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9화. 소슬하니 부는 바람에 (20)
강렬했던 등장과 다르게, 이후에 이어진 건 로코에 가까웠다. 덕만과 비담의 우당탕탕 동거기를 보며 세 사람은 피식피식 웃음을 지었다.
“애들 진짜 귀엽네.”
리더의 목소리에는 어른이 아이를 귀여워하는 투가 듬뿍 묻어났다. 윤지원이 맞장구를 치는 데에 반해 신휘민은 침묵했다.
애다운 맛이라 하면 차라리….
신휘민의 시선이 잠깐 윤지원의 옆얼굴에 머물렀다. 그런 쪽 감각만 발달한 윤지원이 곧장 눈썹을 곤두세웠다. 신휘민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면을 보았다.
때마침 장면이 전환되었다.
낮에는 그렇게 티격태격 시끄러웠는데, 밤이 되자 추운 고요가 내려앉았다. 어린 소년 소녀는 한 방에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겉보기엔 평온했다. 하지만 귀를 기울이자 묘하게 어긋난 숨소리가 들렸다.
한 공간에 있던 소녀는 금방 이상을 알아차렸다. 잠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소녀의 눈에 소년이 비쳤다.
어둠 속에 비친 뺨이 창백했다.
마비 독에 걸려 간호를 받던 덕만이 이제는 악몽에 시달리는 비담을 간호해 주었다. 서툴지만 정성스럽게 천으로 식은땀을 닦아내었다.
비담은 느릿하게 눈을 떴다.
혼곤한 눈동자는 여전히 무의식에 반쯤 걸쳐 있었지만, 농도 짙은 검은 눈은 아득한 꿈결이나 심해보다는 황량한 사막의 메마름과 더 닮아 있었다.
눈앞의 것이 금방이라도 흩어질 신기루라도 되는 양 비담이 손끝으로 덕만의 뺨을 건드렸다.
꽃잎에 내려앉는 나비처럼 아주 느릿하고 작은 힘에 불과했다. 그러나 덕만은 그것을 거부하지 못했다.
“…어머니.”
처량히 속삭이는 저 목소리 탓일 거라고, 그리 핑계를 대면서.
얼굴을 가렸던 면포 자락이 그들 사이에 떨어졌다. 맨얼굴로 마주 보게 된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어느 한쪽 먼저 시선을 물리는 법이 없었다.
피식피식 웃던 두 사람은 어느새 숨소리를 내는 것조차 잊고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린애들이라 귀엽다고 할 땐 언제고, 완전히 몰입한 기색이었다.
마음 편히 몰입하는 그들이 조금은 부러울지도 모르겠다. 신휘민은 도저히 상황에 집중할 수가 없었으니까.
- …보답하겠다고 했지.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아래로 가라앉았다. 목소리에도, 그 속에 담긴 감정에도 무게가 있다면 분명 아주 낮은 곳까지 추락했을 것이다.
도현의 무서운 점은 그 홀로 추락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보는 이들의 심장까지 아득히 내려앉게 했다. 그건 강제에 가까웠다.
- 그렇다면 데려다줘. 궁 안으로.
신휘민이 화면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걸 본 사람으로 하여금 따라잡고 싶게 만든다는 게. 탐이 안 날 수 없을 만큼 사람의 속을 자극하는 게.
그게 저 애의 가장 무서운 부분이었다.
* * *
<왕의 길> 2화는 두 시점으로 전개되었다.
덕만의 시점과 그런 덕만을 찾아다니는 이들의 시점으로. 덕만의 시점이 나올 땐 비담과 풋풋한 로코 분위기를 풍겼다가, 궁궐 사람들 시점이 나올 땐 분위기가 확 어두워졌다.
덕만을 특히 걱정하는 이들 중 한 명은 용춘이었다. 은근히 덕만에게 호감을 품고 있던 용춘은 직접 화랑을 움직이며 덕만을 찾아다녔다.
그런 풋풋함과 긴박함이 어우러져, 2화는 내내 화제가 되었다.
[<왕의 길> 2화, 시청률 25%!]
[2화도 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배우 이도현, 등장부터 ‘압도적’]
- 이도현 등장 씬 찢었다…
- 왜 이도현 이도현 하는지 증명해 버렸네
- 이도현 궁에 데려갈 팟 모집함 (1/999999999)
└ 저요!!! (2/999999999)
└ 다 꺼져 가마꾼은 나야 (3/999999999)
└ 그럼 난 가마 탈 때 발 받침대!!!! (4/999999999)
└ 그럼 난 발닦개!!!! (5/999999999)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왜… 왜 날 꼬셔? 책임져 주지도 않을 거면서!!! 열 살이나 어리게 태어나 놓고선!!!
