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8화. 소슬하니 부는 바람에 (19)
덕만의 돌발행동에 천명이 놀라서 따라 나갔다. 그러나 결국 덕만을 놓쳐버린 천명은 궁녀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고, 이어서 그의 숙부인 용춘이 그녀를 위로하는 장면이 나왔다.
“어.”
용춘이 등장하자 윤지원이 알은체를 했다.
“쟤 걔 맞지. 학폭 피해자.”
학교 폭력 피해자.
혹은 이도현 인성 논란의 관계자.
현재 사람들이 인식하는 정희운이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묘한 동정과 호기심을 품은 윤지원이 화면을 보았다.
화면 속의 용춘이 궁녀가 있는 쪽을 서늘히 쳐다보다가, 천명을 보고선 눈매를 누그러트린다.
“…연기 잘하네?”
조금 의외라는 말투.
윤지원의 중얼거림을 들은 신휘민은 쿠션에 턱을 괴고는 생각했다.
정희운은 워낙 피해자라는 느낌이 강했다. 사람들은 그 가엾은 사정에 동정을 품고 일부는 호의도 가졌지만, 그뿐이었다.
‘사람’ 정희운은 동정하고, ‘배우’ 정희운에게는 무관심하다.
지금 한철 해 먹고 말 게 아니라면 좋은 신호는 아니다. …뭐, 그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만. 관심도 없고. 신휘민의 눈동자가 무심한 빛을 띄웠다.
돌계단에 걸터앉은 천명과 용춘을 비추던 화면이 바뀌었다. 화면에 비춘 건 궁을 몰래 빠져나가는 덕만이었다.
궁인들의 눈을 피해 개구멍으로 빠져나온 덕만은 정처 없이 걸었다. 제 답답한 속내를 어떻게든 해소하려는 발걸음은 거칠기 그지없었다.
화면을 보던 리더가 장난스레 물었다.
“휘민아, 오늘은 네 선배 나와?”
“…….”
<왕의 길> 촬영지에 보낸 커피차를 두고 놀리는 말이었다. 신휘민의 눈빛이 조금 죽었다. 이 형은 평소에는 믿음직스러운데, 가끔 동생들을 놀리고 싶어서 안달 날 때가 있어서 문제였다.
“…네, 나온대요.”
“오, 그래? 집중해야겠다. 우리 휘민이의 선배님이시니까.”
“푸흡.”
윤지원이 비웃음을 터트렸다.
신휘민은 빙글빙글 웃는 리더의 낯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놀리고 싶으면 놀려라. 다만 바닥에서 보란 듯이 킥킥대는 놈은 다른 얘기였다.
“악! 왜 차고 지랄이야!”
신휘민의 발에 얻어맞은 윤지원이 버럭 성을 냈다. 그가 그러든 말든 싹 무시해버린 신휘민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씩씩거리는 숨소리와 달래는 리더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덕만의 평온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책 없이 돌아다니던 덕만은 어느 순간 제가 미행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낯빛을 굳힌 덕만의 위로 속마음이 내레이션처럼 울렸다.
- 내가 눈치챘다는 걸 아직 모른다.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면 공격하기 어려울 거야. …하지만.
덕만의 눈에 백성들이 들어왔다.
덕만은 주저했다. 그러나 그 주저함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 그녀를 노리던 무리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포위가 좁혀졌다.
입술을 질끈 깨문 덕만은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든, 사람이 적은 곳으로. 휘말리는 이들이 없도록!
“잡아라!”
그 뒤를 검은 무리가 따랐다.
히히힝! 난데없이 튀어나온 덕만에 놀란 말이 우는 소리를 내었다. 덕만은 작은 몸체를 숙여 말발굽을 피한 후 힘차게 달려 나갔다.
피해 다니는 건 익숙하다. 궁의 제일 골칫거리가 바로 덕만, 그녀였으니. 술래잡기 또한 덕만의 특기였다.
가판대가 보이면 뛰어넘고, 사람이 있으면 방향을 틀었다. 소녀가 그리 지나간 자리엔 얼마 지나지 않아 흉흉한 기색의 복면인들이 따라붙었다.
