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29화 (430/582)

제429화. 소슬하니 부는 바람에 (11)

새로이 대본을 받은 도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작 하룻밤 만에 바뀌었다.

물론 전체적인 스토리나 맥락이 변한 건 아니었다. 비담의 말투, 표정, 행동… 총칭하자면 뉘앙스가 제일 적절할 것이다.

게다가.

‘내가 생각했던 대로야.’

활이라는 요소가 추가되자마자 도현의 머릿속에 펼쳐졌던 캐릭터가 고스란히 대본에 녹아 있었다.

마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이건 감독님도 눈치 못 챘던 부분인데, 하는 것들까지 모두.

새카만 눈동자에 흥미로움이 떠올랐다.

‘윤정아 작가라고 했던가.’

기억해둬야 할 사람이 늘었다.

일단은… 대본 숙지가 먼저겠지만. 마지막 단락까지 대본을 훑어 내린 시선이 다시금 맨 처음으로 돌아갔다. 소년은 그렇게 정신없이 대본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대본을 확인하던 진윤아는 반사적으로 숨을 죽였다. 무의식중에 기척을 죽인 채, 대본에 완전히 몰입한 소년을 흘긋거렸다.

‘다른 사람 같아.’

연기할 때와는 또 달랐다.

평상시 도현은 다가가기 쉬운 인상은 아니어도 무섭진 않았다. 은근하게 내뿜는 부드러운 분위기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대본에 정신이 팔린 도현은 한없이 무표정했다. 표정을 짓는 것을 까먹은 사람처럼. 혹은 그럴 여력이나 이유를 찾지 못하는 사람처럼.

문득, 정말 문득 진윤아는 깨달았다. 제 옆에 있는 이 소년이 현시점에서 가장 기대받는, 이미 그녀는 닿을 수 없는 위치까지 높이 올라가 있는 배우란 걸.

사람들은 도현의 행보에 심심찮게 의문을 품는다. 왜 한국에 왔을까. 그리고 왜 한국에서 겨우 아역으로 활동할까.

사실 진윤아도 그랬다.

나라면 미국에 있었을 텐데, 왜 굳이?

그러나 이 순간 진윤아는 그 모든 의문을 접어두었다. 한국에 오는 것, 그리고 거기서 아역 배우 역할을 맡는 것. 둘 중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았다면 아마 진윤아는 그를 평생토록 만날 일이 없었을 테니까.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진윤아의 눈이 의지로 타올랐다.

얼마 후, 그들은 이동을 마쳤다.

오늘 촬영할 장소는 인적이 뜸한 골목에 자리한 집이었다.

비담의 집이자, 유배지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벗어나거나, 벗어나려 시도하는 순간 미실의 수하들이 비담을 추적해 그 목숨을 거두러 올 테니 말이다.

병자처럼 분장한 진윤아가 방 안, 짚 더미를 쌓아둔 곳에 몸을 누였다. 얼굴을 가린 천은 그대로인 채였다.

“윤아, 준비됐어?”

“네!”

진윤아가 발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서로 시선을 받은 도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시작합니다!”

경쾌한 슬레이트 소리가 울렸다.

* * *

‘약초 냄새….’

코끝을 스치는 향에 덕만이 눈을 떴다.

어두운 천장, 허름한 벽. 모두 낯선 곳이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천근 추를 단 것처럼 온몸이 무거웠다.

덕만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때, 어떻게 되었더라?

분명 어떤 소년이 나타나서….

“깼냐.”

“……!”

벌떡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실제로 움직인 건 파르르 떨린 눈꺼풀 정도가 전부였다. 덕만의 눈에 낭패의 기색이 스쳤다.

‘마비 독…!’

그때 당했던 독이 아직 해독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덕만은 제게 가까워지는 신형을 무력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빛이라고는 호롱불이 전부인 어둑한 방 안. 그녀를 이곳에 데려온 이의 실루엣이 조금씩 드러났다. 덕만이 제일 먼저 알아챈 건 상대의 체구가 성인 남성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순간 덕만의 눈매가 느슨하게 풀렸다. 적어도 그 복면의 무리에게 잡혀 온 것은 아니란 걸 깨달아서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덕만은 눈을 부릅떴다.

