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30화 (431/582)

제430화. 소슬하니 부는 바람에 (12)

“컷! OK!”

곧장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도현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진윤아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그대로 느릿하게 두 눈을 감았다.

‘누, 눈을 왜 감아?!’

진윤아는 갑자기 눈을 감는 도현에 크게 당황했다. 이러면 분위기가 이상해지지 않는가. 하지만 그녀는 곧 도현이 감정선을 깨트리지 않기 위해 몰입 중이란 걸 깨달았다.

진윤아의 뺨이 조금 달아올랐다.

괜히 혼자 속으로 난리법석을 떨었네…. 그러나 그녀는 곧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아니, 누가 봐도 기류가 이상했잖아! 내 탓이 아니야!’

그 묘한 상황에서 눈을 감는데 당황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거지. 진윤아는 금방 제 페이스를 되찾았다.

그리고선 코앞에 있는 얼굴을 감상했다.

살짝 피곤해 보이는 눈매와 가볍게 닫힌 입술. 옅은 숨결.

배우 이도현이 아니라, 비담처럼 느껴졌다. 그를 가만히 구경하던 진윤아는 저도 모르게 점점 덕만의 심정에 동화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두 배우가 완전히 몰입 상태에 들어갔음을 깨달았다. 그들도 숨소리를 줄이자, 새벽녘의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와 밤의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까지 선명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레디, 액션.”

성진수 감독의 조용한 목소리가 울리고.

도현이 눈을 떴다.

몽롱하던 검은 눈에 천천히 이지가 차올랐다. 눈을 몇 번 깜빡인 비담은 제 앞에서, 제 손에 붙잡혀 있는 게 누구인지 인지했다.

비담의 눈이 천천히 상대의 얼굴을 훑었다. 이마에서 콧대, 뺨 부근에 살짝 머물렀다가 입술, 그리고 턱까지. 느릿하게 움직이던 시선은 이내 옅은 색의 눈동자에 닿았다.

떨리는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비담은 꽤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누구이며, 그리고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나진 않았다. 애초에 궁금해하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저를 알아보지 못한 것도 상관없었다.

내가 그녀를 알아봤으니.

“…보답하겠다고 했지.”

막 잠에서 깬 탓에 조금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덕만은 사이한 술법에서 풀려난 사람처럼 파드득 뒤로 물러섰다. 아니, 물러서려고 했다.

“손을….”

비담이 그녀의 팔을 붙잡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멀어지려는 이를 붙잡은 소년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며칠간 보았던 뻔뻔하거나, 재수 없거나, 비웃는 낯짝이 아니라, 그녀가 처음 보는 얼굴로.

밤하늘보다 더 검은 눈동자가 살짝 이채를 띤 순간, 덕만은 반사적으로 인상을 썼다. 붙잡힌 팔에서 강한 악력이 느껴졌다. 통증이 일었지만 덕만은 그것을 매정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동아줄이라도 된 것처럼 그녀의 팔을 세게 쥐어 잡은 소년이 가엾어 보인 탓인지.

“그렇다면 데려다줘. 궁 안으로.”

아니면 그전부터, 아마도 소년과 눈을 마주친 그 시점부터 이미 마음을 내어버린 탓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 * *

촬영은 순조로이 이어졌다.

그리하여 덕만과 궁에 입성하기까지의 장면이 모두 끝나고. 도현이 용인에 도착한 지 이 주일 정도 흘렀을 때.

“우와….”

진윤아가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

그들은 커다란 현수막이 달린 트럭 앞에 서 있었다. 현수막에는 도현의 얼굴이 커다랗게 프린트되어 있고 그 옆에는 ‘우리 선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하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이 트럭을 보낸 사람은….

“오빠 온탑이랑 진짜 친하구나!”

온탑의 신휘민이었다.

그러나 감탄하는 진윤아와 달리 도현은 떨떠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거 분명 이미지 관리지.’

도현의 논란이 불거졌을 땐 조용히 있다가, 논란이 거짓임이 밝혀지고 나니 간식 차를 보낸다. 마치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 사이의 의리와 우정은 튼튼하다는 것을 과시하듯이.

