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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449화 (450/582)

제449화. 겨우내 웅크린 (7)

말없이 잠적했던 친구가 뻔뻔하게 인사하며 나타났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친한 친구라면 욕부터 쏟아낼 테고 데면데면한 사이라면 가볍게 안부 인사를 나눌 것이다. 그리고 그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는 희운은 침묵했다.

도현은 희운의 침묵에도 개의치 않아 했다.

“어디 가던 길이야?”

그 물음은 너무 태연해서 일상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희운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야, 집….”

“집에서 할 거 없지? 잠깐 나랑 어디 좀 가자.”

“어, 어디를?”

“멀지 않아.”

아니, 지금 그게 문제인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희운이 항의하려고 했지만, 도현이 그의 팔목을 잡아끄는 게 먼저였다. 희운은 결국 별다른 반항도 못 한 채 끌려갔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희운은 제가 어째서 카페에서 도현과 마주 보고 앉아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굣길에 난데없이 나타나 희운의 팔목을 잡아끈 도현이 그를 데려온 곳은 한 카페였다. 그것도 전통찻집….

눈앞에서 십전대보탕을 홀짝이는 할리우드 배우에 희운은 인지부조화가 일었다. 너무 어이없으면 말도 안 나온다더니, 지금이 딱 그랬다.

“안 마셔?”

“아니, 마셔….”

희운은 주전자를 기울여 제 찻잔에 차를 졸졸 따랐다. 말차 특유의 쌉싸래한 향이 훅 풍겼다. 잡초처럼 푸릇한 차를 노려보던 희운은 한 모금 마셨다.

“어….”

“괜찮아?”

“응, 맛있네….”

달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쓰지도 않았다. 끝맛이 입에 감돌아 묘하게 중독성이 있었다. 찻집에서 말차는 처음인데 나쁘지 않은 것 같… 아니, 이게 아니라.

“지금 무슨 상황이야?”

희운의 지적에 도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눈을 깜빡였다. 그 말간 표정이 가증스럽게 느껴지는 건, 분명 희운의 탓이 아니었다.

“찻집에 온 상황?”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아, 내가 실수했네.”

이제야 제대로 설명해줄 생각이 든 걸까. 그러나 희운의 기대는 얼마 못 가서 와르르 무너졌다.

“간식도 주문해야지. 뭐 먹을래? 수제 양갱도 있고… 떡 종류도 많네. 뭐 먹을 거야?”

“…….”

“안 골라? 그럼 하나씩 다 시키지, 뭐. 잠깐만 기다려.”

“자, 잠깐!”

“왜?”

뭐가 이리 극단적이란 말인가. 희운은 등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아무거나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 난 이거! 이거 먹고 싶어!”

“…부꾸미?”

부꾸미가 뭔진 몰랐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봤다. 도현은 묘한 표정으로 알겠다 하며 카운터로 향했다. 희운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에 돌아온 도현의 손에는 커다란 쟁반이 들려 있었다. 그제야 희운은 부꾸미가 무슨 음식인지 알게 되었다. 꼭 만두나 메밀전병처럼 생겼다.

그것 말고도 몇 개 더 시켰는지 양갱과 약밥, 그리고 갖가지 떡들이 눈에 띄었다. 그 양에 희운은 질린 표정이 되었다.

“먹어봐. 먹고 싶다며.”

희운이 가만히 있자 도현이 시식을 종용했다. 실제로 그리 말한 것은 맞기 때문에 희운은 하는 수 없이 포크를 들어 올렸다.

부꾸미 하나를 쿡 찍어 입에 넣은 희운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전 같이 생긴 것과 다르게 안에 든 건 팥앙금이었다. 아마도, 수제로 만든 팥앙금.

단맛이 강하지 않은 팥이 쫄깃한 떡과 어우러져서 감칠맛을 냈다. 묘하게 고소하면서 달곰한 맛은 입맛에 딱 맞았다. 조금 기름지다 싶을 땐 차를 한 모금 마시면 느끼함이 싹 사라졌다.

오물오물 씹어 삼키던 희운은 문득 도현이 저를 뻔히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희운이 먹는 모습이 뭐가 그리 흥미로운지, 신기해하는 얼굴이었다.

