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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448화 (449/582)

제448화. 겨우내 웅크린 (6)

며칠 사이 급격히 추워진 거리에는 버석한 낙엽이 굴러다녔다. 확연히 두꺼워진 차림새를 한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감색 코트를 입은 그도 풍경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었다.

까만 아스팔트를 따라가다 보니 여유롭게 늘어진 주택가가 보였다. 남자는 괜히 시린 손을 주머니 안에 찔러 넣었다.

무작정 찾아오긴 했는데, 막상 대문 앞에 서니 쉽사리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연락이라도 하고 올 걸 그랬나. 미약한 후회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후, 남자가 픽 웃었다.

그래봤자 불편한 건 똑같을 텐데.

성한 날이 없는 갈라진 손끝이 살짝 파인 홈을 눌렀다. 삑, 인터폰이 연결되는 소리가 들렸다. 정희성은 두어 걸음 물러서서 카메라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덜컹, 문이 열린 건 한참 후였다.

대문을 지나 현관문 앞에 도착할 때쯤 문이 열렸다. 그 앞에 서 있는 건 발목까지 내려오는 원피스 위에 가볍게 숄을 걸친 여성이었다.

“…왔니?”

“네, 그간 잘 지내셨어요?”

“잘 지냈단다.”

깜빡, 깜빡. 현관의 조명등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여성은 가는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비켜섰다. 드디어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은 정희성이 고개를 까딱였다.

흰 대리석으로 꾸며진 집안은 온기가 없었다. 실내용 슬리퍼를 신었는데도 약간의 한기가 느껴졌다. 정희성은 강박적으로 느껴지리만치 깨끗한 거실을 둘러보다가 여인을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회사에?”

“그래.”

“희운이는 안에 있죠?”

정희성의 양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몸짓에서 몸에 밴 우아함이 태가 났다. 정희성은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감사를 대신하며 동생의 방으로 향했다.

“얘야.”

여전히 현관 앞에 서 있는 여인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얘야. 그 호칭에 정희성은 웃음이 나려는 것을 참았다.

“네, 듣고 있어요. 어머니.”

부러 덧붙인 단어에 여성의 미간이 옅게 찌푸려졌다. 양 눈썹이 불편함을 담아 일그러지는 것에 정희성은 보란 듯이 눈매를 휘었다. 마치 부모에게 순종하는 착한 자식처럼.

“말씀하세요.”

“…이렇게 연락 없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나나 그이가 집에 없을 때도 있으니까.”

정희성은 어렵지 않게 말의 허점을 발견했다.

“연락하면 찾아와도 되나요?”

“일정이 비는 날이라면.”

“아하하, 그래요? 그럼 전 두 분이 바쁘시지 않기를 바라야겠네요.”

그런 날이 없으리란 걸 두 사람 모두 알았다. 그의 양모는 늘 이런 식이었다. 언제나 대놓고 거부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을 향하는 비난의 화살을 견디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지겨우리만치 익숙했다. 그가 성인이 된 후 집을 나가길 원할 때도, 그녀는 마치 정희성에게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굴었으니까.

그것을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그 또한 그로 인해 그녀의 마음이 편해진다면 꽤 수지가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습관적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는데 불현듯 둔탁한 통증이 그를 덮쳤다.

헉, 정희성이 헛숨을 들이 삼켰다. 그의 매끈한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야윈 눈가가 일그러지자 눈 밑에 자리한 그림자가 더욱 도드라졌다.

또다. 또 이 지긋한 통증이었다.

오래전부터 그를 괴롭히던 통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근래 들어서는 더 지독해져서, 그를 온통 헤집어놓고 나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간신히 사라졌다.

“얘야?”

“…아. 오늘, 오늘은 이것만 주고 가려고 왔어요. 놓고 갈게요.”

간신히 손목에 건 봉지를 들어 보이고 뒤를 돌았다. 휘청일 뻔했지만, 뒤에 양모가 서 있다는 생각에 버텨냈다. 이마며 목에 식은땀이 흥건히 배어났다.

익숙한 방문 앞에 선 희성은 참은 숨을 토해냈다. 오늘만큼은 이 방문이 닫혀 있는 게 다행이었다. 이렇게 꼴사나운 모습을 동생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고통 속에서도 여러 색의 감정들로 버무려져 다채로운 빛을 품었다. 그 표정을 누군가 보았더라면 오래도록 잊지 못했으리만치 다정한 눈빛이었다.

고요한 복도 안, 그가 문 앞에 봉지를 내려놓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렸다. 선물이 쓰러지지 않고 벽에 잘 기대어 있는 걸 확인한 정희성이 숙였던 허리를 곧게 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불안한 눈으로 이곳을 주시하는 여인이 보였다. 정희성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해 보였다.

그가 가까워지자 양모가 입을 열었다.

“차라도 마시고 가겠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그리 권할 거면 적어도 저 눈빛은 치우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순간 좋다고 대답하면 어떨까, 하는 짓궂은 호기심이 일었지만 뒤이어 따라오는 두통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볼일 다 봤으니 됐어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또 선물을 들고 올 거니?”

“왜, 희운이가 제가 준 선물 별로래요?”

그녀는 입을 다물었지만, 그 침묵에서 답을 읽어낼 수 있었다. 장난감을 안 좋아하는 건가. 그럼 다음에는 뭘 사지…. 맛있는 거? 걔가 뭘 좋아하더라. 단 건 싫어하던데….