“가만히 있어. 지금 진짜 싫은 게 누군데.”

상처만 빼면 번듯한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멋대로 덕만의 옷자락을 걷어낸 소년이 복부 주변에 감겨 있던 붕대를 익숙하게 풀었다.

덕만은 상처를 치료한 게 이 소년임을 깨달았다.

“내가 진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딴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야, 너 마비 풀리면 빨리 꺼져.”

투덜거리면서도 새로 달인 약초를 상처에 바르는 손길은 더없이 조심스러웠다. 덕만은 천천히 모든 기억을 떠올렸다.

소년의 등장부터, 마지막 복면인까지 모두 죽여버리던 잔인한 손속. 그리고 정신을 놓기 전 귓가에 와 닿던 희미한 목소리까지.

덕만은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어 입술을 달싹였다.

“…마ㅅ….”

“뭐?”

“고, 맙소.”

“하.”

소년이 어이없다는 낯으로 덕만을 내려다보았다. 아래에서 올려 보는 모양새임에도 고운 낯에 덕만은 소년의 얼굴이 제법 미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당연히 고마워야지, 안 고마워?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개고생 중인 거 안 보여?”

…그리고 성격은 얼굴과 달라도 한참 다르다는 사실도.

“됐으니까 잠이나 자.”

분명 저 소년은 여덟이나 되는 복면인을 단숨에 학살한 실력자이다. 그것도 자비 없는 방식으로 잔혹하게. 그런 자와 단둘이 방 안에 있는 것일진대, 이상하게도 덕만은 무섭지 않았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눈꺼풀이 점차 느릿하게 깜빡여지다가, 이내 닫혔다. 잠기운에 흐려지는 정신 사이로 황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겁을 삶아 먹었나. 자란다고 진짜 자네….”

무어라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이어진 건 아주 깊고도 짙은 수마였다.

덕만이 두 번째로 정신을 차린 건 또다시 밤이었다. 덕만은 눈을 떴고, 제 옆에서 잠든 소년을 발견하고 딱딱하게 굳었다.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린 천을 더듬은 덕만은 건든 흔적이 없는 걸 확인하고 안도했다. 그녀는 다시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이 자가 왜 여기에…. 그러나 의문은 길어지지 않았다. 소년의 손에는 천이 쥐여 있었고 그 옆에는 물을 담은 동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만은 몸이 전보다 조금 가뿐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이전처럼 움직일 정도는 아니지만, 용을 쓰면 상체 정도는 들어 올릴 수 있었다.

힘겹게 상체를 들어 벽에 등을 기댄 덕만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여전히 잠에 빠진 소년을 쳐다보았다.

그때, 소년의 뺨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덕만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이유로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덥썩!

소년의 뺨에 손이 닿기 전에 손목이 붙잡혔다. 소년은 언제 잠이 들었냐는 듯이 또렷하게 눈을 뜬 채 덕만을 응시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 * *

탐색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촬영을 지켜보던 이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채 장면에 집중했다.

그 이상한 순간이 깨진 건 도현이 진윤아의 손목을 놓아주었을 때였다.

스륵, 진윤아의 손이 아래로 추락했다. 맥없이 떨어진 손을 감흥 없이 쳐다보던 도현이 말했다.

“마비는 덜 풀렸나 보네.”

아까 묘한 기류를 나눴던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무감정한 투였다. 분명 도현이 말한 상대는 진윤아인데, 스태프들을 묘한 상실감을 느꼈다.

진윤아는 꿈에서 깬 듯이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말했다.

“…몸을 일으킬 정도는 돼.”

“그래? 그럼 지금 나갈래?”

“…….”

소녀가 침묵하자 소년이 아쉽게 되었다는 듯이 혀를 쯧 찼다. 그 반응에 진윤아는 무엇인지 모를 조급함을 느꼈다.

“이 일은 보답할게.”

“뭐, 어떻게? 너도 내가 바라는 건 뭐든 이뤄줄 수 있다고 하게?”

도현이 픽 웃었다.

“아서라. 네가 빨리 꺼져주는 게 도와주는 거야.”

그리 말하는 도현은 정말로 아무런 기대도 없어 보였다.

그 때문일까.