그 긴박한 추격전에 리더가 막 생각난 사실을 말했다.
“이거 예고편에 나온 장면 아닌가?”
확실히 예고편에 이런 장면이 있었다.
그렇다는 소리는….
바짝 들이밀어진 칼날에 덕만이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이 나라의 공주였다. 백성을 보살피고 다스려야 할. 어떤 상황에서든 약해 보일 순 없었다.
“이러고도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마비되어 가는 턱에 힘을 주어 씹듯이 내뱉었다. 덕만이 부릴 수 있는 유일한 허세였다. 그것을 아는 건지, 복면인은 동요하지 않았다.
“글쎄요. 공주님께서 걱정하실 바는 아니라고 봅니다.”
덕만의 눈동자에 좌절이 차오른 때였다. 그녀가 전의를 잃었음을 확인한 남자가 덕만을 기절시키려다 말고 멈칫했다.
터벅, 터벅.
무척이나 위화감이 느껴지는 소리. 그건 흙이 발에 짓밟히는 소리였다. …발소리라고? 이상을 깨달은 남자의 등에 소름이 돋아났다.
“웬 놈이냐!”
부하들이 칼을 꺼내 들었다. 그들은 경계하는 기색이었지만, 그 누구도 남자만큼 긴장하진 않았다.
어째서일까.
그는 이 순간, 무언가 굉장히 잘못되었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화면이 바뀌었다.
아래로 내려 묶은 머리카락이 길게 흩날렸다. 그럴 때마다 머리를 묶은 천 자락이 그 위를 산들거렸다. 소년이 걸을 때마다 화살통이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드라마를 보던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소리를 죽였다. 거실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화살통에서 나는 작은 소음뿐이었다.
긴장하고 있던 복면인이 칼을 더 높게 들어 올리며, 낮게 경고했다.
“더 이상 접근하지 마라.”
화면이 천천히 움직였다.
소년의 등을 비추던 방향에서, 옆으로, 그리고 점점 앞쪽으로 각도가 바뀌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유려한 입매였다. 그 옆에 자리한 붉은 상처가 시선을 끌었다. 카메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이윽고 심드렁한 검은 눈이 화면에 잡히고.
“으음, 그건 어렵겠는데.”
가볍고, 건성인 목소리였다.
예고편의 바로 그 장면이기도 했다.
소년은 무심한 눈으로 눈앞의 광경을 쭉 훑었다. 잠깐 덕만에게 그 시선이 닿았을 땐, 시청자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도와주려나?’
하지만 소년의 시선은 금방 소녀에게서 떨어졌다. 일말의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소년의 관심을 받은 건, 소녀가 아니라 웬 아저씨였다.
“거기 아저씨, 강해?”
검은 눈에 떠오른 이채에 모두가 당황했다.
덕만도, 복면인도, 그리고 그들을 보고 있던 시청자들도.
아니… 관심이 거기로 가면 안 되는데?
“뭐, 그냥 내가 확인할게.”
복면인들이 그 말뜻을 이해하기도 전이었다. 한 복면인이 비명조차 삼킨 채 허물어졌다. 그 기척에 옆을 돌아본 복면인 한 명이 헛숨을 삼켰다.
쓰러진 이의 가슴 정중앙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제 동료의 죽음에 동요하고 있는 이의 귀로 사신의 목소리가 서늘히 꽂혔다.
“뭐 해.”
순식간에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소년이 무심하게 화살을 메겼다. 소년의 고갯짓을 따라 천 자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안 덤벼?”
상황을 파악한 복면인이 입술을 아득 씹었다.
“…쳐라!”
보통의 이였다면 기겁했을 상황이건만, 소년은 깜짝 선물이라도 받은 아이처럼 눈매를 둥글게 휘었다. 그러나 그게 정말 아이처럼 순수해 보였단 소리는 아니었다.
맹수처럼 쭉 찢어진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드러났다.
맹수.
“그래, 그래야지!”
그래, 소년은 사냥에 신이 난 맹수 같았다.
이어진 전투 장면에 시청자들은 넋을 놓았다. 그건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라기보단, 사람과 짐승이 싸우는 것 같았다.