삼천포로 빠지려던 생각을 막아선 건 양모였다.

“희운이는 내가 잘 돌보고 있으니 너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아아, 괜찮아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아, 다음번에는 어머니 것도 사 올 테니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여인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정희성은 뻔뻔함을 지우지 않고 물었다.

“뭐 가지고 싶은 거 있으세요?”

“필요 없단다.”

그녀는 꽤 단호히 말했다.

“선물 같은 건 필요 없으니, 다음번에는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말렴.”

“하하.”

정희성은 웃기만 했다. 아까부터 살갗을 갈기갈기 찢는 것 같은 고통이 계속해서 몰아쳤다. 지금 가슴께를 조이는 통증 또한 그런 것이리라.

쉬자. 가서, 쉬자.

그리고 몸이 조금 회복되면 시간을 두고 다시 오는 거다. 너무 자주 방문하면 어머니가 싫어하실 테니까. 그러니 가끔, 너무 버티기 힘들 때만.

“…가볼게요.”

오 분도 채 되지 않아 쫓겨나듯 현관으로 돌아온 이가 문고리를 잡았다. 차가운 전자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정희성은 나가기 전에 한 사람을 돌아보았다.

“아. 저 며칠 뒤에 공연이 있어요. 희운이 선물에 티켓도 넣어뒀으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보러 오시든, 버리든.”

“…그래.”

정희성은 짧게 웃은 후 문을 밀었다. 순식간에 여인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정희성은 이미 닫혀버린 문을 보며 그 흔적을 쫓았다. 그러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희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휘청거리는 인형이 천천히 멀어졌다.

그 해.

국내에서는 오랜만에 귀국한 바이올리니스트의 공연이 열렸다. 그 명성에 걸맞게 공연장은 만석이었다. 단 세 좌석만을 제외하고.

세간의 뜨거운 주목 속에서 진행된 공연은 어째서 그가 그토록 사랑받고 추앙받는지 알기에 충분했다. 청중들은 흥분했다. 이 소름 끼치도록 뛰어난 음악가가 만들어낸, 그리고 만들어갈 음악을 그리며 다음을 기약했다.

그러나 공연에 만족하고 돌아가던 청중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바로, 바이올리니스트가 쓰러졌다는 소식이었다.

- 다시 올게요.

이제는 세 사람만이 아는, 지켜지지 못한 약속이었다.

* * *

“오늘도 안 왔어?”

희운의 물음에 한설아가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희운이 고개를 떨궜다.

내가 잘못한 걸까.

그날, 회사의 휴게실에 문을 걸어 잠그고 대화를 나눈 후 도현의 소식이 뚝 끊겼다. 그는 일주일 동안 회사는 물론, 학교에조차 나오지 않았다.

도현의 반 친구들조차 소식을 모르는 기색이었다. 도현은 말 그대로 잠적했다. 용기 내어 도현의 매니저에게도 연락해 봤지만, 그는 오히려 도현이 등교하지 않는다는 말에 놀란 기색이었다.

“알았어. 고마워.”

한설아에게 인사한 희운은 묘하게 분위기가 가라앉은 2반을 보다가, 등을 돌렸다. 가지런한 이에 입술이 짓눌렸다. 며칠간 괴롭힘당한 입술에 피가 송골송골 맺혔지만, 희운은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눈만 내리깔았다.

나 때문이야.

그 대화의 무엇이 도현을 건드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도현이 잠적한 며칠간 머리를 굴리며 고민해봐도 알기 어려웠다.

알 수 없는 건 잠적의 이유뿐만이 아니었다.

- 어렸을 때라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근데 이건 기억해. 형이 나를 되게 예뻐했어.

- 형을 좋아했어?

무의식중에 과거형으로 말했는데, 이상함이나 의문을 전혀 느끼지 못하던 흰 얼굴도. 좋아하냐고 묻는 것도 아니고 좋아했냐고 물어보던 목소리도.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애를 써봐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모든 것이 의문이었다.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수업 시간에 수업을 듣고,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숨을 쉬는 모든 시간 동안 희운의 신경은 온통 한곳에 쏠려 있었다.

…집에, 찾아가 볼까.

집 주소는 모르지만, 한설아에게 물어보면 알려줄지도 몰랐다. 찾아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면 머릿속이 하얗지만…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분명 가장 유력한 원인 제공자는 자신이었으니.

2반의 우울하던 공기가 떠오르자 어깨가 아래로 늘어졌다. 희운은 힘없이 가방을 들어 어깨에 멨다. 몇몇 친구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교실을 나섰다.

교문을 나서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대부분은 결심이었다. 내일까지만 기다려 보자. 내일까지 기다리고, 내일도 소식이 없으면 찾아가는 거야.

굳은 결심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어느 순간 누군가의 발소리가 희운의 것과 나란히 겹쳤다. 뚜벅거리는 단정한 소리에 희운은 내내 땅을 향하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먼지 하나 없이 단정한 신발을 지나, 가만히 서 있어도 남다른 태가 보였다. 희운의 시선이 점점 더 위로 올라갔다. 흰 목덜미를 살짝 덮는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새카만 눈동자.

“…….”

희운은 그를 부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응시했다. 도현은 그의 혼란스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요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윽고 도현의 고개가 조금 기울었다. 조금 어두워진 하늘 아래 소년의 이목구비 위로 음영이 졌다.

“안녕.”

멋대로 잠적했던 소년이 일주일 만에 나타나 뱉은 한 마디는, 인사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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