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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450화 (451/582)

제450화. 겨우내 웅크린 (8)

몰랐던 건 아니다.

형의 많은 부분이 제게 영향을 미쳤음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입맛부터 음악 취향, 사소한 습관과 감정까지.

하지만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분리해왔다. 이건 형의 것이라고.

…그래, 도현은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있던 것이다. 그건 형의 것이니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다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감정을 분리하는 행위는 퍽 기이했다. 한데 뭉쳐 일렁이는 감정을 억지로 두 개로 갈라내어, 하나에는 ‘형의 것’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의도적으로 배제한다니. 누가 듣더라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게 멍청한 짓은 잔뜩 해놓고 성공하지도 못했다. 이성적인 척, 합리적인 척은 혼자 다 했으면서 결국 제대로 구분하지도 못해서 혼란스러워하고, 그래서 희운에게 더욱 상처를 주지 않았나.

진짜 한심하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와중에도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곧이어 찾아온 생각에 금방 휩쓸려 사라졌다.

막혀 있던 둑이 무너진 것처럼 생각은 순식간에 쏟아졌다. 의식적으로 외면해왔던 진실이 단숨에 도현을 덮쳤다.

사실, 둑은 오래전부터 부서지고 금이 갔을 것이다. 아마도 희운을 만난 그 순간부터. 그때 가늘게 그어졌던 금은 도현이 멍청한 고집을 부리는 사이 조용히 몸집을 불렸겠지. 그렇게 번지고 번져서, 때가 되어 무너져버린 것에 불과했다.

언젠가는 알게 되었을 진실이라서일까. 도현은 제 몸을 뒤덮은 물길에도 많이 충격받지 않았다. 발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곳에 있는 건 아스팔트로 이루어진 도로가 아니었다. 빛을 조각내어 흩뿌린 것처럼 반짝이는 바다였다. 허벅지까지 차오른 물이 푸르게 찰랑거렸다.

그 속에 반짝이는 것들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하늘에서 추락했던 별똥별들이었다. 그것들은 바닥에 가라앉았음에도 하늘에서와 별반 다르지 않게 반짝거렸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땅과의 구분이 모호했다.

꿈에 반쯤 잠긴 것처럼 아주 느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결국엔 다 나였어.

하늘에 있어도, 물속에 있어도, 결국엔….

【작은 인간! 여기 지금 거리 한복판…. 이런, 안 들리나.】

영혼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너무도 생소한 개념이라, 그저 물려받는 거라고 받아들였다. 형의 기억과 감정, 경험을. 몸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을. 그것들을 모두 물려받아서 함께 사는 거라고….

그게 아니었어.

하나에 하나를 더해서 두 개가 되는, 그런 단순한 셈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건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맞닿아 있었다. 도현은 드디어 영혼이 ‘하나’가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세상에 대가 없는 결과는 없다.

도현은 지금까지 제 생존의 대가가 흐려지지 않을 그리움이라 생각했다. 그 또한 맞는 말일 테지만, 세계가 도현에게 진정으로 요구한 대가는 따로 있었다.

나의 영혼.

다른 존재의 영혼을 받아들였으면, 나 또한 나의 영혼을 그만큼 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순리였다. 도현은 형의 영혼을 받아들인 만큼, 자연스럽게 제 영혼을 내어주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것을 빼앗고 빼앗아 두 영혼을 구분하기 어려워졌을 때. 더는 본질적으로 정희성이라 부를 수 없고, 도현이라고도 부를 수가 없을 때. 그때 영혼이 비로소 하나의 존재로 치부되는 것이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은 정희성도, 이도현도 될 수 없으며, 동시에 정희성이자 이도현인 새로운 존재일 것이다.

그게 세계가 도현에게 요구한 대가였다. 그것을 거부하고 외면한 결과는 희운이었고.

아아, 생각이 점점 더 명료해진다. 주인의 억지에 섞이지 못했던 것들이 비로소 섞여 들어간다. 그 낯선 감각을 도현은 기꺼이 감내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도현은 세상이 한층 더 선명하게 보임을 느꼈다. 머릿속이 그 어느 때보다 깨끗했다. 세상이 이렇게 생겼구나. 새삼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는데 문득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이런 곳에 있었던가?