머쓱해진 희운이 입에 있는 걸 빨리 삼키곤 헛기침했다.

“큼, 흠. 너 떡 좋아해?”

희운은 이 답 없는 상황을 나름대로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니까 도현이 떡을 너무 좋아하는데, 때마침 그 앞에 내가 서 있었던 거다.

그래서 도현이 희운을 끌고 왔다고 하면… 어렵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 조금은.

“아니. 네가 좋아할 거 같았어.”

“…?”

그리고 도현은 그 조금의 이해마저 박살 냈다.

“내가…?”

“응.”

“그랬구나….”

오늘따라 대화가 안 통하는 느낌은 희운만의 착각이 아닐 터였다. 희운은 할 말이 굉장히 많은데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기묘한 경험을 했다.

희운은 이 상황에서 답을 찾기를 포기했다. 머리를 굴리며 이해하려 애쓰기보단 그냥 눈앞에 있는 부꾸미를 먹어 치우는 게 훨씬 생산적일 것 같았다.

그 후로는 먹는 소리만이 전부였다. 두 사람 모두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 기이한 침묵 속에서 찻물을 한 모금 머금던 희운은 문득 말없이 공유하는 이 시간이 그리 불편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현이도 마찬가지일까? 희운이 시선을 올려 흘끔, 소년을 훔쳐보았다. 그러다 저를 보고 있던 도현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희운은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처럼 어깨를 움찔거렸다.

황급히 고개를 내리려는데, 도현의 목소리가 희운을 붙잡았다.

“정희운, 나는….”

뒷말은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도현은 깊이 고심하는 낯이었다. 혹은 무언가 굉장히 곤란해 보이기도 했다.

그는 결국 짧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미안하지 않아.”

“뭐?”

대체 무슨 헛소리지. 희운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그리고 약속 지켰어.”

“약속?”

우리가 언제 약속 같은 걸 했다고?

오늘의 도현은 무척 이상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탱탱볼 같았다. 희운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이상한 말을 꺼낸 도현은 그 후로 침묵하기만 했다.

결국 그들은 접시를 모두 비운 후에 일어났다. 희운은 집에 가는 길에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한 가지는 도현에게 잠적의 이유를 묻지 못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너무 배불러서 저녁 먹기는 글렀다는 것이었다….

* * *

희운이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도현도 등을 돌렸다.

카페에서는 한 시간 정도 있다가 나왔는데, 그사이에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도현은 밤거리의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한 걸음씩 떼었다.

픽, 길을 걷던 소년이 불현듯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엄청 어이없어 보였지.

눈에 할 말을 한가득 담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단 게 지극히 정희운다웠다. 킥킥, 작은 웃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지나가던 사람이 이상하게 쳐다봐서 도현은 손바닥으로 입가를 꾹 눌러야만 했다.

희운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잡혀 와서, 아무것도 모른 채 돌아갔다. 아마 집에 가서 한참을 고민하며 끙끙댈 테지만 도현은 별로 미안하지 않았다.

그래, 미안하지 않다.

도현의 입가에서 서서히 웃음이 지워졌다. 자동차의 불빛이 검은 머리카락 위에 가느다란 선을 그으며 지나갔다. 건물과 도로, 자동차가 엉겨든 거리에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 속에서 소년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어떻게 미안할 수 있을까.

나는 네 지난 시간도, 형도 돌려줄 수 없는데.

형을 좋아한다던 너의 대답을 듣고 기쁨과 절망을 동시에 맛보았다. 형의 애정이 버려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기쁨, 그리고 너 또한 나와 같은 상실에 매여 있었다는 절망.

무가치한 것은 사라졌다 해도 잃었다 표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하지만 거기에 한 자락의 의미가 있었다면….

아, 나는 정말 너에게서 형을 빼앗았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기쁜 동시에 서러워졌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생각했다. 너에게 돌려줄 수 있는 건 없는지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나 찾아온 건 해답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이었다.

없었다. 너에게 돌려줄 수 있는 게.

그래서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진실을 밝힐까 고민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러나 너는 너 나름대로 그 상실을 극복해가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와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논하는 게 의미 있을까.

형의 과거는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의 일부는 정희운에게서 기인했다. 정희운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진실이 필요할까?