그만큼 소년의 손속은 야만적이었으며 잔인했다.
“물러서지 마라! 놈은 한 명이야!”
활시위에 목이 졸리고 턱이 비틀려 죽었다. 보고 있는 시청자들도 어깨를 흠칫할 정도인데, 직접 마주하고 있는 이들은 어떠할까.
복면인들의 기세가 한층 죽었다.
어찌 보면 소년의 기에 눌렸다는 게 맞았다.
그리고 짐승 같은 아이는 그것을 금방 눈치챘다.
“쓸데없이 겁들이 많네.”
비웃음이 올라온다.
야생에서 짐승을 만나면 짐승이 배고픈 상태가 아니길 바라야 했다. 만약 그 짐승이 굶주린 상태라면 선택지는 두 개였다.
사냥하거나, 사냥당하거나.
챙-! 활대에 막힌 검이 하늘을 날았다.
화면이 허공에서 회전하는 검을 비추었다. 그것이 아래로 추락했을 때, 흰 손이 우악스레 손잡이를 잡아채었다. 한때 복면인의 손에 들렸던 검이 그의 배를 가르고 들어오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적막했다.
들리는 소리라곤 복부가 꿰뚫린 복면인이 내뱉는 신음밖에 없었다. 소년은 전의를 잃어버린 이에게 다가가 발을 들어 올렸다.
푸욱-.
신발 밑창에 눌린 검이 더욱 깊게 박혔다.
신음하던 복면인은 더는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 차가운 적막이 옮은 듯 온탑 숙소의 거실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그, 휘민아.”
리더의 조용한 부름이 정적을 깼다.
“네, 말해요.”
“내가 알기로 모든 액션 연기를 직접 했다던데…. 하하, 내가 기사를 잘못 봤나?”
“제대로 봤을 거예요. 저도 봤거든요.”
“…그게 진짜라고?”
쟨 대체 뭐야? 조금쯤은 황망함을 담고 있는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그러자 넋을 빼놓고 있던 윤지원이 정신을 차리고선 입술을 삐죽댔다.
“형은 왜 또 그런 거에 놀라. 뻔하지, 뭐! 과장한 거겠지.”
“그런가?”
리더가 답을 구하는 눈으로 신휘민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봤자 믿을 사람만 믿는 걸 아니까.
그리고….
‘방영 전에 메이킹 필름을 그렇게 푼 걸 보면, 앞으로도 나올 것 같은데.’
게다가 제작발표회에서도 국궁 시범을 보이게 하지 않았나. SBC 측은 이 건을 그냥 흘려보낼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니 지금 귀찮게 윤지원과 설전하는 건 사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진짜 뭐 하는 애지.’
연기 잘하는 건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이 존재는 하는지는 차치하고, 신휘민은 직접 그 연기를 경험해본 사람이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감정 연기와 액션 연기는 결이 달랐다.
여기서 더 놀랄 일은 없을 것 같다 싶으면 더 놀라운 게 튀어나온다. 도현은 가끔 보면 정말 연기하기 위해서 누군가 빚어낸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화면 속에서 전투는 막바지로 흘렀다. 소년은 복면인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회유하려던 시도는 악수가 되어 복면인의 숨을 빼앗아 갔다.
기어이 골목길에 서 있는 건 단 한 명이 되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여덟 구의 시체, 그리고 그 풍경을 만들어낸 소년. 잔혹하지만, 어딘가 사람을 매혹하는 위험한 매력이 있었다.
화려한 비녀와 비단에 휩싸여 곱게 치장한 기녀도 아닐진대, 소년은 피와 시체에 둘러싸여 지독히도 화려해 보였다.
그 장면이 그 무엇보다 시청자들의 뇌리에 강렬히 박혔다. 마치 붉은 비단에 감싸여 이제 내가 어여뻐 보이냐고 묻던 미실처럼. 피 냄새에 휩싸인 소년이 그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신휘민의 표정에 애석함이 차올랐다. 그 애석함이 향하는 대상은 도현이 아니라, 도현의 연기를 이어받을 성인 배우였다.
모르긴 몰라도, 이걸 보면 마음고생 꽤 하겠다 싶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