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41화 (442/582)

제441화. 소슬하니 부는 바람에 (22)

절망은 불시에 내리치는 벼락 같은 게 아니다. 그것은 곰팡이에 가까웠다. 조금씩 썩어 들어가, 이내 형체조차 잃어버리고 마는. 알아차렸을 땐 온통 갉아먹힌 후라 돌이킬 수 없는.

매끄러운 겉껍질과 달리 그 속은 이미 썩고 흐무러진 후라서일까. 비담은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알고 싶다?”

“키우던 개도 이유 없이 버리지는 않는 법인데. 저 또한 버려진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이유라도 알고자 왔습니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다.

처음 궁밖에 내던져졌을 땐 착오가 있을 거라, 오해가 생겼을 거라 믿었다. 그다음에는 잠깐 화가 나셨지만, 곧 저를 찾으리라고 믿었다. 참으로 순진하게도.

믿음은 시간에 풍화되어 바스러졌다. 그것이 남긴 흔적은 의문뿐이었다.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

곱씹고 곱씹어 형체 없이 입 안에 나뒹굴던 그것이 문장이 되어 흘러나왔다. 비참한 분노, 조악한 증오, 맹목적인 원망. 그 무엇도 담기지 않은 공허한 의문이었다.

격한 신파도, 눈물 바람도 없었다. 안개 냄새를 품은, 희뿌연 잿더미 같은 물음이 전부였다. 그 공허한 목소리와 시선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건드렸다.

어쩌면… 그곳에 있던 다른 한 사람까지도.

비담이 묻는 순간, 미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냉담함으로 점철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던 입매가 조금 굳었다.

그것도 잠깐.

곧이어 미실의 입술이 스산하게 이지러졌다. 붉은 입술에 떠오른 건 선명한 조소였다.

그녀의 싸늘한 눈동자에 덜 자란 소년이 비쳤다. 한때 그녀의 자식이었던 자였다.

그래서일까.

멍청한 게 꼭 저를 보는 듯했다.

“조용히,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았다면 차라리 행복했을 것을.”

“제 행복을 걱정해 주기엔 어머니와 저. 너무 멀리 오지 않았습니까.”

기어이 나락에 스스로 발을 들이는 것까지도.

“…그래. 그리 궁금하다면 알려주어야겠지. 개구멍으로 궁에 들어온 정성을 봐서라도.”

비담이 말이 맞았다. 그들은 너무 멀리 왔다. 아니, 미실. 그녀가 너무 멀리 가버렸다.

그녀는 너무 오래전부터 나락 위를 걷고 있었다. 더는 푸른 하늘도, 맑은 웃음도, 해사하던 목소리도 기억나질 않았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저와 똑 닮은 표정을 한 소년뿐이었다.

“애초부터 너의 쓸모는 정해져 있었다. 나를, 이 미실을 왕후 자리에 올리는 것. 그런데 전부 쓸모없어졌지. 왜인 줄 아느냐?”

붉은 혀에서 나오는 말이 비수가 되어 날아들었다. 이미 성한 곳 없는 몸을 파고들고, 혈관을 베어냈다. 이윽고 모든 피가 빠져나갈 때까지.

한기가 목덜미를 긁고 지나갔다. 비담은 찬기에 몸을 웅크리는 사람처럼 어깨를 말았다. 검은 눈동자가 엉망으로 흔들렸다.

미실은 희게 질린 비담을 향해 요요히 말했다.

“네가 왕의 핏줄이 아니라서.”

거짓말일 거다.

“그것을 폐왕이 알아챘단다. 그것을 빌미로 나를 휘두르려고 했지. 약조했던 왕후의 자리를 다른 여인에게 넘기고… 이 나를 버리려 했어.”

거짓이라 믿고 싶었다.

주춤,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러나 차가운 진실은 자비 없이 파고들었다.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를 매단 미실이 흥얼거리듯이 속삭였다.

“그래서 버려지기 전에 버렸단다. 너도, 폐왕도.”