저 문구도 보라.

“와, 근데 신휘민이 오빠보고 선배라고 불러? 대박!”

이것에 놀라워하는 건 진윤아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열 살은 더 어린 동생에게 ‘선배’라고 칭하는 겸손함에 실시간으로 신휘민의 평판이 좋아지는 게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어쩐지 신휘민이 여우처럼 웃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도현은 헛웃음을 토해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대단한 사람이야….’

이용할 건 다 이용해 먹겠다는 그 태도, 정말 본받을 만했다. 본받진 않을 거지만.

…뭐, 그래도 이쪽도 손해 볼 건 없으니. 도현은 기꺼이 간식 차 앞에 서서 브이를 그렸다. 이 사진은 신휘민이 원하는 대로 도현의 인별 계정에 올라갈 예정이었다.

“와, 마카롱! 어, 브라우니도 있다!”

진윤아가 신이 나서 간식 차에 달려들었다. 도현은 그 모습을 보며 웃다가, 묘하게 술렁거리는 분위기를 느끼고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도현이 그 이유를 깨닫는 것보다 진윤아가 먼저였다.

“어! 저기 희운 선배님!”

아, 탄성을 뱉은 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정희운이 왔다.

* * *

“…왔다.”

희운은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어색하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촬영장에 왔을 땐 저를 향한 관심이 너무 없어서 문제였는데, 지금은 반대로 너무 많았다.

그 관심이 배우로서 관심이 아니란 게 문제지만.

동정이 담긴 시선에 희운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는 이런 상황에서조차도 당당하겠지만, 그 누군가가 희운은 아니었다.

“너 뭐 해?”

그러나 멈춰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날이 선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매니저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참 나.”

매니저는 코웃음을 친 후 앞장섰다. 희운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삼켜내며 그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그의 시선이 매니저의 등에 닿았다.

‘그날 이후로 냉전이지….’

희운이 제멋대로 해명 글을 올린 날.

그날 매니저는 희운을 찾아와 불같이 화를 냈다. 그 후로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사소한 일에 트집을 잡거나 지금처럼 눈치를 주었다.

희운은 가만히 그의 화가 풀릴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쓰면서 말이다.

‘그래도 화를 풀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매니저는 그에게 제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듯이 희운에게 주어졌던 편의를 하나씩 빼앗았다. 한 번은 일부러 변경된 수업 시간을 알려주지 않아서 연기 수업에 늦게 도착하게 한 적도 있었다.

시간을 잘못 전달받았다고 말하긴 했으나….

- 뭐? 내가 말 해줬잖아. 기억 못 했다고 다른 사람 핑계 대면 안 되지.

매니저 형은 도리어 당당하게 나왔다. 희운은 무척이나 억울했지만, 연기 선생님이 매니저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혼나는 수밖에.

조금 더 걷자 한참 촬영 중인 현장이 보였다. 희운은 이미 한차례 촬영을 마쳤는지 분장을 풀지 않은 채 한쪽에서 쉬고 있는 도현을 발견했다.

“우와.”

반사적으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길게 묶은 머리카락과 신라 시대 복식은 상당히 낯섦에도 도현과 잘 어울린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때, 때마침 한 조감독의 외침이 들렸다.

“쉬었다 갑시다!”

그에 촬영장이 한순간에 시끌벅적해졌다. 희운은 멍하니 있다가 매니저가 저를 두고 가는 것에 깜짝 놀라 그 뒤를 따라갔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희운의 매니저가 말을 붙인 건 총감독, 성진수였다. 그는 희운을 발견하고선 반가운 낯을 했다.

“어, 그래. 왔어? 오는 길 힘들진 않았고?”

생각보다 환대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사실 성진수 입장에서는 당연했다. 그리 어렵사리 모신 할리우드 배우가 하차 위기에 있었을 때, 뿅 하고 나타나 해결해 준 사람이 바로 희운이었으니까.

어떻게 안 예뻐 보일까.

“자, 자. 일단 저기 가서 간식 좀 먹읍시다. 아, 저거 도현 씨 지인이 보낸 간식 차인데, 아려나? 온탑의 신휘민이라고.”

