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32화 (433/582)

제432화. 소슬하니 부는 바람에 (14)

“여기 있었네!”

남자는 한참을 찾아다닌 듯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제자리에서 두어 번 심호흡을 한 후 소년을 향해 걸어갔다.

“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사라져서 놀랐잖….”

가벼운 타박은 갈수록 희미해졌다. 완성되지 못한 문장이 적막 속에 녹아들었다.

“너… 울어?”

“네?”

도현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반문했다. 다시 보니 그림자가 진 얼굴은 물기 하나 없이 건조했다. 그가 보았던 반짝이는 것은 그늘막을 통과해 들어온 햇빛 조각이었다.

역시 그렇지. 울 리가 없지.

경찬호는 한시름 놓으면서도 어색하게 제 뒷머리를 매만졌다. 아무리 잘못 봐도 그렇지. 그런 착각을 하다니.

“아니야, 내가 잘못 봤어.”

“아….”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오해를 했는지 궁금하진 않은 모양인지, 무언가 더 묻거나 말을 더하진 않았다.

“저 데리러 오신 거죠?”

“응, 촬영 준비해야 하니까.”

“가요.”

도현이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 섰다. 경찬호는 발을 내딛다 말고 소년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아까, 표정이 안 좋지 않았던가?

“왜요?”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곧장 질문이 날아들었다. 잠시 침음을 삼킨 경찬호가 고민 끝에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내가 화장실 간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묻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오리라 생각하고 말한 건 아니었다. 경찬호가 봐온 도현은 솔직히 말하기보다는 속으로 삼키는 게 익숙한 성격이었다.

“네.”

“역시 없었… 아니, 뭐?”

“있었어요.”

놀라움으로 커졌던 두 눈이 곧 진지해졌다.

그 이도현이 아닌가.

착하고 상냥하지만, 무심하리만치 이성적인 면이 공존하는 아이. 때로는 거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그런 도현이 이렇게 쉽사리 입을 여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그리고.

“정희운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도현에게서 흘러나온 질문은 상당히 뜬금없고, 그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조금 당황하던 경찬호가 말했다.

“어… 좋은 애지? 너랑 친구 사이고… 또 이번에 우리한테 큰 도움을 주기도 했고. 여러모로 고맙지.”

“아, 죄송해요. 그거 말고 배우로서요. 배우 정희운이요.”

“배우로서?”

“네, 솔직하게.”

그는 여전히 이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였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던 경찬호는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괜찮은 배우지. 과거 작품도 나쁘지 않고, 성실한 성격인 데다가 연기적 잠재력도 있고. 여러모로 네 또래 배우 중에서는 몇 손가락 안에 꼽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요?”

“응, 물론 너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너에 비해서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니까. 개인적으로 가능성이 많은 배우라고 생각하는데….”

줄줄이 말을 잇던 경찬호가 민망한 듯 코끝을 찡그렸다.

“근데 내 평가가 의미가 있나?”

“충분히요.”

“그래…?”

“네, 그래서 말인데… 그거, 서울로 돌아가면 대표님께도 말씀드리는 게 어떨까요?”

“…대표님?”

아까부터 대화는 하고 있는데 말이 통하지는 않는 느낌이었다. 경찬호가 얼굴에 물음표를 잔뜩 띄우자, 도현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분명 초승달 같은 호선이었건만 묘하게 서늘하게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며.

“나머진, 그때 말씀드릴게요.”

소년이 의뭉스레 말했다.

* * *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촬영장의 풍경이 익숙해졌을 즈음에.

“수고하셨습니다!”

도현은 제게 주어진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감독을 비롯하여 스태프들은 아쉬운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벌써 끝이라니…. 연기할 때 누구보다 보는 맛이 쏠쏠했던 도현이었기에 그들의 아쉬움은 컸다.

진윤아가 미련 가득히 물었다.

“바로 갈 거야?”

“응, 가야지. 이제 곧 시험 기간이니까….”

“저번에 수업 다 빼먹고도 중간고사 전교 일 등 했잖아.”

그걸 얘가 어떻게 알지.

“기사 다 났어.”

“…그래도 수업은 들어야지.”