└ 할매… 손자한테 질척대지 말고 가서 쉬세요…
└ 홀홀,, 요즘 젊은이들,, 너무하는구만,,,, 할매도 순정이 있다,, 이 말이여,,,
- 누가 도현이 궁까지 편하게 가게 카펫 좀 깔고 꽃 좀 뿌려놔 봐!! 우리 애가 가고 싶다잖아!!!
└ 데려간다고! 데려갈게! 데려가겠다고오옥!!!!
└ 여기 다들 미쳤냨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화제성을 증명하듯 인기 검색어는 <왕의 길>이 점령했다.
이도현 (up!)
이도현 비담 (up!)
이도현 액션 씬 (up!)
덕만 (up!)
이도현 정희운 (up!)
[이 액션이 직접 한 거라고?]
(활시위로 목 조르는 짤)
(칼 허공에 던졌다 받는 짤)
앞으로 이도현은 신이다. 반박 시 네 말이 틀림.
- ㅋㅋㅋㅋㅋㅋㅋㅋ아 틀린 거냐고
- 안 믿기에는 저 장면 중 몇몇은 이미 비하인드로 풀린 거라서… ㅎㄷㄷ 이도현은 신 맞는 듯
- 신 아니라고!! AI라고!!!
└ 얘 참 꾸준하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그렇다 쳐 줘 애 울겠다
[이도현 갭차이 미침]
이도현 들어가는 작품마다 분위기 휙휙 바뀌는 거 알고 있을 거임. 근데 이번엔 한 작품 안에서도 느낌이 너무 달라서 따로 모아봤어.
(사납게 웃는 비담)
(배에 칼빵 넣는 비담)
(한심하단 표정 짓는 비담)
여기까진 매운맛 비담임. 대충 마라탕 4단계 정도 될 듯. 참고로 쓰니는 맵찔이라 2단계밖에 못 먹어ㅠ
매운맛 비담=줄여서 맷담이라 하겠음. 맷담은 일단 봐서 알겠지만 멋있음. 심각하게 멋있음. 근데 다가가면 물림ㅠㅠ
(덕만 놀리는 장꾸 비담)
(천사 같이 잠든 비담)
(애원하는 처연 비담)
그리고 이건 말랑뽀쨕순두부 비담임. 궁에서 쫓겨나기 전 모습이 남은 비담이라고 할 수 있지. 이건 순담이라고 부르겟음.
맷담은 눈 깔아야 할 것 같은데 순담은 내가 지켜줘야 할 것 같음 ㅠㅠㅠㅠㅠ 뭔가 안 보이는 곳에서 혼자 울고 있을 거 같은 느낌? 근데 다가가면 물림 ㅠㅠ
- 결론은 다가가면 물림이잖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담이가… 사납긴 햌ㅋㅋㅋㅋㅋ
- 맷담 순담하니까 담배 같앜ㅋㅋㅋㅋㅋㅋㅋ
└ 난 왜 자꾸 멧돼지가 생각나지…? 도현아 이모가 미안 ㅠㅠ
└ 어… 닮은 것 같기도…?
- 근데 진짜 다르긴 하다
- 이도현 연기 천재 어디 안 가네…
- 한결같이 무는 우리 담이… 씩씩하게 커서 기특하다 ㅠㅠㅠ
└ 아 우리 애가 물 수도 있지!
└ 맞아 담이는 잘못 없어 물린 사람이 잘못이지!
└ 왜 편드는 척 사람 취급도 안 해주냐곸ㅋㅋㅋㅋㅋㅋㅋㅋ
그중에서도 관심을 많이 받은 게시글이 있었다.
[그제서야 난 느낀 거야~]
(복면인을 흥미롭게 보는 비담과 그런 비담을 보는 덕만 짤)
모든 것이 잘못돼 있는걸~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ㅆㅍ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난 예감을 했었지~
└ 넌 나보다 내 친구에게 관심이 더 있었다는 걸~~~
└ ㅋㅋㅋㅋㅋㅋㅋㅋㅋ앜ㅋㅋㅋㅋㅋㅋㅋ
- 실은 그랬던 거임
└ 뭐가 그래 이 미친놈앜ㅋㅋㅋㅋㅋㅋ
사람들이 과거 메가 히트곡을 곁들여 해당 장면을 패러디하며 왕의 길은 더욱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 *
첫 방영으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금요일.