그제야 희운은 휴식 시간이 주어진 이유를 깨달았다. 왜 이제야 눈에 들어왔나 싶을 만큼 눈에 띄는 간식 트럭이 떡하니 있었다.

“어! 저기 희운 선배님!”

간식 차 앞에서 도현과 떠들던 진윤아가 알은체를 해왔다. 그에 도현도 덩달아 희운을 쳐다보았다.

희운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곧 그 고민은 무색해졌다. 성진수 감독이 그를 이끌고 간식 차 앞으로 갔기 때문이었다.

성진수 감독이 말했다.

“자, 뭐 좋아해?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골라.”

희운은 메뉴판 앞에서 어버버 댔다. 그런 희운에게 도움을 준 건 도현이었다.

“커피, 코코아, 아이스티 있어. 디저트는 마카롱이랑 브라우니 있는데 브라우니가 덜 달아.”

“그, 그럼 브라우니랑 아이스티….”

고개를 끄덕인 도현이 간식 차 안에 있는 사람을 향해 말했다.

“브라우니랑 아이스티 물 많이 넣어서 주세요. 덜 달게요.”

그러고선 묘한 시선이 느껴졌는지 희운을 돌아보았다. 희운이 의문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자 도현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아이스티가 많이 단 편이더라고.”

…내가 단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안 건데?

희운은 진심으로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그런 개인적인 것을 묻기에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적절치 않았다.

그런 도현과 희운을 흐뭇하게 보던 성진수 감독이 말했다.

“내가 이제야 말하는데, 고마워요. 희운이 네가 발 빠르게 대처해준 덕분에 촬영이 순조로워서.”

“어? 아, 별거 아니었어요!”

화들짝 놀란 희운이 부정했다.

“그냥 아니니까 아니라고 말한 거라서….”

“그래도 네 덕분 맞아.”

도현은 겸손하게 구는 희운의 말을 잘라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왕의 길> 촬영이 제대로 진행된 건 희운의 덕분이 컸다.

“둘이 사이좋게 지내니까 보기 좋네. 앞으로 뭐, 불편한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하고. 알겠지?”

성진수 감독의 말뜻이 내포하는 바는 상당히 컸다. 그는 지금 희운이 긍정적인 의미로 눈에 들었다는 소리를 하는 거니까. 그것을 알아챈 희운은 약간의 불편함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나 그것에 불만스러워하는 이가 한 명 있었다.

도현은 희운의 뒤에서 짜증스레 눈살을 찌푸리는 남자를 보았다.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희운을 내려다보다가 하, 하는 헛숨을 내뱉는 것까지도.

‘저 사람은 분명 매니저였는데.’

이 상황에서 기분이 나쁠 게 뭐가 있지?

도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는지 고개를 든 남자가 도현을 발견하곤 어깨를 흠칫 떨었다.

이내, 대본 리딩 날 보았던 그 속없는 미소 대신 조금은 어색하고 불편한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도현은 그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희운이 분장을 하러 떠난 후에 제 매니저를 보았다.

“형.”

“응?”

“저 인성 논란 떴을 때, 정희운 측 소속사랑 연락했어요?”

“어? 어, 응. 했지.”

“그럼 그때 해명 글 올리는 게 얘기된 거예요?”

“아니. 내가 연락할 때는 정희운 씨랑 연결이 안 됐어. 그쪽에서 사정이 있었던 거 같은데.”

애가 바쁘다거나, 섬세하다는 변명이 사정이 될 수 있다면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경찬호는 정희운의 해명 글이 올라왔던 당시 들었던 생각을 다시금 상기해냈다.

그거, 협의 안 된 사항인 것 같았는데. 그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도현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럼 정희운 해명 글은 형도 모르고 있었던 거네요?”

“응, 그렇지.”

도현은 제 입술을 문질렀다.

무언가 감이 잡힐 듯 말 듯, 찝찝했다.

도현의 눈동자가 정희운이 떠난 방향으로 가닿았다. 검은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빛을 띠었다.

“형, 촬영 끝나면 부탁드릴 게 있는데….”

도현의 말을 들은 경찬호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복잡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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