아, 토막 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모든 기대를 버렸다 생각했다. 더는 헛된 희망을 품지 않겠다 수없이 다짐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죽였다. 죽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멍청하게 미련을 남긴 모양이었다. 적어도 어떠한 사정이 있으리라고. 피치 못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그게 아니었다.

그냥, 전부. 처음부터 내 존재가 잘못된 거였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머리가 멍해져 왔다. 다 비웠다고 생각했는데 주인 몰래 차올랐던 기대가 핏물이 되어 목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것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제멋대로 입이 움직였다.

다 태웠다고 여겼는데.

“육 년입니다.”

아직 탈 게 더 남아 있었던 걸까.

검은 눈동자에서 불씨가 화르륵 타올랐다. 마치 스스로 모든 걸 태우고, 불살라 재로 화하려는 것처럼.

‘이거…!’

화면을 보던 잼잼이가 마른침을 삼켰다.

대사가 나오자마자 알아챘다. 그 영상만 열 번은 돌려봤으니까, 알아보지 못하기도 어려웠다.

잼잼이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던 바로 그 장면이다. 아무런 세트장도, 분장도, 심지어 제대로 된 연기도 아닌, 고작 대본 리딩 영상 주제에.

몇 번이고 진짜 드라마에선 어떨지 상상했던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깊은 독과 분노, 처절함과 비참함을 품고선.

“육 년간!”

창백한 목덜미에 핏발이 섰다.

“육 년간, 수도 없이 고민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무슨 죄를 저질러 어머니께서 나를 버렸을까. 왜 그리 매정하게 내치셨을까. 잘못했다고 빌면 받아들여 주실까!”

참혹하리만치 서글프게.

소년이 토해내는 감정에 사람들은 압도되었다. 고작 화면으로 보는데도, 그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잔뜩 얼어 있으면서도 결코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제가 사생아였다고요.”

내 모든 게 처음부터, 당신에게 무의미했다고.

뱉지 못한 진심은 삼키고, 분노로 치장한 감정을 쏟아냈다. 그간 억눌렸던 것을 모두 풀어내듯이 비담은 완전히 평정을 잃은 채였다.

비담이 온갖 감정이 뒤엉킨 분노에 눈이 멀수록, 미실은 차갑게 식어갔다. 그녀는 다 식은 찻잔을 들어 올려 목을 축였다. 씁쓸한 찻물이 혀에 감돌았다.

아아, 미실은 나오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말하지 않았나. 나와 참 닮았다고. 그녀는 스스로 나락까지 기어 들어와 목에 밧줄을 맨 아들을 향해 다정히 말했다.

“말하지 않았니.”

그건 분명한 진심이자.

“너는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어.”

역겨운 위선이며, 동정이었다.

분노에 잠식된 비담은 그 미묘함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저를 향한 조롱으로 받아들였고, 또다시 난도질당했다.

“오지 말아야 했다고요? 그게 전부입니까? 당신은 키운 정도 없으십니까?”

달칵, 찻잔을 내렸을 땐 미실의 얼굴에 올라온 감정은 깨끗이 지워진 후였다. 군림하고 욕망하는 자 특유의 무정한 시선이 아들에게로 향했다.

“내게 쓸모없는 것은 필요 없다.”

비담이 짧게 비소했다.

“당신께선 좋으시겠습니다. 쓸모로 값어치를 매겨 제 자식까지 버리니까. 모든 것을 값어치로 판단하면 되니 참으로 편한 인생이 아닙니까?”

신랄한 비꼼에 미실이 웃었다.

“그래, 편하단다. 쓸모 있으면 거두어 옆에 두면 되고, 없으면 내치면 되니까. 이보다 편할 수가 없지.”

절대 약한 모습을 내보이지 않는 두 모자에 속이 타는 건 시청자들이었다. 두 사람은 분명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상처를 주며, 상처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꺾일지언정 굽히지는 않는 성정은 물러서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말이 서로를 베었다. 차이라 함은, 한쪽은 이미 붉디붉어 피투성이로 난자당한들 티가 나지 않는다는 것. 그게 전부였다.

함께할수록 추락하는 사이.