도현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풍경을 훑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 바닥에 지저분한 담배꽁초가 버려진 좁은 골목이었다.

“내가 언제 이런 곳에….”

【내가 데리고 왔다, 어휴!】

“어…?”

도현의 눈이 점점 커지다가, 이내 반가움이 들어찼다.

“덩어리 님!”

【부르지 마. 사고 제대로 칠 뻔한 작은 인간아!】

“사고요…?”

어리둥절한 낯에 덩어리는 속이 터진다는 듯이 설명을 시작했고, 이어지는 말에 도현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내가 거리 한복판에서 저쪽 세계로 넘어갈 뻔했다는 말이지. 그 탓에 거리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렸고?

도현이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순리에 발을 담그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지는 잘 몰랐다. 그저 위화감을 느끼겠거니, 하는 중이었다.

인터넷에 ‘오늘 이도현 봤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고 경외감이 들었음… 나 미친 거냐?’ 하는 글이 올라오는 걸 알 리가 없는 도현은 씩 웃었다.

“덩어리 님이 도와주셨으니 됐죠.”

【허?】

“이렇게 봐서 좋네요. 덩어리 님도 좋죠?”

얘가 언제부터 이렇게 능청거렸더라. 덩어리는 잠깐 말문이 막혔으나, 곧 위화감을 느끼곤 몸을 일렁였다. 그는 금방 도현에게서 일어난 변화를 알아챘다.

【너….】

그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걸 느낀 도현은 입술을 부드럽게 당겨 올렸다. 행복한 것 같으면서도 슬픈 것 같은. 어딘가 경계가 모호한 미소였다.

도현은 무언가를 곱씹듯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아주 느리고도 천천히 말했다.

“변화는 늘 갑작스럽더라고요.”

형을 만났을 때도, 잃었을 때도, 그리고….

“이번에도 그렇네요.”

누구보다 순리에 가까운 조율자는 그 말뜻을 쉬이 이해했다. 형체를 가지고, 생을 소유한 것들은 늘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닥뜨린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그 변화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생명이었다.

변화를 거부하며 정체되어 있던 작은 인간은 수많은 것에게 등을 떠밀렸다. 어느 순간에는 누군가 부드럽게 밀어준 손에 의해서, 어느 순간에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나아간 걸음에 의해서. 그렇게 가야 할 곳으로 나아가다가 비로소 있어야 할 곳에 도달하고야 마는 것이다.

동시에, 조율자는 그것이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알았다.

어떤 생명은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머무른다. 제 허물을 벗지 못해 껍질 속에서 폐사하는 바닷가재처럼, 그 안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비로소 완벽히 하나로 얽힌 영혼이 눈앞에서 아른아른 흔들렸다. 조율자조차 처음 보는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푸른 바다에 비친 붉은 노을 같았다. 그것은 끝없이 맥동하며, 흘러가고, 생명력을 내뿜었다.

한 차원에 불안정한 영혼이 두 개나 있는 것도, 그 두 개가 융합된 것도 전례 없는 일이다.

작은 인간은 조율자가 무엇이든 알고 있다 여기겠지만, 그 또한 순리의 일부일 뿐이었다. 정희성과 작은 인간에게 일어난 현상은 그의 이해조차도 넘어선 영역이었다.

조율자는 과거 인간의 개념에 따라 작은 인간의 영혼을 ‘보수’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실제로 해진 옷을 깁듯이 정희성의 영혼을 이곳저곳 채워 넣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대로 빈 공간을 메워주나 싶었는데….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건 전혀 다른 결과였다. 그리고 이것을 만들어낸 건, 고작 십여 년을 산 저 작은 인간이었다.

그걸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누구보다 순리에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에 이 순간이 무척이나 강렬하게 다가와, 전율토록 만들었다. 그는 두 영혼이 만난 것도, 자신이 두 영혼을 발견한 것도, 호의를 베푼 것도, 그 모든 물줄기가 바로 이것을 향해 있었음을 바로 이해했다.

이 거대한 바다를 이루기 위해서.

【이번 겨울은 아프지 않겠구나.】

“…네.”

세계는 영혼을 편애하지 않는다.