“으으… 아쉬워!”

소녀의 얼굴이 울상이 됐다. 괜히 공주 역할을 맡은 게 아닌지, 고운 얼굴이 울듯이 일그러지자 절로 동정심이 일었다.

“그래도… 연락하면 받을 거지?”

“당연하지.”

“내 연락 무시하면 안 돼?”

“안 그럴 거야.”

도현은 사람들이 왜 제가 연락을 무시하리라 여기는지 알 수가 없었다. 번호까지 교환한 사이는 최대한 다 답장해 주는데….

“그래, 그럼 보내줄게.”

진윤아가 소맷자락으로 눈매를 톡톡 찍는 시늉을 했다. 저런 건 또 어디서 봤대. 어이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아, 희운 오빠한테도 안부 전해줘!”

정희운은 도현보다 촬영장에 늦게 왔지만, 도현보다 빨리 돌아갔다. 도현은 그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진짜 보내줄게! 잘 가! 연락받고!”

“응, 그래.”

도현이 웃으며 말했다.

차로 돌아가는 길, 촬영조차 미루고 따라 나온 성진수 감독이 도현을 배웅했다. 황송하다면 황송한 대우였다.

“모레에 예고편부터 공개될 거예요.”

도현이 차에 타기 전, 성진수 감독이 앞으로의 일정을 알려주었다.

“예고편 다음에는 메이킹 필름, 메이킹 필름 다음에는 방영이죠.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도현이 논란에 휩싸였을 때, <왕의 길>은 도현의 등장 장면을 빼고 5화까지 촬영을 마쳤다. 그리고 도현이 합류하면서 구멍 송송 뚫렸던 필름이 온전한 5화가 되었다.

<왕의 길>같은 장편의 대하드라마는 사전제작 대신 초반 방영분만 미리 찍어두고 나머지는 라이브로 촬영하는 방식을 채택하곤 했다.

그 말인즉슨, 방영이 머지않았다는 뜻이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이거 중요한 건데….”

“?”

“미리 말하지만, 부담 갖진 마세요. 거절해도 괜찮으니까! 그냥 편하게, 편하게 생각해주면 됩니다.”

뭐길래 이리도 눈치를 보는가. 도현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성진수 감독이 큼, 헛기침했다.

“그게….”

그의 입에서 나온 제안에 도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잠시 후.

환하게 웃은 성진수 감독이 도현을 배웅했다. 손을 휙휙 흔들어대는 게, 퍽 신나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감독님도요.”

웃음을 흘리며 대답한 도현이 고개를 꾸벅 한 번 숙인 후 조수석에 올라탔다.

탁. 차 문이 닫혔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도현은 한 달 가까이 머물렀던 드라마 세트장이 멀어지는 것을 눈에 담았다. 기와로 된 지붕과 울타리가 멀어지고 멀어지다가, 이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아, 도현은 새삼 실감했다.

촬영이 끝났다.

* * *

(단독) ‘왕의 길’ 이도현 촬영 종료!]

[배우 이도현, 우여곡절 끝에 촬영 끝… “학교로 돌아갑니다”]

배우 이도현이 우여곡절 끝에 드라마 <왕의 길> 촬영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간다. 한때 일었던 인성 논란은 모두 조작된 사실임이 드러났고, 그에 따라 드라마와 배우를 향한 응원과 격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중이다.

한편, 배우 이도현은 드라마 ‘왕의 길’에서 비담의 어린 시절을 소화했다.

- 내 새끼 고생했다 ㅠㅠ

- 진짜 드라마 하나 찍는데 왜 내 기가 다 빨리냐….

└ 무슨 일 년은 지난 기분임ㅋㅋㅋㅋ

- 촬영 끝남? 그래서 방영 언제임?

└ ㄴㄴ 이도현 촬영만 끝난 거

└ 아… 그럼 방영 멀었겠네

└ ㄴㄴ 곧 할 거임 방영 예정일 이미 나옴 12월 초 ㅇㅇ

└ 오 ㄱㅅㄱㅅ

- 11월 눈치 없냐 ㅠ 왜 안 지나가

- 방영만 기다린다!!!

