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5화. 겨우내 웅크린 (3)
희운은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지 말걸….’
그날엔 뭐에 홀리기라도 했나 보다. 홀리긴 홀렸겠지. 너무 빛나 보이는 존재가 눈앞에 떡하니 있는데 홀리지 않는 게 가능한 일인가….
새솔 엔터테인먼트 측으로 이적 의사를 밝히고 나서, 알겠다는 대답을 받았다. 그리고 해늘 쪽과는 연락을 자제하라는 권유 아닌 권유도. 그 이후로는 조용했다. 뭐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건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희운의 눈에 후회의 빛이 스쳤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했다. 계약이 장난도 아니고. 끝내고 싶다고 멋대로 끝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한순간의 선택이 괜히 여러 사람 고생시킨 거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다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연락이 없어.’
새솔은 해늘 측에 연락하기 전에 희운에게 먼저 알렸다. 그 덕에 희운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을 터트리기라도 할 듯 걸려 오는 전화도, 전화를 받지 않자 쏟아지는 메시지도 예상 내의 것이었다.
뾰족하게 날이 선 말들이 여기저기 쿡쿡 찔러댔지만, 희운은 애써 담담하게 견뎌냈다. 이렇게 될 걸 모르지 않았으니까.
정말 모르지 않았는데…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희운은 온순해 보이는 외양 탓에 자주 오해를 사곤 하지만, 그리 낙천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나이를 생각하면 놀라우리만치 현실적인 성격이었다.
일찍이 사회에 발을 디딘 탓인지 혹은 그 외의 요소 탓인지는 모르겠다. 어차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대로 이적이 불발되고 나면 모든 덤터기를 쓰는 건 희운, 자신이라는 걸 너무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거지.
분명 소속사 측에서는 희운을 배은망덕하게 여기며 눈엣가시로 볼 것이다. 매니저 형은 불같이 화를 내겠지. 그건 추측까지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미 오십여 통의 문자가 증명해주고 있으니.
그래, 그런데….
‘왜 연락이 안 오지?’
어느 시점으로부터 연락이 뚝 끊겼다. 전화도, 문자도. 혹시 실수로 차단이라도 했나 싶어서 확인해 봤는데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불안했다.
그의 매니저가 이런 것을 인내하는 성미가 아니란 걸 알고 있어서 더욱. 머릿속이 온통 복잡했다. 혹시 매니저 형이 집 앞에 온 건 아닐까. 그럼 나는 어떡하지. 나가야 하나? 하지만 나가면….
지잉-
그래서 핸드폰이 짧게 울렸을 때, 희운은 차라리 안도했다. 그 문자에 욕설과 협박이 점철되어 있어도 침묵보다는 덜 무서울 거 같았다.
“…응?”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메시지를 연 희운은 짧은 의문을 뱉어냈다. 그 메시지의 주인이 예상했던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정희운 씨. 새솔 엔터테인먼트 이지석 실장입니다. 지금 통화 괜찮으실까요? 편하게 답장 부탁드립니다.]
한번 만나본 적 있는 인물이었다.
중학생에 불과한 희운에게도 정중하게 굴던 태도가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깊게 남았다. 희운은 잠깐 망설이다가 괜찮다는 답장을 보냈다. 답장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 왔다.
- 아, 안녕하십니까. 새솔 엔터테인먼트 이지석 실장입니다. 지금 통화 괜찮으실까요?
“네, 괜찮아요….”
- 다행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네? 네, 잘 지냈어요!”
- 별다른 일은 없으셨고요?
그는 잠깐 이것저것 물어보며 희운의 상태를 확인하는 듯했다. 그 목소리가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다정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희운은 낯설어하면서도 성실히 대답했다.
그는 희운이 괜찮아 보이자 본론으로 넘어갔다.
- 그간 연락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처리할 게 많아서 시간이 좀 걸렸어요.
“아, 아니. 괜찮아요!”
-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걸 가장 궁금해하실 것 같은데, 계약 해지 건 관련해서는 해늘과 원만하게 협의를 맺었습니다.
“네?”
- 해늘 측에서도 양보를 해줘서 위약금이나 여타 다른 조건 없이 계약을 해지하기로 했습니다. 혹시 언제 시간 되실까요? 새로운 계약서를 작성하려면 보호자를 동반해서 회사에 방문해 주셔야겠는데요. 그 전에 해지 합의서도 작성해야 하고요.
