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2화. 소슬하니 부는 바람에 (23)
카메라가 비틀거리며 미실의 처소를 나온 비담을 비추었다. 비담은 넋이 나간 채 걸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덕만의 처소에 도착한 후였다.
덕만이 제게 내어준 처소로 들어가려던 때였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왔다.
말없이 사라진 비담을 걱정하며 그를 기다렸던 덕만이었다.
“너, 어딜 갔다가 지금…!”
덕만의 입이 다물렸다.
비담은 제 팔을 붙잡은 고운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덕만이 손을 오므릴 때까지.
“…비담?”
왠지 모를 낯섦에 덕만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다행히 비담은 그 부름에 반응했다. 손에서 시선을 뗀 비담이 덕만을 바라봤다.
어둑한 밤이었다.
허름한 초가집에서 그리했던 것처럼 비담이 덕만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하나하나, 눈에 새겨 영원토록 기억이라도 할 것처럼.
비담은 반대쪽 손을 들어 덕만의 눈가에 가져다 댔다. 그 어떤 기만도 어리지 않은, 순수한 애정과 걱정이 담긴 맑은 눈동자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기묘하게 굴던 비담이 뱉어낸 말은 뜬금없었다.
“변하지 마.”
“뭐…?”
“너는 변하지 마. 이대로 있어.”
나를 향한 신뢰로 가득 찬 채. 애정에 눈이 먼 채, 그렇게….
“내가 변해도, 너는 변하지 마.”
막무가내인 말이었다.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덕만이 미간을 좁히며 제 눈가를 문지르는 비담의 손을 붙잡았다. 그대로 놔두기에는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아까부터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비담에게 그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지금 비담은 너무 이상했다. 보는 이까지도 정신이 어떻게 되어버릴 만큼.
뺨과 귓불에서 느껴지는 홧홧함에 덕만은 생각했다.
일단 자리를 벗어나자.
“어디 아픈 거면 들어가서 이만 쉬는 게 좋겠….”
그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에 닿았다.
쏴아아, 수양버들의 이파리가 차가운 바람에 흔들렸다. 덕만에게는 이 찰나의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어둑한 하늘, 소년의 등 뒤로 흔들리는 버드나무, 그리고 손바닥에 닿은 뜨거운 열기….
“언젠가 날 믿지 못하는 날이 오더라도.”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열기와 다르게 어둡고 싸늘한 눈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배신당해도, 좌절하고 실망하더라도, 넌….
“버리지 마.”
저주처럼, 간청처럼 흩뿌려진 소리는 차가운 공기를 타고 흘렀다. 소리의 파동은 손바닥을 파고들어 혈관에 스며들었다. 천천히, 느리게 피를 덥히고 심장을 뛰게 했다.
카메라가 멀어지며 버드나무 뒤쪽을 비추었다. 파삭,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버드나무를 등지고 서 있던 용춘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세 사람의 운명이 뒤엉킨 밤.
그 미래를 암시하듯 불길한 어둠이 그들의 위로 내려앉았다.
* * *
- 어…
- 와,,, 아니,,,
- 뭐라… 말을 못 하겠네;; 머릿속이 하얘…
도현의 광소 이후로 조용해졌던 시청자 게시판에는 한동안 두서없는 탄식만 이어졌다. 그사이 화면이 돌아가며 드라마 속 시간이 밤에서 낮으로 바뀌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그들의 머릿속은 방금 보았던 충격적인 광경으로 가득 찼다. 폭풍처럼 몰아쳤던 미실과의 대립, 한껏 달구어놓은 공기를 제멋대로 주무르던 비담의 연기. 그리고, 이어진 기묘하고도 고요한 순간….
이대로 있으란 말을 들은 건 덕만인데, 시청자들이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꼭 주술에 걸린 것처럼.
아까부터 숨조차 죽이고 화면에 집중했던 잼잼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한참 심호흡을 한 후 튀어나온 말은.
“손 키스 미쳤냐…?”
경악 같은 탄식이었다.
그날 밤.