그건 상처 입은 손끼리 마주 잡는 행위였다. 쓰라리고 따갑고, 상처가 번질 뿐이다.

나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도현은 긴 숨을 토해냈다.

안다. 이 또한 기만이라는 것 정도는. 하지만 도현은 스스로 판단하기에 원체 별로인 사람이었다. 작은 병실에 틀어박혀 자기 자신밖에 모르던 어린아이. 그 애가 덩치가 조금 큰 게 도현이었다.

그 덩치만 좀 큰 어린애가 해줄 수 있는 건….

“잠깐!”

귀에 파고든 목소리에 이어지던 생각이 뚝 멎었다. 조금 크게 뜨인 눈이 뒤를 홱 돌아보았다. 급하게 달려온 건지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후, 자, 잠깐.”

“…왜? 아니, 일단 숨부터 쉬어.”

“후우, 하아.”

희운은 도현의 말대로 성실히 심호흡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눈에 띄었다. 대체 얼마나 뛴 거야. 도현은 조금 놀란 눈으로 희운을 내려다보았다.

“후, 이제 괜찮아.”

“그래… 다행이네.”

도현은 허리를 바로 세운 희운을 보았다. 복잡한 상념이 엉켜 들었다. 왜 잠적했는지 물어보려는 걸까. 아니면 그날 이상했던 태도를 들추려는 걸까.

“그래서 무슨 일이야?”

뭐든 당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도현은 금방 제 페이스를 찾은 채 느긋하게 눈을 깜빡였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뭔데?”

성실히 답해줄 마음도 없으면서 되물었다. 도현이 갖가지 변명을 머릿속으로 떠올릴 때였다.

“내일은 학교 나올 거야?”

“…….”

이건, 리스트에 없던 질문인데.

도현이 대답하지 않자 희운이 다시금 물어왔다.

“다시 학교 나오는 거 맞지?”

도현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미묘한 눈으로 희운을 응시하던 도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희운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다행이다. 네가 안 보여서 2반 애들도 걱정 많이 했어. 나도 그랬고.”

“…궁금한 건 그게 전부야?”

“응! 아, 맞다. 이거 하나만 더. 혹시… 나 때문에 기분 상한 거야? 그래서 학교도….”

“아니야.”

더 말이 이어지기 전에 잘라냈다.

원인에 희운이 있는 건 맞았지만, 그게 희운의 탓이라고 보기엔 모호했으니까. 그 단호한 부정에 희운의 눈빛에 안도가 스쳤다. 그제야 도현은 희운이 긴장하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궁금한 거 다 물어봤어. 나 진짜로 가볼게!”

희운은 씩씩하게 손을 흔든 후 뒤를 돌았다. 그러나 몇 걸음 가다 말고 다시 도현을 돌아보았다. 도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시선은 금방 마주쳤다.

“맞다, 내일 봐!”

본래도 순한 눈꼬리가 아래로 쳐지며 왼쪽 볼에 보조개가 잡혔다. 화사하고 해맑은 미소였다. 정말 그게 제일 중요했다는 듯이.

도현은 일주일간 방에 틀어박혀서 고민했다. 아무것도 돌려줄 수 없는 나는 너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은 단순했다.

무엇이든.

네가 친구를 바란다면 친구를, 형을 원한다면 형의 자리를 채워주겠다. 정말 무엇이든 되어줄 자신이 있었다. 원래라면 형이 주었을 애정을 채워주고자 노력할 수도 있었다. 그게 빼앗은 것을 조금이나마 돌려줄 수만 있다면.

하지만 지금, 도현은 그게 얼마나 멍청한 생각이었는지 깨달았다. 깊은 깨달음이 뇌를 강타했다. 아득한 근원부터 거대한 지진이 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이루는 모든 세계가 뒤집힌다.

아, 그 순간에서야 도현은 두 영혼이 한 존재가 된다는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했다. 그 영혼과 하나가 된 지 오래 지난, 지금에야 겨우.

널 사랑하는 척 군다는 것 자체부터가 틀려먹었다. 애초에 그건 불가능했다. 시야가 조금씩 밝아졌다. 이제야 세상이 제대로 보였다.

언제가 제가 되었든, 결국 나는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게도. 그는 이도현인 동시에 정희성이었으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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