실장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말해서 오히려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 내용을 이해하고 나니 더욱 머리가 꼬였다.
“잠시, 잠시만요. 방금 뭐라고….”
- 회사에 방문을 요청드렸습니다. 계약서에 사인도 해야 하고, 앞으로 지낼 소속사니까 직접 구경하시는 편이 좋을 테니까요.
“아니요! 그 전에… 해늘에서 계약을 해지해 줬다고….”
- 아, 네. 맞습니다. 몇 가지 조율이 있긴 했지만, 모두 원만하게 협의가 되었습니다. 계약 만료 시점이 얼마 안 남았던 덕분에 해늘 측에서도 유연하게 대응해줬죠. 혹시 더 궁금하신 점 있으십니까?
실장이 그리 물었지만, 희운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말소리가 들렸지만, 그 말은 머리에 머무르지 못하고 밖으로 흩어졌다.
도저히 현실 감각이 없었다. 차라리 지금 전화 건 사람이 희운을 놀리고 있다는 게 더 믿음이 갈 정도로. 꿈을 꾸는 건가 싶어서 뺨을 꼬집어 보았는데 고통이 느껴졌다.
희운은 통증에 글썽거리는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진짜로?
진짜, 이렇게 쉽게?
* * *
희운은 며칠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해지 합의서를 쓰러 소속사에 방문했을 때는 긴장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러나 그가 우려한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해지 합의서를 쓰는 내내, 매니저 형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던 탓이었다. 마치 이 회사에서 사라진 사람처럼.
희운은 몇 번 마주한 적 없던 해늘 부사장님과 마주 본 채 해지 합의서를 작성했다. 희운과 동행한 새솔 대표는 그녀와 뜻 모를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해늘 소속사 밖이었고,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땐 새솔과 새로운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기대가 많아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희운은 제게 내민 손을 얼떨떨하게 쳐다보았다. 속전속결로 흘러가는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박자 늦게 손을 마주 잡자, 대표가 잠시 아프지 않게 힘을 주었다.
악수를 끝낸 대표가 곧게 앉은 여인을 보았다.
“어머니, 시간 괜찮으시다면 회사를 조금 둘러보시겠습니까?”
희운은 물끄러미 제 옆을 보았다.
우아하게 실루엣을 드러내는 검은 원피스는 그녀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지만, 희운의 눈에는 그녀가 장례식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날 이후로부터….
희운은 길어지려는 생각을 잘라냈다. 답답하게 조여오는 숨을 익숙하게 모른 척하며 말간 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순한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근심 하나 없이 맑아 보였다.
그녀는 하루 동안 희운의 일정에 함께했다. 함께하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계약 만료 전에 바꾸는 게 이상할 법한데도 왜 소속사를 바꾸는지,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아니면 심경의 변화가 있는지. 그중 아무런 말도….
“피곤하면 먼저 들어가세요. 저 혼자 구경하고 갈게요.”
“…그래도 괜찮니?”
“네, 괜찮아요!”
그녀는 잠시 희운에게 시선을 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백을 챙겨 일어나는 행동에는 미련이나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럼, 먼저 일어나 볼게요.”
“예? 아, 예. 살펴 가세요.”
대표는 그녀가 정말로 떠날 줄 몰랐는지, 조금 당황하는 듯하다가 그녀를 배웅해 주었다. 희운은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얼굴에서 맑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어… 일단, 둘러볼래요?”
대표가 조금 눈치를 보듯 조심스레 물어왔다. 희운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의 안내를 받아 회사를 구경하면서 희운은 예상치 못한 인물도 만났다. 도현의 매니저인 경찬호였다. 희운과 달리 그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그리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구경은 잘했어요?”
“아, 네. 대표님께서 도와주셔서….”
희운은 어쩐지 이 상황이 몹시 낯설었다. 도현의 소속사에서, 도현의 매니저와 이야기를 나누는 이 상황이. 뭔가, 있을 곳이 아닌 곳에 비집고 들어온 느낌이었다.
“그래요? 그럼 잠깐 여기서 기다릴래요? 곧 도현이가 도착한다는데.”