바로 저 관계를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닐까.

시청자 게시판에 끊임없이 올라오던 댓글들도 비담이 분노를 토해낸 순간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띄엄띄엄 올라오는 몇 개의 글이 전부였다.

영원토록 끝날 것 같지 않던 추락의 종지부를 찍은 건, 미실이었다.

“기특하게도 이 어미를 잘 이해하고 있구나. 그럼 이것도 맞혀 보거라. 그래서….”

그다음 말이 나오는 순간 시청자들은 심장이 추락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미실의 말 때문인지, 아니면 내내 회피하던 것을 맞닥뜨린 비담의 표정 탓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 이 어미가 너를 어찌하여 불렀을 것 같더냐?

그 물음이 기어코 비담을 나락에 빠트렸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 * *

- 미친미친미친미친미친

- 미쳤다 진짜 미쳤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 신주하 이도현 귀신 씐 거 아니야? 나 소름 끼쳐;;;

잠깐 멈추었던 댓글 창은 미실의 물음과 함께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휙휙 올라가는 댓글은 제대로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 내가 이해한 거 맞아? 지금 미실이 비담을 궁에 부르고, 대답해 준 것도 결국 쓸모를 찾아서인 거?

- 맞아 ㅠㅠㅠㅠㅠ

- 쓸모 있으면 거두어 옆에 두면 되고, 없으면 내치면 되니까;;;;

- 하 누가 이렇게 말 잘 지키래… 진짜 돌았네

- 비담 어떻게 해 ㄷㄷ

- 내가 다 마상…

- 미실 진짜 개 나쁜데 왜 이렇게 매력적이냐고 ㅠㅠ

“…제가, 당신에게 이용당해 주리라 생각합니까?”

한참을 침묵하던 비담이 간신히 목 위로 밀어낸 말이었다.

그것을 미실은 간단히 부수었다.

“아니지. 당해주는 게 아니라, 당할 수밖에 없는 거겠지.”

죽을 것 같다.

비담은 죽을 거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죽어 있는지도 몰랐다. 피가 모두 빠져나간 시체의 몸뚱어리를 억지로 움직여, 산 자를 흉내 내며 입을 나불대는 것이다.

분노조차 휘발된 얼굴에 남은 건 공허한 부스러기뿐이었다. 비담은 그 부스러기를 한데 모아 미소 엇비슷한 것을 만들어냈다. 비담은 차갑게 올라간 입술로 말했다.

“참으로 비위도 좋으십니다. 버렸던 것을 다시 주워서 쓰다니요.”

일순간 미실의 얼굴이 경직됐다.

무엇이 그녀의 비위를 건드렸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비담은 이제 그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문득,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텅 비었으니 이제야말로 더 실망할 것도, 좌절할 것도, 배반당할 것도 없다. 이제야말로.

“어머니는 정말….”

내리뜬 눈을 들어 올렸다. 바람이 멎은 검은 눈이 고요히 상대를 향했다. 창백한 입술이 저주처럼 움직였다.

“항상 이 소자를 놀라게 하십니다. 쓸모없어졌다는 이유로 멋대로 버리더니, 이제는 쓸모가 생겼으니 멋대로 거두겠다라…. 그것도 기생처럼 여인을 유혹하라고요.”

이제 그녀가 덕만과 저 사이에 오간 감정을 알고 있는 건 그다지 놀라운 사실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태생부터 지금까지 비담은 미실의 손에서 놀아났으니.

“하하….”

마른 웃음이 공기를 갈랐다.

금방 흩어질 듯 흐린 웃음은 점점 진해졌다. 목울대를 울리며 웃던 비담이 재밌어 미치겠다는 듯이 폭소하며 이마를 짚었다.

광소하는 비담은 정말 미쳐 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시청자들의 마음에 불안이 싹 틀 즈음이었다.

불시에 웃음을 멈춘 비담이 마른 손에 얼굴을 비볐다. 그리고 웃느라 벌게진 눈을 둥글게 휘었다.

“…그러면, 그리하면. 저는 조금 쓸모가 생깁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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