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3화. 겨우내 웅크린 (1)
[SBC 왕의 길 4화, 평균 시청률 31%!]
[왕의 길, 4화 만에 시청률 30%대 돌파!]
[이도현 빠진 왕의 길, 인기 이어갈까?]
- 진짜 이렇게 끝나는 건 좀…
- 이렇게 인기 좋은데 칼같이 잘라내냐 개비씨야
- 아ㅠ 이도현 말고 누가 비담 역할을 맡음??
└ 일단 국궁 실력부터 불가능
└ ㅋㅋㅋㅋㅋㅋ 생각해 보니까 진짜네
[비담이 손바닥에 키스한 이유]
보통 손바닥 키스가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임.
하나는 간청 ㅇㅇ
간절히 바란다는 뜻으로 손바닥에 입을 맞추기도 함. 비담이 덕만에게 애원? 하는 장면이었으니까 이 의미도 알맞지. 그런데 손바닥 키스는 다른 의미도 있음.
바로 원망, 질투, 불만임.
그래서 옛날에 귀부인들이 외도를 저지른 남편에게 불만의 표시로 손바닥에 입을 맞추기도 했대.
여기서 비담이 진짜 미친넘인 이유가 나옴. 사실 상황상 지금 외도를 하는 건 비담인데 (미실의 편에 붙음) 덕만을 붙잡고 ‘버리지 마’라고 하면서 원망하는 듯이 손바닥에 입을 맞춘 거….
진짜 내로남불 더럽게 안 되는 새낀데 맛도리 ㅇㅈ?
- 헐… 난 그냥 어려서 손바닥으로 대체한 줄
└ 나도 ㅠㅠ 그냥 애들 어리니까 뽀짝하게 손 키스로 가자! 했는데 도현이가 멋대로 15금 만들어버린 줄
└ 아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ㅋㅋㅋㅋㅋㅋㅋ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서 더 웃김
- ㅁㅊ 존나 맛있다 쩝쩝
- 비담 진짜 설정 과다다…
└ 대유죄임; 이러고선 섭남일 거 아니야
└ 이 정도면 섭남병 인정 아니냐고 ㅠㅠㅠㅠㅜㅠㅠㅠㅠㅠ
월요일이 될 때까지도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아니, 오히려 더 거세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도현은 그걸 피부로 체감했다.
“어딨어?”
“저기, 저쪽에!”
“헉, 진짜네…!”
“우와….”
마치, 중학교 입학 첫날로 되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도현이 앞문, 뒷문, 창문 할 것 없이 다닥다닥 붙어 선 아이들을 쳐다보자 환호성이 들렸다.
“비담! 비담이다!”
“도현아! 손 키스해 줘!”
조금이라도 관심을 끌어보려고 외치는 목소리에 서일준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게 학교냐, 팬 미팅 현장이냐….”
도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상황이 진정된 것은, 학생 주임 선생님이 와서 아이들을 해산시켰을 때였다. 미련이 남는지 끝까지 기웃거리던 아이들은 몰래 핸드폰으로 도현의 사진을 찍어 가기도 했다.
“어어, 쟤네 멋대로 사진을…!”
“괜찮아.”
도현이 발끈한 서일준을 만류했다.
동의 없이 사진을 찍는 게 유쾌한 건 아니지만… 저러한 일을 다 막을 수는 없었다. 일부분은 적당히 포기한 채 사는 게 편했다.
“근데 너 진짜로 입 맞춘 거야?”
고개를 돌리니 호기심과 흥미를 가득 담은 여러 쌍의 눈동자가 보였다. 반짝이는 표정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것도, 포기해야겠지. 도현이 체념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가 궁금한데?”
“…!”
나중에 회상하기를, 그건 하이에나 떼들이었다.
* * *
어떻게 점심시간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이고, 둘러싸이고, 둘러싸이고, 둘러싸이다 보니 어느새 4교시가 끝나 있었다.
도현의 걸음이 멎었다.
‘잠깐… 수업 시간에 뭘 들었더라?’
