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4화. 소슬하니 부는 바람에 (16)
“아, 별 뜻 아니에요. 그냥 얼마 안 남았구나 싶어서.”
그게 별 뜻 아니겠냐.
정한결과 경찬호는 한마음 한뜻으로 앳된 소년을 쳐다보았다. 소년은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것처럼 말간 표정을 지었다.
신이 너무 사랑하여 생명을 불어넣은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구석이 있는 낯빛은 한없이 순결해 보였다. 그게 조금 전까지 제 계약을 두고 협박한 자의 낯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으… 계약 문제랑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
“음, 그렇네요.”
고개를 주억이는 모습에 정한결이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그보다 도현에 대해서 빠삭한 경찬호는 알고 있었다. 도현이 이리 순순히 넘어갈 리 없다는 것을.
사실 그에게도 도현의 협박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확신했다.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했다는 건, 그만큼 굳은 결심이 있다는 소리니까.
그러니까 분명 물러서지 않을….
“서로 좋은 일이 될 것 같아서 말을 꺼냈는데… 제 성급한 판단이었나 봐요.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않을 게 분명….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그럼 얘기는 여기까지인 걸로 할까요?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어요. 전 그만 일어나 볼게요.”
분명했던 거 같은데….
산뜻하게 말한 도현은 정말 아무런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며 정한결을 바라보는 게, 그의 입에서 인사말이 나오면 그대로 자리를 뜰 기세였다.
경찬호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속으로 고심했다. 도현이 이렇게 쉬이 포기할 인물이 아니란 걸 알아서 더욱 찝찝했다.
정한결은 긴가민가하는 얼굴이었다. 이게 잘된 일인가, 아니면 망한 일인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연신 도현과 경찬호를 번갈아 보았다.
상황만 따지자면 도현이 물러선 건데… 어째선지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이대로 보내면 안 된다는 강력한 예감이었다.
이 일로 인해서 내년 재계약 때 도현이 계약 연장을 하지 않으면 어떡하냐는 불안도 한몫, 아니 여러 몫 했고….
‘서로 좋은 일이라고 했지.’
그 말이 자꾸만 걸렸다.
물론 그 좋은 일이란 게, 단순히 정희운이라는 가능성 넘치는 -도현의 주장에 따르면 그랬다- 배우를 얻는다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그의 감이 그게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가봐도 될….”
“자, 잠깐!”
정말로 한 치의 미련도 없어 보이는 태도는 정한결의 조바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저대로 떠난다면, 어쩐지 재계약일에 저 말간 얼굴로 ‘그때 얘기 끝났잖아요?’라고 하며 그의 속을 뒤집어 놓을 것 같았다. 그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어디, 중소형 기획사가 할리우드 배우를 품을 기회가 흔할까. 도현이 소속되어 좋은 점은 단순히 도현이 벌어오는 수익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금까지 수익 면에서는 기대 이하였다. 물론 다른 아역 배우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대 수익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가.
도현은 생각보다 더 연기에 진심이었고, 돈이 되는 배역보다는 하고 싶은 배역을 택했다. 그리고 CF를 비롯한 광고에는 절망적일 만큼 관심이 없었다.
다른 연예인들은 광고 섭외가 안 들어와서 문제인데, 이쪽은 광고가 들어와도 도무지 할 생각을 안 해서 문제였다. 그렇게 캔슬된 일정이 생각날 때면 정한결은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피 같은 내 돈…!
…그렇지만, 도현의 존재는 단순히 수익 면으로만 가치를 매길 수 없었다. 그로 인해서 얻어지는 부차적인 이득도 따져봐야 했다.
그 고개 뻣뻣하던 방송국 놈들도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던가. 또한 도현을 동경하는 배우들이 기획사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점도 무시 못 했다.
그리고 남들에겐 거의 하늘 같은 할리우드가 도현에게는 제집 안방이지 않나. 그건 도현을 통해서 새솔의 다른 아티스트도 할리우드에 진출할 기회가 생긴다는 것을 뜻했다.
말하자면 도현은 황금 거위였다.
그 가치를 쉬이 매길 수 없는!
“일단… 일단 다시 앉아봐요.”
“네? 전 할 얘기가 끝났….”
“에, 에헤이! 씁,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보라는 말 몰라요?”
걔는 미국 출신인데요. 경찬호는 목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제가 언제 안 된다고 했나요? 어렵다고 했지. 자, 자. 앉아서 조금 더 얘기를 나눠봅시다.”
그게 그 소리 아닙니까, 대표님…. 경찬호의 눈빛이 조금 미지근하게 식었다. 도현은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방긋 웃었다.
“아, 제가 또 성급했나 보네요.”
“성급할 것까지야 있나! 자, 일단 앉아요. 서 있으면 다리 아프잖아요.”
도현은 정한결의 손길에 이끌려 다시금 소파에 앉았다. 도현이 소파에 엉덩이를 붙인 것을 보고 안도한 정한결이 어깨의 긴장을 조금 풀었다. 일단 어디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후우, 숨을 내쉰 정한결이 자세를 바로 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친근하던 인상이 조금 차분히 가라앉았다.
확실히 도현은 어떤 방식으로든 어르고 달래서 회유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정한결은 사업가였다. 절대로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
“그래서… 도현 씨는 친구, 아니, 배우 정희운을 우리 소속사로 데려오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그게 서로에게 좋은 일이 되리라 생각하고요?”