“네?”
“도현 씨가? 잘됐네! 아는 사람 있으면 적응하기 쉽잖아요?”
대표의 말에 어설프게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그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럼 남은 소개는 도현 씨가 해주면 되겠네요. 희운 씨도 그게 편할 테고. 그렇죠?”
희운을 데리고 다니는 게 귀찮아서라기보다는 배려해주는 기색이었다. 희운은 그 배려를 무시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아저씨는 눈치 좋게 빠져줄게요.”
“네에?”
“하하, 앞으로 잘 부탁해요.”
희운의 당황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대표는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더니 자리를 떴다. 어쩐지 희운은 그가 짓궂은 성격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앉아서 기다리죠. 테이블에 간식도 있어요. 먹으라고 둔 거니까, 편하게 먹어요.”
“아, 감사합니다.”
희운은 그의 배려로 소파에 앉았다. 낯선 공간에서 가만히 있으려니 어색해서 괜히 과자 하나를 까고 입에 물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코끝을 찡그렸다.
‘달아….’
무슨 과자인지 보지도 않고 먹어서인가. 불시에 퍼진 단맛이 무척 강렬했다. 먹은 걸 도로 뱉을 수는 없어 기계적으로 씹어 삼킬 때였다.
“…왜 웃으세요?”
경찬호가 희운을 보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불안해져서 입가를 매만져 봤는데 다행히도 묻어나오는 부스러기는 없었다.
“아니, 뭐 안 묻었어요. 그냥… 도현이가 한 말이 생각나서요.”
“도현이가요?”
“네, 희운 씨가 단 걸 싫어한다고 했거든요.”
“네?”
언제 그런 말을…. 희운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러고 보면 그는 촬영장에서 그의 아이스티를 주문할 때 덜 달게 해달라고 했다. 그때도 이상하다 여겼는데… 지금 와서 그 의문이 더욱 증폭되었다.
‘대체 내 입맛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한동안 붙어 다녔다고 하나, 그리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는 건 희운이 제일 잘 알았다. 다른 평범한 친구들처럼 같이 밥을 먹거나, 놀러 간 적도 없었으니까.
그때 당시 조금 친해졌다고 여겼던 게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들 사이엔 명확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시간이 흘러 되돌아본 지금에야 선명하게 보이는 선이.
계속해서 의문이 쌓여갈 때였다.
철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희운은 제일 먼저 새카만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그것만으로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리는 건 충분했다.
내내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다가 순식간에 현실로 끌려온 기분이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여기 있는 날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손끝이 선뜩했다.
차게 식은 손을 말아 쥐던 희운은 문득 무언가 조금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였다면 태연하게 ‘안녕’ 하고 인사했을 도현이 무척이나 조용했다.
그는, 희운을 보고 있었다.
도현의 새카만 시선은 종종 오래된 것들이 떠오른다. 예스러운 골동품이나, 건축물 같은 것. 그것들의 공통점은 시간의 흔적이 수놓아져 있다는 거였다.
그러니 도현과는 어울리지 않는 감상일 텐데도… 희운은 떠오르는 생각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아주 오랫동안 무언가를 기다려온 사람 같았다. 낯설었고, 어쩌면 무척이나 익숙하기도 했다.
그 시선의 무엇이 희운을 건드렸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순간 한계치까지 쌓아 올렸던 무언가가 툭, 무너져버린 느낌이었다. 불시에. 정말 불시에 희운은 이유도 없이 서러워졌다.
“너….”
드물게 도현의 얼굴에 당혹이 어렸다. 그가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손을 들었다 내렸다 했다. 방황하는 모습은 처음이라 신기한 기분으로 구경하다가, 무의식중에 손등으로 뺨을 닦았다. 손등에 묻어나오는 축축한 물기에 그제야 희운은 제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번째였다. 자각조차 못 하고 눈물이 흘러나온 순간이. 첫 번째는 도현을 처음 본 순간이었고 두 번째는 지금이었다….
운명적이었던 느낌은 환상이었다고, 그리 결론지었다. 오랜 고통 끝에 나온 결론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희운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 모든 게 스스로 지어낸 환상이었든, 아니든… 결국 그때나 지금이나 저 존재가 저를 이끌었다는 것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