워낙 정신없이 지나간 터라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아무것도 기억 안 날 수가….
- 어, 우리 비담이! 이야, 내가 진짜 토요일에 그거 보고….
- 어머, 도현이 왔니? 도현아, 주말에 드라마 잘 봤어. 내 동생도….
…있구나.
어째 들은 게 없는 것 같더라니, 반에 들어오는 선생님마다 한참을 드라마 가지고 말을 늘어놓아서였다.
이렇게까지 파급력이 클 줄은….
구미호뎐 때와 비교해도 조금 유별났다. 물론 ‘구미호뎐’ 자체가 시청자층이 조금 한정된 드라마였기도 했고, ‘왕의 길’ 방영 전에 여러 일이 있기도 했지만….
아하, 그래서네.
납득을 마친 도현이 식판을 정리하고 막 급식실에서 나가려던 때였다.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도 유독 노란 색채가 시선을 끌었다. 도현은 무의식적으로 그쪽에 시선을 주었다.
일랑일랑, 개나리 같은 영혼이 일렁였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일어난 변화였다. 도현은 자연스레 거기서 시선을 떼고 영혼이 아닌 육체를 보았다.
안색이 확 밝아진 소년이 입을 벙긋거렸다. 도현은 눈매를 좁히며 그 입 모양을 해석했다. 아기 좀?
아, 얘기 좀….
말뜻을 이해한 도현이 문을 향해 턱짓했다. 나와서 얘기하자는 뜻이었다. 정희운의 고개가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먼저 급식실 밖으로 나온 도현은 친구들을 먼저 올려 보냈다. 급식을 먹고 나온 아이들이 도현의 주변을 기웃거렸지만, 도현이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자 조금 눈치를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약간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칼의 소년이 급식실을 나왔다. 그는 두리번거리는 것도 없이 금방 도현을 찾아냈다.
두 사람이 모이자 시선이 두 배가 되었다. 손바닥 키스로 화제를 일으킨 비담과 그런 비담의 연적인 용춘의 만남이라니. 이보다 흥미진진할 수가 없어 아이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나가서 얘기하자.”
그들에게는 안타깝게도, 도현은 이곳에서 수많은 시선을 받으며 대화할 생각이 없었다. 정희운도 마찬가지인지 그러는 게 좋겠다며 동의했다.
두 사람은 본관 건물을 나와 운동장 위로 난 길을 거닐었다. 한 곳에 멈춰 서면 시선이 배로 몰려서, 이야기는 걸음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제 말해봐. 할 얘기 있다며.”
“아, 응. 있는데….”
정희운은 말하다 말고 도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꼼꼼한 눈길이었다.
“…그, 혹시. 뭐 전해 들은 거 없어? 나에 관해서….”
“네가 말하고 싶은 게 소속사 이적에 관한 일이라면- 그래. 들었어.”
현재 한국은 왕의 길 이슈로 떠들썩했다. 다르게 해석하자면, 소소한 연예계 이슈가 묻히기 쉬운 상황이란 소리기도 했다.
새솔 엔터테인먼트는 이 시기를 놓치지 않았다. 소속사 이적이 주목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것도 계약이 만료되기 전에 데려오는 거라면 더욱이.
그래서 새솔은 한참 왕의 길 방영으로 떠들썩할 때, 정희운과 은밀하게 접촉해 대화를 나누었다.
“자세한 내용도 알아?”
“아니, 그냥 너랑 식구가 될 수 있다는 것 정도만.”
“…새솔 대표님이, 직접 전화 주셨어.”
“그래?”
“응. 내가 계약 기간이 덜 끝나서 아직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했거든. 그러니까 대표님이 물어보시더라. 그런 거 상관없이 너는 어떻게 하고 싶냐고….”
“그렇구나.”
감흥 없는 맞장구에 정희운의 발이 멈추었다. 자연히 정희운이 도현의 한 걸음 뒤에 서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도현은 그를 돌아보았다.
초겨울에 접어들어도 정오의 태양은 밝았다. 갈색 머리카락과 뺨 위로 햇빛이 가로질렀다. 찬바람 탓에 코끝이 조금 붉어진 소년이 입술을 달싹였다.
