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31화 (432/582)

제431화. 소슬하니 부는 바람에 (13)

분장을 마치고 나온 정희운은 곧장 용춘의 첫 등장 장면에 투입되었다. 카메라 앞에 선 소년을 향해 걱정스러운 시선이 날아들었다.

지난 논란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 촬영 들어갈 장면이, 대본 리딩 날 신주하 배우에게 호되게 혼이 났던 바로 그 장면이기 때문이었다.

“긴장 풀고. 실수해도 되니까 편하게 하자.”

성진수 감독도 같은 걱정이 들었는지 부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희운은 그 말에 방긋 웃으며 화답했다.

잠시 후.

“레디, 액션!”

정희운의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왕자님이 또….”

“왕후께서 저주받았다는 소문이 사실 아니야?”

“얘! 너 미쳤어? 그런 소리 하다간 큰일 나!”

왕후의 세 번째 아들이 죽었다.

이미 궁에서는 왕후가 저주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 소문은 비단 궁녀의 귀에만 들어가지 않았다.

덕만을 따라 뛰쳐나온 공주, 천명은 궁녀들의 수다 소리를 듣고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작은 손이 덜덜 떨렸다.

‘이제 정희운이 등장할 차례네.’

성진수는 직접 호감을 표할 만큼 정희운이 마음에 들었으나, 연기에 대한 기대는 그와 별개였다. 그는 정희운이 몇 번 실수하더라도 타박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락, 땅에 시선을 고정한 천명의 얼굴 양옆으로 천 자락이 늘어졌다. 퍼뜩 놀란 천명이 고개를 들었다.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은은한 호선을 그린 입술이었다.

천명은 그가 누군지 깨달았다.

그녀의 숙부, 용춘이었다.

“저런 소리는 듣지 마세요.”

“…용숙?”

“귀담을 필요 없는 낭설입니다.”

…저거 봐라?

성진수 감독의 눈에 흥미가 차올랐다. 그리고 그런 반응을 보인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도현의 검은 눈에 이채가 돌았다.

‘다르다.’

정확히 무엇이, 라고 묻는다면 꼬집어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분명히 무언가 달라졌다.

그런 그들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소년은 연기에 집중했다. 다갈색 눈이 왕후와 죽은 왕자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궁녀들에게로 향했다.

온화했던 두 눈이 순식간에 서늘히 내려앉았다. 여전히 부드러운 인상이었음에도 함부로 휘두를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그러나 그 시선이 다시 제 조카에게 닿았을 적에는, 봄눈 녹듯이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정 마음에 걸리시면 제가 따끔히 혼내줄까요?”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숙부의 얼굴을 보던 천명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소녀는 낯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저었다.

“괘,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이 숙부한테는 편히 말씀하셔도 돼요.”

…그럼, 용숙이 옆에 있어 주세요. 천명은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혼자 있고 싶지 않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덕만.

모두 천명을 혼자 두었다.

아바마마는 너무 지고하시고, 어마마마는 항상 죽은 동생들에게 온 정신이 가 있으며, 덕만의 세계는 너무 넓었다. 그래서 천명은 함께 있으나 늘 외로웠다.

“읏차.”

“…무슨?”

용춘이 갑자기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 기행에 천명이 놀라니, 용춘이 뻔뻔하게 옆자리를 탁탁 두들겼다.

“말씀하기 싫다면 제 말 상대라도 되어주세요. 자, 옆에 앉아요. 어서요.”

천명이 쭈뼛대다 옆에 앉는다.

뺨과 목덜미가 불긋하게 달아오른 채였다.

그 장면을 보던 도현은 한 기억을 떠올렸다.

- 얘, 잘했어. 잘했는데 조금만 바꿔서 다시 해볼래? 조금 더 단호함을 섞어서. 다정한 건 좋은데 너무 부드럽기만 해보여.

대본 리딩 날 신주하가 했던 지적이었다. 눈을 깜빡인 도현이 연기에 열중한 소년을 주시했다.

소년의 얼굴 위로 기억 속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 그보단 부드러움 안에 단단한 심지가 있는 느낌으로. 알겠어?

그녀는 분명 그렇게 요구했다.

딱, 저기 있는 정희운처럼.

“하…?”

도현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이제야 알겠다.

‘중심이 잡혔어.’

