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36화 (437/582)

제436화. 소슬하니 부는 바람에 (18)

누군가 경찬호에게 도현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종잡을 수 없는 아이라고.

모든 행동에 납득 가능한 논리와 이유가 존재한다. 그런데도 ‘종잡을 수 없다’라고 느끼는 것은, 그 논리와 이유를 통해 도출된 결과가 비범한 구석이 있어서였다.

“정말 그냥 가도 괜찮겠어?”

“네.”

비범한 구석이라 함은 이러한 것이다.

예를 들어, 자기 자신을 미끼로 쓰며 협상까지 했으면서 정작 그 협상의 당사자-정희운-를 본체만체 지나간다든가, 알고 보니 그에게 소속사 이적 의사조차 묻지 않은 상태였다든가 하는 것들.

“그때 말씀드렸던 것처럼 모든 일은 소속사를 통해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제가 아니라요.”

그래, 이것도 있지.

당시 대표실에서 도현은 몇 가지 조건을 달았다. 대체로 이상했지만 가장 이상한 게 바로, ‘자신이 이러한 일을 벌였다는 걸 정희운이 모르게 할 것’이라는 조건이었다.

- <왕의 길>이 방영되고 소속사 측에서 정희운에게 컨택해 주세요. 음… 연기 인상 깊게 봤다고, 괜찮다면 함께하고 싶다고. 계약 기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넌지시 물어보는 것도 좋겠죠.

- 그렇게 할 수는 있지만… 정희운 씨가 이적 생각이 없으면 우리도 어려워요. 억지로 빼내 올 수는 없으니까.

거기서 뭐라 대답했더라.

아.

- 아니요, 정희운은 올 거예요.

- 네? 어떻게 확신을….

- 제가 여기 있잖아요.

도현의 태도는 무척 담담했다. 당연한 얘기를 한다는 듯이.

정한결은 두 사람이 그 정도로 친밀하단 뜻으로 여긴 모양이었지만… 경찬호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닌 것 같던데.’

고민하던 경찬호는 직접 묻기로 했다. 대답을 내어줄 수 있는 이가 바로 옆에 있는데, 혼자 이리저리 추측하는 것도 이상하니까.

“왜 네가 그랬단 걸 비밀로 하는 거야?”

“여태 그거 고민한 거예요?”

“어, 응….”

도현이 가볍게 웃었다.

“그냥, 별거 아니에요. 제가 그랬단 걸 알면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잖아요. 자존심 상할 수도 있고….”

“아. 그럼 정희운이 수락할 거라 확신하는 건?”

“그야… 제가 있잖아요?”

도현이 보란 듯이 턱을 조금 들어 올렸다. 그때와 같은 대답이지만 뉘앙스가 달랐다. 약간은 오만할 만큼 당당한 모습에 경찬호는 할 말을 잃었다.

“이도현이 있는 소속사인데, 오고 싶지 않겠어요?”

그 장난스러운 투에 경찬호는 깨달았다. 도현이 말하는 게 ‘친구’ 이도현이 아닌, ‘배우’ 이도현이라는 걸. 원래 이렇게 뻔뻔했던가. 너무 당당해서 한 소리 하고 싶은데 또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

도현은 복잡미묘한 얼굴로 연신 입술만 뗐다 붙였다 하는 경찬호를 보다가 작게 웃었다. 그러나 그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땐, 모든 표정이 사라진 후였다.

* * *

밤새 도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오자, 늦은 시각까지 깨어 있던 부모님이 도현을 맞이했다. 졸음을 몰아내기 위함이었는지 텔레비전에서는 도현도 본 적 있는 영화가 재생되고 있었다.

“그럼 푹 쉬어.”

“네, 데려다주셔서 고마워요.”

도현이 무사히 들어간 걸 확인한 경찬호가 부모님과 몇 마디 나눈 후 떠났다. 도현은 현관 앞까지 그를 배웅한 후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서혜나가 졸음기가 묻은 목소리로 물었다.

“배는 안 고프고?”

“네, 저녁 먹었어요.”

“내일 학교 갈 거라고 했지?”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고 이 밤새 달려서 온 거니까.

“힘들면 안 가도 되는데….”

“괜찮아요. 지금 바로 자면 돼요.”

“그래, 그럼 얼른 씻고 푹 자. 아침에 피곤하면 말하고. 무리하면 안 되니까.”

이장혁은 오늘 보았던 제작발표회에 관해서 무언가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도현의 피곤함이 우선이라 생각했는지 입을 열진 않았다. 그저 고생 많았다며 도현의 어깨를 두들겨줄 뿐이었다.