“…너야?”
정희운의 눈동자는 얼핏 보면 평균보다 조금 연할 뿐인 갈색 같아도, 자세히 보면 온갖 색이 섞여 있었다. 새카맣기만 한 도현과 달리 조금 신비로운 느낌도 풍겼다.
그가 가진 색채를 보면 봄과 가을에 어울릴 것 같은데, 의외로 그는 겨울의 쌀쌀함 속에서 존재감이 뚜렷해졌다.
위로 타고 올라가다 보면 외국인의 피가 섞여 있으려나. 도현은 그 눈동자를 직시하며 태연한 생각을 했다.
“뭘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무심한 대꾸에 정희운이 옅게 웃었다.
“이상하잖아. 내가 뭐라고 대표님이 그렇게까지 하겠어.”
“글쎄. 대표님 눈에는 네가 뭐라도 되어 보였나 보지.”
“으음….”
도현이 옅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무슨 착각을 한 건지는 알겠는데….”
초겨울 바람을 닮은 목소리였다.
사늘한데, 손끝을 움츠릴 정도로 차지는 않은.
“내가 기존 소속사에서 잘 지내는 널 데려올 이유가 어디 있겠어. 만약 있다고 해도… 내 말을 회사에서 들어줄 것 같아? 겨우 열네 살짜리 애 말을?”
도현은 거리낌 없이 새솔을 매도했다.
“소속사에서 나를 우대하는 건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배우로서야. 누구를 데려오고 말고까지는 내 권한이 아니란 소리야.”
정한결이나 경찬호가 들었다면 목덜미를 잡았을 소리가 도현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겉보기엔 딱히 트집 잡을 만한 구멍이 없는 말들이라서 정희운의 표정이 점점 긴가민가하게 변해갔다.
“그러니까, 번지수 잘못 찾아왔어. 대표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너한테서 무언가를 본 거고, 답을 찾아야 한다면 너에게 있겠지. 내가 아니라.”
“…….”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난….”
정희운이 시선을 떨어트린 채 머뭇거렸다.
“난…. 내가 계약 기간이 덜 끝난 채로 가면 여러모로 민폐니까….”
“너, 대표님이 바보 같아?”
탓하는 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부드럽게 어르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왜일까.
저 여유가 조급함을 가리기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태양을 등지고 선 채 새카만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소년의 그 어디에도 그런 징후가 없었음에도.
그래서 정희운의 대답은 한 박자 늦었다.
“어?”
“네가 아는 걸 대표님이라고 모르실 거 같아?”
“어, 아니….”
“잘 들어. 네가 민폐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건 새솔 몫이야. 그게 소속사가 해야 하는 일이고, 너는 네가 할 일만 하면 돼.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지 결정하는 거.”
도현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생각하고, 네가 고민해서, 네가 결정해. 그 후부터는 어른들 몫이니까.”
* * *
“내가 생각하고 고민해서….”
나직하게 중얼거린 희운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그의 시선은 내내 저와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굴다가 사라진 소년이 있었던 자리에 닿았다.
- 너, 대표님이 바보 같아?
희운은 아까 하지 못했던 말을 작게 내뱉었다.
그럼 너는 내가 바보 같아?
…이런 기적이, 말도 안 되는 기적이, 나한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
‘이상해.’
나도 아는 걸 도현이 모른다.
하지만 아까의 소년은 상황을 모면하려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게 아니라… 기묘하게도, 진심을 말하는 사람 같았다.
정말 내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아, 희운은 탄식했다.
“포기하려 했는데….”
포기해야 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다. 내 존재가 민폐일 테니까. 또다시 빚을 질 수는 없으니. 사람에게는 맞는 자리가 있고, 거기는 내 자리가 아니니까….
나열하자면 끝도 없었다.
그런데 그 끝없이 증식되는 이유를 모두 지우고 나면… 딱 한 가지가 남아버렸다.
희운이 앓는 소리를 냈다.
큰일이었다.
포기하기가 싫어져 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