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44화 (445/582)

제444화. 겨우내 웅크린 (2)

꿈은 무의식의 연장선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기억을 가진 사람의 무의식은 어떤 방식으로 촉발될까. 심리학자나 뇌 과학자라면 상당히 흥미로워할 문제의 답을 도현은 알고 있었다.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대체로 도현은 깊이 잠들었다. 아무런 꿈조차 없이. 그러나 가끔, 쉬이 잠들지 못하거나, 잠들어도 깊게 가라앉지 못하는 날이 있다.

현실과 순리에 몸을 반절씩 나누어 담근 것처럼 몽롱한 날. 그런 날이면 도현은 조각배에 몸을 늘어트리고 있다. 조각배는 물살을 따라 둥둥 흘러가고, 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수놓아져 있다.

별 속에는 한 사람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그 자리에 존재하기도, 때로는 강물 속에 떨어져 가라앉기도 한다. 그럴 때면 도현은 조각배에 몸을 맡긴 채, 별똥별의 궤적을 눈에 담는다. 망막에 새긴다.

추락한 별은 강물 아래로 깊이 가라앉는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조각배 너머, 강물 아래를 내려다본다. 앞서 추락했던 수많은 별이 굴러다니는 탐욕스러운 강물 속을.

불현듯 소년은 깨닫는다. 저건 내 거구나. 그리고 다시금 깨닫는다. 저 모든 게 내 거구나. 이젠 고개를 들어 강물이 아닌 하늘을 바라본다. 검고 말간 눈으로, 하나의 별이 져버린 하늘을.

또다시 별이 추락한다.

가느다란 빛줄기가 잠든 소년의 뺨을 가로질렀다. 덜 닫힌 창문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찬바람이 주변을 에워쌌다. 깊이 잠든 줄만 알았던 소년이 눈을 뜬 건 그 순간이었다.

밤사이 무슨 꿈을 꾼 건지 기억이 나질 않아 한참을 그대로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버석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에서 흘러내린다. 두통을 느끼며 일어선 도현이 화장실로 향하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무언가를 놓고 온 것 같은 상실감. 무척 소중한 것을 영영 잃어버린 거 같은… 아니, 잃은 게 아니야. 내가 집어삼켰어. 내 거야.

무엇이?

의문이 돋아난 순간 모든 게 흐려진다. 방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린 소년이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모든 의문과 무의식을 다시금 강물 깊이 가라앉힌 채.

* * *

점심이면 교실 안은 꽤 시끌벅적했다. 그러나 어디든 시끄러운 것보다 조용한 것을 선호하는 이들이 있는 법이라, 몇몇 아이들은 번잡함을 피해 구석에 몰려들었다.

그 평화 지대를 만들어낸 건 귀에 이어폰을 꽂고 책을 읽는 소년이었다. 이따금 도현은 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조용히 책을 읽거나 공부하면서 시간을 보낼 때가 있었는데, 그게 오늘이었다.

도현은 흘긋 제 옆자리를 보았다.

수업 시간에 아닌 척 꾸벅꾸벅 졸던 한설아는 양팔에 얼굴을 묻은 채 깊게 잠들어 있었다. 제 자리, 남의 자리 구분 없이 주변에 앉은 아이들도 제각각이었다. 핸드폰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공부하거나, 아니면 한설아처럼 낮잠을 자거나.

이어폰 너머로 소음이 작게 들려왔다. 그것마저도 풍경의 일부 같아 도현이 조금 나른하게 눈을 깜빡일 때였다.

반짝, 노래를 재생하던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뭔가 싶어서 확인해 보니 메시지였다.

[학교 끝나면 회사에 올 수 있어? 계약 얘기야.]

계약.

경찬호가 말하는 계약이라면 정희운의 일이겠지. 도현은 금방 알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사이 데리러 오겠다는 말도 있었지만, 도현이 거절했다. 소속사는 그리 멀지도 않으니.

이전에야, 한국에 익숙지 않은 아들을 걱정하는 부모님 탓에 자주 얻어 탔다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도현은 마지막 답장을 보다가 뒤로 가기를 눌렀다. 대신에 도현이 튼 것은 다른 앱이었다. 한 파일을 누르자 이어폰에서부터 소리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무슨 얘기일까. 정희운이 승낙했다고? 거절했다고? 궁금했지만, 동시에 어느 쪽이든 별로 상관없었다.

어차피 결과는 똑같을 테니.

하교 후 도현은 곧장 새솔 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이전번에 버스에 탔다가 소란이 일었던 경험이 있어서 도보로 가기를 택했다.