“엄마 아빠도 가서 주무세요. 저도 씻고 바로 잘 거예요.”

도현은 일단 두 사람을 안방으로 보냈다. 의미 없이 흘러나오던 텔레비전 소리가 뚝 끊기자, 집안에는 적막이 찾아왔다.

도현은 복도를 가로질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시원한 물로 세수를 하고 나오니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도현은 세수 중에 덩달아 물에 젖은 앞머리를 귀찮다는 듯이 치워내며 방문을 열었다.

떠날 때와 다름없이 정돈된 공간이 도현을 반겼다. 방에 들어서던 도현은 순간 멈칫했다.

그건 우연이었다.

책상 옆에 반듯이 세워 놓은 바이올린이 시야에 들어온 것은.

“…….”

도현은 홀린 사람처럼 걸어가, 바이올린 가방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흰 손가락은 가방에 닿기 전에 오므려졌다. 도현은 옅은 숨을 토해내다가, 피곤한 낯으로 침대에 걸어가 풀썩 누웠다.

눈 아플 정도로 밝은 전등이 보였다. 도현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형이 그렇게 아꼈던 너인데. 타인이 상처입히고 괴롭힌다는 게 무척이나 불쾌했다.

모순적인 건 알았다.

정희운이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았다는 걸, 그것이 자신에게서 기인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체할 때도 있었으면서. 지금 와서.

그러나 정희운에 관련된 일에서 도현은 늘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잊어버렸다. 머리로 알던 것과 눈앞에서 보는 게 달라서일까. 가만히 호흡하고 있으려니 환상처럼 목소리가 들렸다.

- 너 별거 아니야.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이미 몇 번이고 곱씹은 일인데도 떠올릴 때마다 마음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설명할 길 없는 분노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손등으로 눈가를 덮은 도현은 금방 진정했다. 분노가 가신 낯은 고요했다. 누군가 보았더라면 이중인격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극적인 변화였다.

어쩌면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몰랐다.

방금의 선명한 분노는 제 것이 아니었으니까.

손등 아래서 도현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안다. 이 분노는 내가 아니라 남자를 향한 것이다. 감히 제 동생을 해치려 구는 남자를 향한 것이었다. 그런데 형, 나는….

형이 나를 질책하는 것 같아.

“하하.”

도현이 자조했다.

이게 차라리 피해망상이면 좋겠다. 나 혼자만의 착각이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그러나 도현은 모를 수가 없었다.

내가 아니라 형이 살아남았다면, 그 명제는 수도 없이 상상했던 것이니까. 이번에도 자연히 그 생각이 따라붙었다.

만약 그날 남은 게 내가 아니라 형이었더라면… 그랬다면 과연 정희운이 이런 상황에 처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형이 그렇게 둘 리가 없으니까. 애초에 그런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정작 정희운을 싫어한 건 나였는데, 안 좋은 일은 정희운에게만 생긴다. 자꾸만 그의 불행이 내게서 기인했다.

학교도, 소속사도.

도현은 숨이 턱 막혔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음을 앎에도, 형이 이걸 알게 되면 내게 실망할 거란 생각이 불안을 충동질했다. 이윽고 도현은 깊은 자괴감에 휩싸여 긴 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정희운에게 미안해하는 게 아니라 형에게 버림받을 걸 걱정하고 있었다.

다행인 건가. 이런 나를 형이 몰라서.

“…나 진짜 별로네.”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진짜 최악이다 싶었지만, 그다지 새삼스럽진 않았다. 도현이 아는 자신은 언제나 제멋대로에 엉망인 구석이 있었으니.

웃음기가 가신 눈으로 바이올린을 쳐다보던 도현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였을까.

내가 한국으로 와야 했던 이유가.

너를 만나,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 내가 망친 걸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서….

도현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모두가 잠든 새벽은 차갑도록 적막했다.

* * *

지이익-.

불판 위에 고기가 올라갔다. 질 좋은 고기가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며 사람들을 유혹했다.

딸랑- 문이 열리며 울리는 종소리에 몇몇 이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들은 곧장 안색을 활짝 펴고 새로운 이를 반겼다.

“어서 와요!”

윤정아 작가의 반가운 외침에 다른 이들도 문 쪽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편한 청바지에 맨투맨을 입은 소년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소년, 도현이 싱긋 웃었다.