왕의 길 3화가 방송되었다.
“오햅니다, 숙부! 그는 내 은인이에요!”
용춘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화랑이었다. 그는 기어이 덕만의 행적을 찾아냈다. 그게 지금, 집 뒤편 바위에 걸터앉아 짚을 꼬던 비담의 어깨 위로 칼날이 드리운 이유였다.
다른 화랑들이 조금씩 주위를 에워쌌다. 비담은 짚을 내던지고 덕만에게 뺏어 활대에 둘렀던 천 자락을 풀었다.
덕만이 얼굴을 가리던 면포였다.
“이자가 공주님의 은인이라고요?”
“예, 수상한 무리에게 쫓기던 저를 구해주고, 나을 때까지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러니 어서 그 칼을 치우세요! 은인께 이 무슨 무례입니까!”
성을 내는 덕만의 얼굴에서 용춘은 무언가를 읽었다. 그는 잠시 망설였으나, 곧 칼을 내리며 정중히 사과했다.
“…미안하군. 은인께 무례를 저질렀소.”
비담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한때 덕만의 얼굴을 가렸던 면포가 비담의 눈 아래를 감추었다.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을 훗날, 서로를 적대하게 될 두 사람이 마주쳤다.
용춘은 얼굴조차 모르는 이를 함부로 궁에 들일 수 없다고 말했으나, 결국 덕만의 고집에 지고 말았다. 그렇게 기묘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용춘은 묘한 거리낌을 느끼면서도 공주의 은인을 대접하려고 했고, 비담은 그럴 때마다 차게 비소하거나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덕만은 은근히 비담의 편을 들었다.
비담과 용춘,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빠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건 궁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용춘은 하는 일 없이 덕만의 궁에서 먹고 자고 하는 비담을 못마땅해했다. 그건 용춘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젊은 화랑들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비담이 물러서는 법을 모르는 짐승이라는 점에 있었다. 비담은 고작 며칠 궁에 머무르면서 온갖 사고를 쳐댔다.
비담이 이번에 또 화랑 다섯 명을 죽사발 냈단 소리에 놀라 달려온 덕만은 금방 범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태평하게 기와 위에 올라 낮잠을 잘 사람은 그 말고는 없으니까.
“팔자 좋구나.”
“응, 햇빛이 딱 좋아. 너도 여기 누울래?”
“…됐다.”
덕만이 한숨을 내쉬었다.
누운 채로 고개를 흘긋 들던 비담은 인심 썼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기와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작은 흙먼지가 일었다.
덕만은 기다렸다는 듯이 핀잔을 주었다.
“이젠 네가 궁에 오고 싶었던 게, 궁에서 사고 치고 싶어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어찌 하루도 얌전한 날이 없어.”
가벼운 타박이었다. 평소의 비담이라면 흘려들을. 하지만 비담은 궁에 온 순간부터 신경이 곤두선 채였다.
비담의 눈빛이 굳자, 그 눈빛을 오해한 덕만이 황급히 변명했다.
“탓한 건 아니야. 그대를 데려온 건 나니, 끝까지 책임질 거야. 그대는 그저 편한 만큼 이곳에 머물러. 나의 은인은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덕만은 혹시라도 비담이 마음 상해 떠날까 전전긍긍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비담의 고민은 그녀의 생각과 다른 것이었다.
여기까지 오긴 했으나, 미실은 아무나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선 반드시 덕만의 협조가 필요했다. 하지만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는 제 정체를 밝혀야 했다.
그냥 밝히면 될 일일 텐데….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를 걱정스레 보는 소녀의 앞에서, 제가 한번 버려졌던 이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제 배로 나은 어미가 버린 쓰레기란 걸,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치기라 해도 좋았다.
“비담? 비담! 어디 가!”
“낮잠 자러.”
결국 비담은 입을 닫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궁주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는 입을 열 필요가 없었다.
며칠간 비담의 수발을 들었던, 덕만의 사람이 자연스럽게 궁주를 입에 담았다. 그것이 제 진짜 주인이라는 듯이 한없이 공손한 투였다.
그제야 비담은 깨달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는 제 어미는, 제가 버린 자식이 기어코 궁에 기어들어 왔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두 모자가 만나며.
- 다음 이 시간에.
엔딩 OST가 흘러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