쌀쌀한 바람이 귀 끝을 스쳐 지나갔다. 부지런히 걸으니 저녁 무렵에 접어들기 전에 회사에 도착했다. 도현이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직원들이 알은체를 해왔다. 도현은 그들에게 마주 인사하며 대표실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을 대표실이 도현에게는 익숙한 공간이었다. 이번 일로 자주 들락날락한 것도 있지만, 그전에도 정한결은 도현을 대표실에 앉혀놓고 이것저것 챙겨주기를 좋아했던 탓이었다.

경찬호는 도현보다 먼저 자리에 와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도현의 책가방을 가져가 적당한 곳에 올려놓았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 건 네 사람이 자리에 앉은 후였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정희운 측에서 긍정적인 의사를 보였습니다.”

화두를 연 건 실장이었다.

“정희운 본인이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은 후 보호자와도 연락이 닿았습니다. 직접 만나 봬야 할 일인 것 같아 대면으로 말씀드렸는데, 선선히 동의하셨고요.”

실장의 말은 매끄러웠지만, 도현은 그것을 흘려보낼 수가 없었다.

“직접 만나 뵀다고요?”

“예, 아무래도 계약 문제다 보니까요. 저희 쪽에서 직접 찾아갔습니다.”

“그거 말고는, 별말씀 없으셨고요?”

도현의 물음에 실장은 그때의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조금 야윈 듯한, 병약한 인상의 여인. 그러나 다소 퀭해 보이는 인상을 제외하면 흠잡을 곳 없이 우아한 사람이었다. 대개 순수 예술 쪽 종사자들에게서 느껴지는 곧음이 그녀에게 있었다.

정희운의 친모는 무척이나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가 하는 말을 내내 경청하기만 했다. 호기심도, 질문도 없었다. 그저 모든 설명이 끝난 이후에, 다소 피곤한 낯으로 이렇게 물었을 뿐이었다.

- 저는 사인만 하면 되나요?

음, 실장이 입을 뗐다.

“예, 없었습니다.”

“…그래요?”

도현의 표정은 모호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슬픈 것 같기도, 아무것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기묘한 표정은 금방 갈무리되었다. 무척 담담한 얼굴이라 그곳에 있던 세 사람은 움켜쥔 흰 손을 보지 못했다.

“아직 계약서상으로 묶이진 않았지만, 정희운을 당사 아티스트로 여기고 보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또한 아침에 해늘 엔터테인먼트 측으로 의사를 전달했고요.”

실장의 말에 경찬호는 해늘에서 보였던 반응을 떠올렸다. 아주 기가 차다 못해 분노한 기색이었지. 앞에 정희운이 있었다면 잡아먹을 기세였다.

“아마 앞으로 꽤 시끄러워질 겁니다. 그쪽에서 협조적으로 나온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욱 크니까요. 법적 공방까지는 준비해 두어야겠죠.”

이렇게 말해도 도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걸, 이곳에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들은 분명히 말해두는 것이었다. 너를 위해 우리가 이렇게까지 하고 있노라고. 그러니까 분명히 알아두고, 부담감을 느끼라고.

새솔은 자선 사업 단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손해 보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 일로 인해서 얻게 될 손해보다 더 거대한 이익을 도현을 통해서 얻어낼 것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도현의 표정은 무심했다.

“그거 말인데요.”

도현이 교복 재킷 위에 걸친 겉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세 사람의 시선이 도현의 손에 집중되었다. 도현이 톡톡, 무언가를 두들기니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분별하기 어려웠던 소리가 볼륨을 키우니 선명하게 귀에 꽂혔다.

아마 야외인 것 같았다. 녹음된 파일에는 잡음이 잔뜩 끼어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를 분간하기에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 …그래봤자 너, 이도현 덤으로 딸려 온 거야. 이도현 돌아오면 누가 너한테 관심이라도 가질 것 같아? 네 위치 파악을 잘하라고.

남자의 말이 길어질수록 의아한 표정을 짓던 사람들의 눈빛이 점점 딱딱해졌다. 틱, 녹음 파일이 끝나고 도현은 다음 파일을 틀었다.

- 아, 진짜!

짜증이 가득 담긴 날카로운 목소리가 공기를 꿰뚫고 지나갔다. 그 앞에 어린아이가 있었다면 위협을 느꼈으리만치 흉흉한 음성이었다.

- 너 내가 조심히 다니라 했어, 안 했어? 머리카락 다시 정돈해야 하잖아. 야, 너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괜히 고생해야만 속이 편해?

- 실수로….

- 아, 귀찮아 죽겠네. 진짜, 빨리 와.

- 형! 팔 아파요!

- 아프긴 시발, 지랄 났네. 지랄 났어.

끌려가는 것처럼 엇박자의 발소리가 났다. 소리가 멎자, 잠깐 지독한 고요가 찾아왔다. 녹음 파일을 듣는 내내 이마에 핏줄을 세우고 있던 정한결이 말을 토해냈다.

“저, 개새끼가…!”

“대표님! 입! 입!”