정희운은 제 형을 하나도 닮지 않은, 소심하고 유약한 성정이었다. 그리고 그 성정은 연기에서도 드러났다.

당시 신주하가 조금 날카롭게 말하긴 했지만, 그녀의 말 중에서 틀린 것은 없었다. 정희운은 스스로의 연기에 믿음이 없었다. 믿음이 없는 연기는 자연히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약간의 여유까지 느껴졌다. 연기를 하는 정희운은 무언가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홀가분해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그날도 저랬다.

도현이 해명 글에 감사를 표하러 정희운을 찾아간 날. 정희운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눈빛으로 도현을 보았다. 순간적으로 낯섦을 느낄 정도로.

정말로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도현아, 다음 촬영 준비해야 해.”

“아, 네.”

도현은 강제로 생각에서 끌려 나왔다. 그러나 경찬호를 따라 이동하면서도 신경은 여전히 촬영장, 정확히는 그곳에 있을 소년을 향한 채였다.

* * *

“복덩이가 여기 또 있었네, 또 있었어!”

“가, 감사합니다.”

하하, 호탕하게 희운의 어깨를 두들긴 성진수 감독의 입꼬리는 있는 힘껏 위로 올라간 상태였다.

‘이도현 친구라 데려왔더니만 이런 보물일 줄이야.’

논란을 빠르게 종식해준 것만으로도 NG쯤은 웃으며 넘어갈 의향이 있었는데, 그사이 무슨 요술을 부린 건지 연기 실력도 대폭 상승해서 왔다.

아니, 이게 본 실력일 수도 있지.

본디 실전에서만 빛을 발하는 배우도 있는 법이니까. 뭐든 성진수 감독에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이거 구도 좀 그려지겠는데.’

덕만을 사이에 둔 두 잘생긴 소년의 쟁탈전.

‘심지어 매력도 정반대잖아.’

동물로 따지자면 도현은 고양잇과였고 희운은 강아지과였다. 계절은 겨울과 봄, 온도는 냉 미남과 온 미남. 어쩜 같은 구석이 이리도 없는 애들끼리 잘 지내는 건지 신기할 정도로 달랐다.

물론 둘의 생김새는 대본 리딩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와 이것이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정희운의 존재감이 살아났어.’

그전에는 도현에 비해서 여러모로 임팩트가 부족했던 터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정희운은 분명 자신만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잠깐 가서 쉬고 있어. 다음 장면 찍을 때까지 시간 좀 있으니까.”

성진수 감독이 넉넉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두들기자, 희운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희운은 감독이 말한 곳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이것도 익숙하지 않네.’

사람들이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굴고, 이렇게 칭찬이 쏟아지는 게 조금 낯설었다. 가장 낯선 건 성진수 감독의 태도였다.

원래 제게 그다지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다. 촬영 중에 온갖 칭찬을 쏟아붓고 말이다.

‘역시, 그 일 때문인가.’

논란을 해결한 게 많이 고마운 모양이다. 희운은 제가 연기를 잘해서 그랬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은 채 홀로 납득했다.

희운이 막 천막 아래에 들어가 물병 하나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너무 기고만장하지 마.”

“…네?”

“너 별거 아니야. 지금 사람들이 너 불쌍해서 조금 좋게 봐준다고 네가 잘한 거라고 생각하지 마.”

희운은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요.”

순순히 수긍했음에도 매니저는 인상을 더욱 험악하게 구겼다. 희운은 그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어 물병만 만지작댔다.

“…그래봤자 너, 이도현 덤으로 딸려 온 거야. 이도현 돌아오면 누가 너한테 관심이라도 가질 것 같아? 네 위치 파악을 잘하라고.”

왜 자꾸 아는 이야기만 하는가.

“알았어요. 근데 형.”

“뭐, 아니라고 믿고 싶어?”

미간을 조금 느슨하게 푼 매니저가 턱을 치켜올렸다. 희운은 그의 시선을 받으며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건 아니고… 저 이제 물 마셔도 돼요? 바람 때문에 모래를 조금 먹었더니 목이 까끌거려서….”

“…….”

“…혀, 형은 목 안 말라요? 저기 물 있는데 제가 가져다드릴….”

“물 여기 있어.”

흰 손이 불쑥 시야에 들어왔다.

희운은 그 손의 주인을 금방 알아챘다. 제 또래 중에서 이렇게 굳은살이 박인 손끝을 가진 건 한 명뿐이었으니까.