[<왕의 길> 포스터 공개!]

[‘왕의 길’ 포스터 속 아역 배우들의 케미! 이도현X진윤아X정희운!]

[사각 관계? ‘왕의 길’ 포스터 관심 집중!]

<왕의 길> 방영까지 몇 주 정도 남긴 시점에서 제일 먼저 공개된 건 드라마의 포스터였다.

그리고 공개된 포스터 중에서 가장 화제를 얻은 건 세 아역 배우가 등장한 포스터였다. 논란의 중심이었던 두 배우가 동시에 등장한 포스터라는 점도 한몫했지만….

- 이 조합… 찬성이다

- 와 개안하는 줄

세 아역 배우의 비주얼이 절묘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먼저, 덕만 역할을 맡은 진윤아.

독립적이고 때로는 돌발적인 덕만의 성격답게 고운 얼굴엔 어딘가 모를 장군의 기세가 느껴졌다. 그녀는 검을 쥔 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진윤아의 손목을 세게 쥔 사람이 있었으니, 비담 역할을 맡은 도현이었다. 제 것이라고 티 내는 듯이 그녀의 손목을 꽉 쥐어 잡은 도현은 정희운을 바라보았고.

정희운은 그들과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굳은 낯빛으로 그런 도현을 응시했다.

한눈에 봐도 구도와 성격이 드러나는 포스터였다.

- 온탕과 냉탕의 절묘한 조화

└ 사우나냐곸ㅋㅋㅋㅋㅋ

- 이도현 눈빛 미쳤네;;

└ 저게 무슨 중딩임… 인지부조화 온다

└ ㄹㅇ 눈빛만 봐도 집착남 서사 뚝딱임

그리고 포스터를 향한 관심이 식어갈 무렵.

[<왕의 길> 예고편 전격 공개!]

[SBC 대하드라마, ‘왕의 길’. 드디어 그 베일 벗는다!]

예고편이 공개되었다.

홍매화가 흐드러진 화면에 까만 먹물이 부어졌다. 그 위로 고풍스러운 붓글씨로 ‘왕의 길’이라는 글자가 수놓아졌다.

둥, 둥.

심장께를 자극하는 북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횃불이 어두운 하늘을 밝혔다. 이어, 화면이 땅에 길게 늘어진 붉은 옷자락을 비추었다.

- 제 권력이 그리 탐이 나셨습니까.

카메라가 점점 위로 올라갔다. 화려한 자수가 수놓인 붉은 옷자락이 횃불처럼 일렁였다.

- 그렇다면 그 권력.

이윽고, 여인의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꽃처럼 해사하게 웃는 낯은 지독히 아름다워서 배경과 부조화를 이뤄냈다.

여인, 미실이 입을 열었다.

“제가 갖겠습니다, 폐하.”

쿵!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듯한 효과음과 함께 화면이 반전되었다. 침소에서 죽은 아들을 품에 안고 오열하는 왕후, 슬퍼하는 천명, 그리고 궁을 뛰쳐나온 덕만이 짧게 지나갔다.

타다닥!

덕만이 무언가에 쫓겨 달아났다.

“저기다!”

그러나 덕만의 뒤를 쫓는 이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덕만이 턱 아래에 드리워진 칼날에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웬 놈이냐!”

서늘한 쇳소리와 함께 복면인들이 칼을 꺼내 들었다. 화면은 천천히 방향을 바꾸었다.

제일 먼저 보인 건 화살과 활 통을 멘 등이었다. 활 통 위로 긴 머리카락이 길게 드리워져 살랑였다.

“더 이상 접근하지 마라.”

“으음. 그건 어렵겠는데.”

화면이 움직이며 소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하얀 낯에 떠오른 비뚜름한 미소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말투도, 행동거지도 가벼웠지만, 상대를 응시하는 검은 시선은 가벼이 볼 수 없는 강렬함을 품고 있었다.

“거기 아저씨, 강해?”

소년의 미소가 짙어지고.

두웅, 깊은 북소리와 함께 화면에 먹물이 번졌다. 모든 게 까맣게 물든 화면에 떠오른 건, 방영 예정일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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