“아니, 근데 저 개새끼가 먼저 개짓거리를….”

“대표님!”

“후우, 아니… 아니야. 그래. 나 진정했어. 진정은 했는데, 저 개새, 아니, 개자식이…!”

그러나 흥분하던 정한결도 다음 부름에는 진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

과열된 분위기가 단숨에 식을 만큼 침착한 목소리였다. 정한결은 그제야, 녹음을 틀기 전과 다름없이 차분한 소년을 발견했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움츠러드는 시선이었다.

고요한 공간에 앳된 미성이 울렸다.

“다섯 개 더 있어요.”

“…….”

“이거, 해늘 쪽으로 보내주세요.”

그 침착한 음성을 듣고서야, 경찬호는 용인에서 도현이 보였던 기행의 이유를 깨달았다. 도현은 정희운이 촬영하러 온 후 종종 아닌 척 그의 주변을 맴돌았는데, 그때마다 온갖 핑계를 가져다 대며 경찬호를 떨어트려 놓았다.

그저 친구랑 무슨 문제가 있나 싶었는데….

‘그게 이 이유였다니.’

경찬호의 표정이 착잡해졌다. 이걸 잘했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왜 저를 믿지 못하고 혼자 그랬냐고 타박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깨달음을 얻은 건 경찬호뿐만이 아니었다. 정한결도 복잡한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솔직히, 정희운을 데려오자고 하는 말에 떼를 쓴다고 생각했다. 애는 애구나, 내심 그런 감상을 늘어놓았다. 그 막무가내 고집의 이유를 알게 된 지금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기분이 묘했다.

“…이런 이유였군요.”

이 실장도 정한결과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서릿발 같은 눈으로 핸드폰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어 도현을 직시했다.

“해늘 쪽에 보낼 필요가 있습니까? 원한다면 공론화도 가능합니다. 우리 쪽에서 기자들을 부르면 되니까요.”

“그래, 이 실장. 말 한번 잘했다. 저쪽에서 계약으로 터트리면, 우리도 터트리는 거야. 아주 엿 되게….”

“아니요.”

도현이 정한결의 말을 끊어냈다. 그리고선 머뭇거림 없이 말을 이었다.

“이 부분은 분명히 해주세요. 저희는 배우 정희운을 데려오는 거예요. 불쌍한 어린애 하나 구하려고 자선 사업을 하는 게 아니라.”

확고한 검은 눈이 세 사람에게로 향했다. 그 까만 시선에서 세 사람은 형용하기 힘든 압박감을 받았다. 고개를 끄덕여야 할 것만 같은 단호함이 거기에 어려 있었다.

“모두가 그렇게 여겨야 해요. 여기 있는 세 분도, 저도, 다른 사람들은 물론… 정희운까지도.”

아, 경찬호는 감탄사가 나오려는 것을 삼켰다.

저 녹음 파일은 분명 촬영 때부터 갖고 있었던 거다. 처음 정희운을 주제로 협상할 때 꺼냈다면 더욱 도현에게 유리하게 흘러갔을 것이다. 그런 패였다.

그럼에도 도현은 꺼내 들지 않았다. 모든 사전 작업이 마무리되고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될 때가 되어서야 터트렸다.

말 그대로, 그들이 정희운이 데려오는 이유가 자선 사업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경찬호는 기이한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무섭도록 이성적이다.

열네 살. 친구가 부당한 일을 당했다면 이성이고 뭐고, 들이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그런데 도현은 오직 한 가지. 정희운의 안전밖에 보이지 않는 듯이 행동했다. 복수나 앙갚음 같은 사감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해늘 쪽에 계약 해지를 해주는 조건으로 해당 녹음 파일을 넘겨주세요. 대신에 해늘은 그 시간부로 정희운에게 아무런 접촉을 해서는 안 돼요. 사람들은 그저 계약이 만료되어 소속사가 바뀐 것으로 알아야겠죠.”

“…그, 뜻을 알겠습니다. 하지만 해늘에서 협조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확실히 녹취록은 문젯거리가 되겠지만… 해당 매니저가 혼자 저지른 일이라고 꼬리를 자르면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차라리 공론화를 하는 편이 우리에게는 이득일지도 모릅니다.”

“아니요, 꼬리 안 자를걸요. 해늘도 조용히 묻어가고 싶을 거예요.”

도현의 시선에 경찬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권규하. 정희운 매니저 이름입니다. 그리고 해늘 부사장 권강옥의 조카죠.”

일전에, 도현은 경찬호에게 부탁한 적이 있었다. 해늘 엔터테인먼트에 관해서 아는 것이 있냐고. 무엇이든 좋으니, 알려달라고. 경찬호는 도현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알게 된 사실 중 한 가지가 바로 저것이었다. 도현의 추측이 확신이 된 순간이자, 모든 계획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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