‘왕의 길’ 4화는 드라마를 본 사람들도, 보지 못한 사람들도 모두 들썩이게 했다.
[‘왕의 길’ 미실과 비담의 대립…, 팽팽한 긴장 속 신(神)들린 연기!]
[<왕의 길> 4화 레전드 장면의 탄생]
[현재 난리 난 ‘왕의 길’ 4화 화제의 장면!]
우후죽순 쏟아지는 기사들이 그 뜨거운 관심을 짐작케 했다. ‘왕의 길’ 4화는 여러 레전드 장면으로 화제가 되었는데, 하나는 미실과 비담의 재회 장면이었고, 다른 하나는….
[‘버리지 마’ 이도현, 애절한 손바닥 키스… 드라마 ‘왕의 길’]
[‘왕의 길’ 이도현-진윤아, 애달픈 키스… 순간 최고 시청률 기록 ‘금토극 1위’]
[아역 키스 신이 이리도 애틋… “아역 맞아?”]
[배우 이도현, 처음 도전한 깜짝 키스 신 연일 화제]
비하인드 영상에서도 언급조차 없었던 아역 배우의 키스 신이었다.
8살, 베니스 데뷔 때부터 지켜봐 왔던 배우였다. 손바닥 키스지만, 그것만으로 시청자들을 충격 속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보통 아역들이 선보이는 풋풋한 키스 신과 억만 광년 정도 떨어져 있어서 더욱 충격이 컸다.
- 나도 모르게 숨 참고 봤어
- 나 지금까지 아역 키스 신 진지하게 본 적 없는데… 뭐지
- 아니;; 손바닥 키스가 이렇게… 아 표현을 못 하겠다 아무튼 이래도 됨?
- 이거 실화냐… 왜 중학생한테 설레지? 아니, 진짜 설레는데? 누가 나 정신 차리게 머리 좀 때려 봐
- 누가 어린 애한테 키스 신 시켰냐; 아니 잘했다고;;
- 나랑 언니랑 같이 드라마 보다가 육성으로 소리 지름… 하ㅠㅠㅠㅠㅜㅠㅠ 미쳤어 진짜
- 진짜 이도현은 전설이다…
- 아니 나 진짜로 방통위 심의 걸릴까 봐 걱정돼 그래서 미리 움짤로 다 따두긴 했는데 나중에 수정되는 거 아니겠지?
└ 손바닥 키스야 정신 차려
└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껏 타오른 관심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만큼 해당 장면은 시청자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었다. ‘왕의 길’이 명실상부하게 올해 하반기 드라마 왕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신호기도 했다.
그러나.
[‘왕의 길’ 아역 등장은 4화가 마지막… 5화부턴 ‘바통 터치’]
[‘왕의 길’ 연일 화제에 올랐던 아역들, 4화를 마지막으로 마무리!]
[‘왕의 길’을 이어갈 성인 배우들은?]
또 다른 소식이 전해지며 그들을 경악하게 했다.
마찬가지로 그 소식을 접한 잼잼이는 눈을 부릅뜨고 기사를 찾아다녔다. 설마, 그럴 리가. 이렇게 폭탄을 터트려놓고 그런 잔인한 일을 벌일 리가…!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시청자 사로잡았던 아역들의 화려한 퇴장…]
[성숙한 비담-덕만-용춘은 어떨까? 과연 아역들의 인기를 이어갈지 관심 집중!]
“…진짜라고?”
아니, 이게 진짜일 리가 없는데….
아닌데….
잼잼이의 허탈한 음성이 방 안을 울렸다.
* * *
지잉, 지이잉-
어젯밤부터 핸드폰은 불이 났다.
드라마가 끝나고부터 시작된 이 현상은 도현이 자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이어졌고, 눈을 뜬 다음 날에도 여전했다.
‘여우야 때보다 반응이 큰 거 같기도 하고….’
역시 그거 때문이겠지.
키스 신.