진윤아 순간적으로 얼굴을 가린 천을 치우고, 내가 이 나라의 공주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물론 그것을 실제로 행하지는 않았다. 그저 여전히 저릿한 손을 한껏 끌어모아 주먹을 쥐었을 뿐이었다.

“닷새.”

“……?”

“닷새 뒤에는 나가. 그때는 마비가 덜 풀렸든, 뭐든 간에 안 돼. 그러니까 그전까지 회복이나 해. 더 돌보기도 귀찮으니까.”

“넌….”

머뭇거리던 진윤아가 물었다.

“넌 왜 날 도와주는 거지?”

도움받는 처지라고는 하나, 그녀가 생각하기에 도현이 덕만을 도와줄 이유는 하등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치료까지 해주면서.

진윤아의 질문에 도현은 심드렁한 눈빛을 했다.

“별거 있나. 주웠으니까 책임지는 거지.”

정말 그게 전부라는 듯이 도현은 더 말하지 않았다. 진윤아는 한참을 고민하듯이 얼굴을 가린 천 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손을 내렸다.

“컷!”

동시에 두 번째 컷 사인이 울렸다.

* * *

덕만과 비담 사이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대화와 에피소드가 이어질수록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케미가 너무 좋은데?’

아무리 도현이 뛰어나다곤 하나 결국은 열넷의 소년이다. 진윤아는 그보다 한 살 더 어리기까지 했다. 그런 아이들이 연기하는 것에 흐뭇함을 느낄지언정 설렘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흥미롭지?”

한 스태프가 한 말에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주억였다.

흐뭇하게 보는 게 아니라 주먹을 꽉 쥐고 한껏 흥미진진해진 채로 보게 되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을 때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기까지 했다.

그들은 깨달았다. 도현의 액션 연기가 워낙 인상 깊었던 탓에 간과하고 있었는데… 본래 도현의 가장 대단한 점은 액션 연기가 아니라 섬세하면서 손에 닿을 듯 선명한 감정 연기였다.

그 사이, 촬영은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그들의 기묘한 동거는 덕만이 두 번째로 정신을 차린 날부터 삼 일 후까지 이어졌다.

정신을 차린 덕만이 비담을 돕겠다며 이런저런 사고를 치고, 또 방이 하나뿐인 집에서 서로 잘 곳을 두고 투닥거리며 가벼운 분위기를 이어가던 어느 날 밤이었다.

잠들었던 덕만은 귓가를 간지럽히는 작은 소리에 눈을 떴다.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린 덕만은 벽면에 기대어 잠든 이를 발견했다. 눈을 떴을 땐 항상 비죽거리기나 하던 얼굴인데, 잠들어 있으니 낯설게 느껴졌다.

새벽녘의 어슴푸레한 빛을 받아 창백한 낯을 멍하니 보던 덕만은 문득 그의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저 새벽달 탓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낯빛이 이상하리만치 창백했다.

놀란 덕만이 몸을 일으켰다.

상처는 덜 나았지만, 마비는 거의 풀린 상태였다. 가끔 팔이나 다리에 힘이 풀리긴 해도 잠든 이의 앞까지 조심스레 다가가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소년의 불안정한 숨결이 느껴졌다.

…깨워야 하나?

그 앞에서 당혹스러움을 느끼던 덕만은 문득 며칠 전 소년이 간호해주었던 것을 떠올렸다.

잠시 후.

물에 적신 천을 가져온 덕만이 어설프게 소년의 이마에 천 뭉치를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공주로 귀히 자란 그녀가 누군가의 시중을 들어본 적이 있을 리가 있나.

이마며, 뺨이며,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목덜미를 닦는 손길이 퍽 어색했다.

그때였다.

파르르, 작은 떨림과 함께 소년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차양처럼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위로 올라가고, 달빛을 받아도 까맣기만 한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덕만은 흠칫 떨었다.

또 그때처럼 팔을 잡아챌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우악스럽게 팔을 잡아채지도, 그렇다고 그녀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어머니….”

소년의 손이 덕만의 뺨에 닿았다.

덕만은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제 얼굴을 가린 면포가 떨어지는 것을 가만히 두었다.

푸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

두 사람이 온전히 서로를 보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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