도현은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인사를 일일이 받아주었다. 종착지는 열심히 손짓하고 있는 윤정아 작가의 옆이었다. 그녀가 있는 테이블에는 그녀뿐만 아니라 성진수 감독을 비롯해 드라마의 중진들이 모여 있었다.

도현은 자리에 앉기 전에 물었다.

“제가 여기 앉아도 돼요?”

“그럼 도현 씨가 앉지, 누가 앉아요!”

성진수 감독의 말이었다.

편애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말에 도현이 조금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고기 한 점이 주어졌다.

“얼른 먹어 봐요. 이거 윤정아 작가님이 구워주신 거예요.”

“제가 고기는 또 잘 굽거든요.”

윤정아가 거들자 도현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잘 익은 삼겹살이 입 안 가득 씹혔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잘 구워졌다.

“맛있어요.”

약간 긴장한 눈으로 도현을 쳐다보던 윤정아가 도현의 평가에 표정을 폈다. 그녀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몇 점을 더 집어다 도현의 앞접시에 덜어주었다.

“많이 먹어요. 더 구워줄 수 있으니까!”

도현을 바라보는 윤정아의 눈에서는 꿀이 떨어질 지경이었는데,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왕의 길>의 화제성을 끌어모은 일등 공신은 누가 뭐래도 도현이었으니까.

‘제작발표회랑 메이킹 필름 엄청 화제였지!’

제작발표회서 보인 국궁 실력에 사람들은 놀라움과 경탄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뿌듯해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도현이 한국 전통 활을 저리 잘 다룬다는 데서 오는 일종의 국뽕이었다.

그리고 그건 도현이 한국의 문화를 아끼고 존중하는 모습으로 받아들여져, 배우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다.

그때 타이밍 좋게 등장한 게 도현의 액션 연습이 담긴 영상이었다. 영상 속에서 도현은 누가 봐도 ‘유려하다’고 칭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감질날 정도로 짧은 분량이었지만, 일전의 감독 인터뷰, ‘도현이 모든 액션 연기를 직접 소화했다’라는 발언과 맞물려 시청자들의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도현이한테는 하지 못할 이야기지만… 학폭 가해자로 의심을 받다가 더 좋은 이미지로 탈피한 것도 결과적으로는 이득이었지.’

노이즈 마케팅이 제대로 됐으니.

상황이 이렇게 되니 <왕의 길> 제작진이라면 도현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멋진 대본을 써내도 화제성이 부족하면 뜨기 어려운 게 드라마니까. 제 대본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져주었는데 어찌 예뻐 보이지 않을까.

그녀는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도현에게 줄 고기 한 덩이를 더 집어 불판 위에 올렸다.

도현이 고기 한 점을 더 집을 때였다.

“도현 씨,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성진수 감독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도현은 젓가락을 다시 내려놓고 고개를 저었다.

“불러주셔서 감사하죠.”

성진수 감독을 비롯해 촬영팀들은 첫 방영이 제대로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왔다. 혹시라도 일이 생기면 방송국에 가기도 용이하니까. 그리고 오늘은 <왕의 길> 첫 방영 날이었다.

도현은 그 회식에 초대되었다.

정확히는, 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옆에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다는 조금 이상한 이유였다.

“도현 씨가 내 행운 토템이에요.”

그 말에 도현은 애매하게 웃었다.

감독님 머릿속에서 나는 대체 어떤 존재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곧 지워버렸다. 딱히 상상해서 좋을 게 없을 거 같아서였다.

“자자, 거기 더 술 가져와요. 흐름 끊기면 안 되지!”

<왕의 길> 팀에서 빌린 고깃집은 시끌벅적했다. 몇 달간 고생한 사람들은 오늘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는지,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은 채 이 자리를 즐기고 있었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웃음소리, 그리고 고기 익는 소리가 배경음처럼 깔렸다. 도현은 그 정신없는 분위기 속에서 제게 말을 거는 이들에게 간간이 대답해주며 자리를 지켰다.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달린 텔레비전은 아까부터 광고를 송출하고 있었다. 도현은 시선을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9시 55분.

5분 뒤면 첫 방영이었다.

시끄러웠던 가게 내부는 오프닝이 떠오르자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각자 제 몫의 술잔을 홀짝이면서 화면에 집중했다.

그 모습에 도현은 깨달았다. 이들의 시끌벅적하던 모습이 단순히 술에 취한 게 아니라, 긴장을 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둥-.

북소리와 함께 화면에 검은 먹물이 부어졌다. 그 위로 예고편에서 보았던 고풍스러운 필체의 제목이 떠올랐다.

첫 방영이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