬영 그대로 이어서 진행합니다!”

“이어서….”

도현은 금방 말뜻을 이해했다.

“어제 했던 대로요?”

“네, 어제 했던 대로!”

“아….”

긴 탄식이 터져 나왔다.

기대하지 말자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기대를 버릴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안도가 차올랐다. 그리고 다음에는, 가슴이 콩콩 뛰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저 열심히 할게요.”

도현이 시선을 내리깐 채 가슴께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아, 어떡하지.

당장 연기하고 싶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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