세계에 있어 영혼이란 잠깐 뭉쳤다 흩어지는 것. 지나가는 바람을 붙잡고 의미를 두는 생명은 없듯이, 세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만약 세계가 사랑하는 영혼이 있다면… 지금 눈앞의 영혼일 게 분명했다. 아니, 이미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지. 모든 것을 방관해야 할 조율자조차 한 영혼에 이끌려 주위를 맴돌고 있으니.

“나를 떠날 건가요?”

미진한 음성이 공기 속에 녹아들었다.

도현은 검은 눈을 들어 올려 본래라면 볼 수 없을 존재를 바로 응시했다.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시선은, 생명체라고 부르기 어려운 덩어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경이로운 영혼에 압도되어 침묵하는 사이 도현이 상당히 평온한 태도로 말했다. 빛을 잡을 수 없다는 걸 알 텐데 일렁이는 빛에 손을 뻗어 허공을 툭 건드린다.

“떠나지 마세요.”

인간의 기준으로는 꽤 오랜 시간 인간을 지켜봤던 덩어리는 알았다. 작은 인간은 늘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대부분의 것은 속에 갈무리한 채 극히 일부분만 보여준다.

그가 이름을 받아들인 정희성의 영혼과 하나가 되었기에, 덩어리는 도현의 속마음을 읽어낼 수 없었다. 다른 평범한 인간들처럼 저 표정과 몸짓, 말투에서 진실을 추려낼 뿐이었다.

“저는 늘 혼자였는데, 언제부턴가 혼자가 아니더라고요. 이젠 그게 너무 익숙해져서 혼자가 되는 건 낯설 거 같아요.”

그러니까, 저 평온은 꾸며낸 것이다. 덩어리를 붙잡고 싶으면서도 그것이 곤란한 일이 될까 봐. 혹은 이게 마지막 순간이 된다면 후회하지 않도록.

“줬다가 뺏는 게 제일 나쁘대요.”

도현이 슬쩍 말을 뱉었다.

덩어리가 아무런 말도 없자 조금 숨을 삼키더니, 천천히 내쉬며 설득 조로 말했다.

“저는 아직 불안해요. 전 인간의 기준으로도 열네 살밖에 안 됐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어요. 아직 이번 겨울을 멀쩡하게 보낼 수 있는지 확실하지도 않고요.”

이성적인 척하고 있지만, 눈동자는 힘없이 떨렸다.

“원한다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좋아요. 덩어리 님도 알다시피, 저희 한동안 보지 않았잖아요. 하지만 저는 잘 지냈고요. 그렇게 지낼 수 있어요. 더 많은 것을 바라진 않을게요.”

처음부터 그리 시작한 관계였다.

불안정한 영혼이라서 만났으며, 이후에도 그것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라 돌보아 주었다. 생각보다 일찍, 조금 많이 일찍 해결되었으나 도현과 덩어리 사이의 암묵적인 계약에 따르면 덩어리는 떠날 때였다.

“다만 영영 떠나지는 마세요.”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작은 인간은 덩어리를 붙잡고 있었다.

덩어리는 작은 인간이 손을 쭉 펼쳤다가, 작게 오므리고, 손등에 핏줄을 세우며 꽉 쥐는 것을 보았다. 작은 인간은 저렇게 종종 얼굴 말고 다른 곳으로 제 감정을 표현하곤 했다.

지나가는 바람에 의미를 두고 붙잡으려 하는 존재는 없다.

없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러한 것들이 있는 법이었다. 바람을 타고 제 터전을 찾아가는 민들레 홀씨나, 다정한 바람에 위로를 얻는 존재들. 그렇다면 그게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덩어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가 그 누구도 인지하지 못하는 조율자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덩어리’라고 인지되고 그렇게 불린 순간. 그때부터 어떠한 변화는 일어나고 있던 것이다.

【그래, 작은 인간. 네 말이 맞다. 아직 안심하고 떠나긴 이르지.】

검은 눈동자에 빛이 차올랐다. 수많은 별이 그 안에 수놓아진 것 같았다. 두 눈은 분명히 하나의 우주를 품고 있었다. 덩어리는 자신이 저것을 거부할 수 없음을 천천히 이해했다.

“계속 있어 줄 건가요?”

【겨울이 지나 민들레가 피기 전까진.】

“그 후에는요?”

글쎄.

덩어리도 그 후는 알 수 없었다.

이미 그는 변화를 맞이하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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