도현이 목덜미를 문질렀다. 그건 제게 있어서도 도전이었다. 그런 유의 친밀한 접촉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
4화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는 조금, 사실 조금 많이 놀랐다. 하지만 도현은 생각보다 금방 받아들였다. 그 위치가 뺨이나 입술이 아닌 손바닥이라서였다.
그리고 직접 해본 연기는 상상했던 것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연기할 때는 아무 생각도 안 들었으니까. 물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지만….
지이잉!
핸드폰이 존재감을 과시하듯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차마 그 연락을 확인해보기 두려울 정도로 양이 많아서, 본의 아니게 잠수 타는 중인 도현이 발신인을 확인했다.
[윤정아 작가님]
아, 이건 받아야지.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여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도현아!
“네, 전화 받았….”
- 미쳤어! 미쳤다고!
도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잔뜩 상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번 화 반응 봤어? 봤겠지? 도현아, 우리 미쳤어! 아니, 너 미쳤어!
도현은 시각을 확인했다.
일요일 오전 9시.
전날 밤에 걸고 싶었는데 혹시 민폐일까 꾹꾹 참고 다음 날 아침에 곧장 건 게 티가 나는 시각이었다.
- 방송국 측에서 전해줬는데, 지금 시청자 게시판 먹통이래. 사람들이 너무 몰려서!
“진짜요?”
- 진짜! 진짜… 진짜 네 덕분이야.
윤정아 작가의 목소리가 조금 차분해졌다.
- 고마워, 도현아.
여전히 흥분의 기색이 조금 묻어났지만, 한층 침착해진 목소리였다. 도현은 몇 초간 그 말을 되새겼다.
“다들 열심히 해서 나온 결과죠.”
- 아니야, 네 덕분이야.
도현의 겸손에 윤정아는 곧바로 부정했다.
- 키스 신. 그거 네가 비담의 성격을 바꿔서 탄생한 장면이잖아.
“아.”
확실히.
보통 이런 접촉이 있을 경우, 사전에 배우에게 고지한다. 그게 아역 배우라면 더욱 조심스럽고 말이다.
그러나 도현은 4화 대본이 나온 후에야 고지받았다. 그게 급작스럽게 추가된 장면이기 때문이었다.
- 처음에는 솔직히 곤란했지. 네 애드리브 대로면 뒤에 이어질 내용과 모순이 생기게 될 판이었으니까.
“으음… 죄송해요.”
- 아니, 사과받자고 한 말이 아니야. 그게 싫었다면 기존 대본대로 밀면 됐거든? 설마 내가 네 눈치 보느라 바꿨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네? 아니, 그런 생각은….”
- 하하, 장난이야. 아무튼. 내 결심의 이유는 딱 하나였어. 네 비담이 매력적이었으니까.
그녀는 꽤 오랫동안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민하면서도 도현의 연기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고. 그때 이미 홀려버렸단 걸 깨달았다는 고백이 이어졌다.
기존의 설정에서 비담은 미실의 편에 붙는다. 그녀의 협박에 이기지 못하고 굴복한 것이다. 그러나 도현이 만들어낸 작은 바람은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 폭풍을 만들어냈다.
미실도, 덕만도, 시청자들도 알지 못하겠지만… 그날 밤의 대사와 키스는 비담의 결심이었다. 비록 남들의 눈에는 배반자로 보이더라도… 실제로 연모하던 이를 기만하더라도, 기어이 그이가 제게 실망하더라도.
- 언젠가 날 믿지 못하는 날이 오더라도, 버리지 마.
네가 나를 버리기 전까지는, 나 또한 너를 버리지 않으리라고.
수화기 너머의 차분한 음성이 도현을 상념에서 깨웠다.
- 원래대로 했으면 반응이 좋지 않… 아니, 생각해 보니까 그것도 좋았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이만큼 좋지는 않았을 거야.
“작가님.”
- 그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었어. 정말로, 비담이 너라서 다행이야.
배우가 작가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도현은 떨리는 숨을 뱉었다. 그리고 씩 웃었다.
“저도요. 제가 비담을 연기해서 다행이에요.”
새삼스럽게도, 나는 평생 이걸 벗어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기꺼운 늪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