물병을 내민 도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물 찾은 거 아니야?”

“어… 나 말고 형 거….”

“아, 매니저님? 여기요.”

매니저는 도현이 내미는 물병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이 가득했는데, 도현이 무언갈 듣진 않았는지 전전긍긍하는 눈치였다.

“필요 없으세요?”

못 들은 건가?

매니저가 긴가민가하며 물병을 건네받으려 손을 뻗은 것과 도현이 필요 없으면 말라는 듯이 물병을 든 손을 내린 건 동시였다.

매니저의 손이 어색하게 허공을 갈랐지만, 손을 내림과 동시에 희운을 쳐다본 도현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희운의 눈에는 빨갛게 달아오른 매니저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감독님이 너 찾더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식은땀만 흘리던 희운이 반색했다.

“어? 나를?”

“응,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무척이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여기 있다간 제게 불똥이 튈 게 뻔하니까.

희운은 재빨리 말했다.

“그래야겠네. 알려줘서 고마워!”

“별거 아닌데. 얼른 가 봐.”

“응!”

희운이 도현이 손짓으로 알려준 방향으로 쪼르르 달려 나갔다. 매니저는 잊어버린 건지 천막에 놔둔 채.

“쟤가 또….”

쯧, 혀를 찬 매니저가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멈춰 서고 말았다.

“성함이 어떻게 되셨죠?”

질문을 던진 건 천막 아래 선 소년이었다. 천막이 만들어낸 그늘이 소년의 얼굴 위에 걸렸다. 소년은 느긋하게 물병의 뚜껑을 따고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 물병을 보니 아까의 민망했던 기억이 생각나 귓불이 달아오른 남자가 과장되게 웃었다.

“하하, 제 이름 기억하기 꽤 쉬운데! 이번엔 기억해 주세요. 권규하입니다.”

“권규하요.”

따라 말한 도현이 싱긋 웃었다.

“그러네요. 이번엔 기억할게요.”

“아이고, 도현 씨가 기억해주면 저는 영광이죠. 희운이 친구면 저한테도 동생이나 다름없으니까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도 되고요!”

“아, 그건 괜찮아요.”

“…아, 하하. 역시 그렇죠? 조금 장난쳐 봤습니다.”

도현이 웃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자 권규하는 점점 더 민망해졌다. 그는 눈알만 데구루루 굴리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그럼. 이만 가볼게요. 희운이 녀석이 워낙 어수룩한 면이 있어서 옆에 제가 있어 줘야 하거든요.”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안타깝다는 듯 눈매를 살풋 찡그리며 말하는 도현은 더없이 진심처럼 보였다. 권규하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마음에 드나?

“그렇죠. 그래도 제가 맡은 배우니까 최선을 다하는 거죠! 매니저니까요.”

그는 부러 제 성실한 면모를 강조했다. 이렇게 할리우드 배우랑 인연을 쌓아놓으면 좋은 인맥이 될 테니까.

“그럼 희운이에 대해서 잘 아시겠네요. 매니저니까.”

“네, 잘 알죠! 제가 쟤 케어한 것만 거진 오 년인데요.”

“오 년….”

도현의 표정이 일순 무너졌으나, 너무 짧은 순간이라서 권규하가 발견하기 전에 사라졌다. 균열이 메꿔진 얼굴은 전보다 더 단단하며, 매끄러웠다.

“진짜 오래 하셨네요.”

“하하, 그렇죠!”

“쓸데없이.”

“네?”

도현이 예의 단정한 낯으로 웃었기에 권규하는 제가 잘못 들었다고 치부했다. 그도 그런 게 그 이도현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었으니까.

‘내가 피곤한가….’

오늘 숙소에 들어가면 조금 쉬어야겠다. 때마침 도현이 축객령을 내렸다.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아 뒀네요. 그만 가보세요.”

“어, 넵! 그, 그럼 이만….”

아주 자연스러운 명령에 권규하는 이상한 것도 모르고 멍청히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역시 잘못 들은 게 맞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우득!

“…아.”

도현은 악력에 못 이겨 우그러진 물병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권 규하.

해늘 엔터테인먼트 부사장의 이름은, 권 강옥.

도현은 아주 긴 숨을 내뱉었다.

무엇에서 기인한 건지 모를 떨림이 방울방울 맺힌 숨을.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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