아까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황당하던 표정을 싹 뺀 진지한 낯이었다. 진심으로 이 얘기를 나눠 보겠다는 사인이었다.
정한결은 표정을 진지하게 굳히면서도 의심이 들었다. 아역 배우를 상대로 이게 맞는 건지. 지금이라도 사람 좋게 웃으며 달래야 하는 건 아닌지.
그러나 그 의심은 금방 산화했다.
정한결의 바뀐 태도를 본 도현이 정답이라는 듯이 옅게 웃었기 때문이었다.
“…저도 정희운 배우가 누군지 알아요. 그 작품도 조금이지만 본 적 있고요. 그가 가능성 있는 배우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가 가볍게 헛기침했다.
“흠, 이건 기분 나쁘게 듣지 말아주세요. 기존의 계약을 무시할 정도로 매력적이진 않습니다. 그건 너무 리스크가 커요. 사실… 도현 씨가 한 말이 아니었더라면 고려조차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는 제 의사를 밝히면서도 도현에게 아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너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존중하고 있노라는 어필이었다.
그리고 사실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고 확신해요?”
경찬호도 궁금하다는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그가 아는 도현은 행동에 이유가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보통 그 이유는 누구나 납득 가능할 만큼 타당했다.
그런 도현이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고 한다면, 그 이유가 있을 터였다.
정한결의 질문을 마지막으로 대표실 내에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미묘한 표정으로 이곳에서 제일 어린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도현이 입을 열었다.
“이번 겨울에 샌디에이고에 가지 않을 예정이에요.”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 뜬금없었다.
“패스파인더를 찍으러 가기 전까지는 조금 더 이곳 생활에 집중해 보려고요.”
“……!”
이게 상황에 맞는 대답인지는 별개로, 한국 생활에 집중하겠다는 말은 희소식이었다. 도현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이왕이면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어요. 그동안 아예 안 해봤거나 자주 안 했던 것들….”
경찬호가 아리송한 낯을 했다. 도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그러나 정한결의 안색은 점차 변해갔다.
이거 혹시….
“예, 예를 들면….”
그가 더듬거리며 꺼낸 말에 도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요. 아마… CF라던가?”
“!”
“로하이 정수기가 마지막이었던 가요? 꽤 오래됐네요…. 슬슬 광고도 몇 개 찍을 때 됐죠. 아, 그러고 보니 인별 계정도 다시 제대로 운영해야 하고… 음, 또 재밌는 게 있던가요?”
정한결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가 도현에게 아쉬웠던 건 단 한 가지였다.
바로 그가 작품 촬영을 제외한 활동에 심드렁하다는 것.
늘 좋은 제안이 들어와도 피눈물을 흘리며 거절할 수밖에 없었는데….
“과, 광고는 몇 개나 생각….”
“어차피 왕의 길 끝나서 한가하니까요. 좋은 제안이 들어오면 개수는 상관없지 않을까요?”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조금 컸다. 지금까지처럼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소속사 측에서 제안하는 다른 활동도 해보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니까.
정한결은 이쯤에서 좋다고 냅다 말을 던지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아직 마지막 한 건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재계약은…?”
도현은 선뜻 대답했다.
“긍정적으로 얘기해 볼 수 있겠죠.”
더는 말이 필요치 않았다.
* * *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인 줄은 몰랐어.”
“정희운이랑요?”
“응.”
차에 시동을 걸던 경찬호가 긍정했다. 도현은 그 말에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안 친한 게 맞으니까.
“이상해 보였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그는 말을 고르는 듯했다.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는 거지.”
그는 도현의 최측근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까 도현이 연기 활동 외에는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도 알았다.
처음에 광고 한 번, 예능 몇 번 나가더니 흥미가 떨어진 것도. 그래서 그 이후로 줄곧 제안을 거절해 왔다는 것도 안다는 말이었다.
도현이 꾸준히 하는 건 모델 활동인데….
‘아마, 마린느도 부모님 브랜드가 아니었으면 모델을 거절하지 않았을까.’
그는 거의 확신했다.
도현이 딱히 그러한 것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흥미가 있진 않았다. 연기보다는 뒷전, 그리고 학교생활보다도 뒷전. 딱 그 정도의 느낌일까.
사실 도현에게는 당연할지도 몰랐다. 집도 부유하니 금전적 압박도 없을 테고, 데뷔 때부터 유명해져서 자신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압박감도 없을 테니까. 다른 연예인들은 탐내는 것들이 도현에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겠다고, 그리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오늘 도현의 행동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 그리고… 리스크가 그리 크지 않을지도 몰라요.
도중에 꺼낸 의미심장한 말도.
‘그러고 보니 촬영장에서 이상한 부탁을 했었지.’
정희운에 대한 감상을 말해달란 부탁 이전에, 도현은 뜬금없이 경찬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 해늘 엔터테인먼트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요? 인터넷에 떠도는 거 말고… 관계자한테 전해 들은 이야기 같은 거요.
잘 모르겠다고 하니 가능한 선에서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가벼운 소문이라도 좋으니.
그때 당시엔 이상한 질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와보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건이 연결된 것 같았다.
경찬호가 옆을 흘깃 쳐다보았다.
소년은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가만히 멀어져 가는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