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1화. 겨우내 웅크린 (9)
“……!”
평소처럼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한설아는 그대로 굳었다. 지난 일주일간 텅 비어 있었던 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도현이 앞문을 쳐다보았다. 한설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너, 이도현?”
생각을 거치기 전에 나온 말이었다. 저렇게 생긴 게 이도현 말고 또 있을까 싶었지만….
‘뭐지?’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까.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몇 달 동안 촬영 다녀왔을 때도 이러진 않았는데…. 한설아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응. 나 이도현인데.”
도현이 의자에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살짝 기울어진 자세로 그녀를 쳐다보는 모습이 어딘가 방만했다. …방만?
이도현과 방만이 성립되는 단어인가?
“벌써 잊은 거야? 서운하다, 설아야.”
…뭐야. 쟤 누군데…?
한설아의 표정이 몹시 괴이해졌다. 2반은 한 학기에 한 번 앉은 자리를 바꾸었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두 번이나 연속해서 도현과 같은 자리가 되었다. 일 년째 옆자리란 소리였다.
그 시간은 멀고도 가까운 할리우드 출신 친구를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한설아는 점점 더 도현에게 익숙해졌고, 이젠 정말 친한 친구라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위화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뭐 해. 계속 서 있으려고? 다리 아프잖아. 와서 앉아.”
그러면서 매너 좋게 한설아의 의자를 빼준다. 다른 또래의 남자애들한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면모였다. 솔직히 도현이 아닌 다른 애가 저런다면 소름이 끼칠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저러는 걸 보면 그냥 평소랑 같은데….
내가 잠깐 예민했나?
한설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책상 옆에 가방을 걸어둔 한설아는 옆을 돌아보았다. 한설아가 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책상에 턱을 괴고 있던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순간적으로 한설아는 숨이 턱 막혔다.
별것 아닌 광경이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매일같이 보던 풍경.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근데 왜 자꾸 무언가 달라진 거 같을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흩트렸다.
“왜?”
“아, 아니…. 너 괜찮아?”
“나?”
한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등교를 안 하는데 선생님도 모른다고만 하시고, 너는 연락 안 받고. 혹시 무슨 일 생긴 건 아닌가 해서….”
“아아.”
도현의 표정이 묘하게 물들었다.
“무슨 일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음, 근데 네가 걱정하는 건 싫으니까 그냥 없다고 할게.”
없는 것도 아니고, 없다고 한다고.
한설아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묘하게… 아니, 사실 대놓고 찝찝한데, 또 자신이 걱정하는 게 싫다니까 따져 물을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물었다가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이야기가 나오면 곤란하기도 했고.
한설아가 이도 저도 못 하며 입술만 뻐끔거릴 때였다.
슬쩍 그녀의 얼굴을 살핀 도현이 미미하게 웃었다. 즐거움보다는 미안함이 두드러졌다.
“연락 안 받은 건 미안해. 그럴 정신이 없었어.”
…아. 한설아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제 앞에 앉은 소년을 훑어보았다. 까만 머리카락, 더 새카만 눈동자. 낮보다는 이른 오전이나 새벽이 더 어울리는 고요한 미소.
내가 아는 이도현이네.
정말로, 그녀가 알던 이도현이었다. 그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반 아이들이 속속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무념무상으로 월요일을 저주하며 교실에 발을 들였다가, 도현을 발견하고 놀라기를 반복했다.
일주일간 말도 없이 잠적한 도현은 여러 차례 보복당했다. 그래도 자신의 죄를 아는지 아이들의 구박과 잔소리에도 고개를 연신 끄덕이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 후로 반은 이전처럼 돌아갔다.
적어도 겉으론 그렇게 보였다.
흘끔, 흘끔.
사방에서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잠적의 영향이라고 하기엔 조금 더 집요하고, 조금 더 깊은 호기심을 담고 있었다. 그들도 의식하고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2반의 마스코트, 김병철은 심각한 낯으로 고민했다.
‘왜 자꾸 시선이 저리로 가지?’
허물없는 태도와 정신 나간 행동으로 종종 오해를 사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선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는 스스로 조금 스윗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갑작스러운 잠적 이후 컴백한 친구를 모른 척해 줄 정도의 배려심은 갖춘 것이다. 분명 그럴 텐데….
‘왜 자꾸 시선이 저리로 가냐고!’
눈을 부릅떠서 앞으로 고정해봐도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넙치처럼 옆으로 향해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김병철은 본능을 거스르기를 포기하고 그냥 대놓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사각사각 필기를 하고 있던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도현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왜? 입 모양은 읽기 쉬웠다.
바로 이해했지만, 김병철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공. 부. 해. 입을 달싹이며 의사를 전달하는 도현에 김병철이 고개를 휘저었다.
그게 장난이라 생각했는지 도현이 작게 웃었다. 그리곤 못 말리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한다. 평범한 몸짓인데도 도현이 하면 어딘가 특별해 보였다.
김병철을 무시하기로 결정한 건지, 도현은 다시 필기를 시작했다. 그는 이제 방해 없이 도현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어깨를 구부정하게 말거나 졸음에 못 이겨 고개를 꾸벅거리는 아이들 사이에서 홀로 바르게 앉은 소년은 유독 눈에 띄었다. 사실 거기까지는 특별할 게 없었다. 입학 때부터 저랬으니까.
이젠 도현이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거나 졸고 있으면 굿부터 할 게 분명했다. 그건 이도현이 아니라 이도현인 척하는 무언가일 테니까!
예를 들어 귀신이라거나, 귀신이라거나, 귀신 같은…. 거기까지 생각하던 김병철이 멈칫했다. 며칠 전에 보았던 게시글이 생각난 탓이었다.
[오늘 이도현 봤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고 경외감이 들었음… 나 미친 거냐?]
뜬금없이 올라온 한 게시글은 사람들의 주목을 모았다. 처음엔 비웃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도 도현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증거 사진까지 올라오며-물론 도촬이었다- 일은 더욱 커졌다.
김병철 또한 그 사진을 보았다.
고층 건물이 즐비한 인도였다. 그 속에서 도현은 혼자 다른 세계에 뚝 떨어진 사람처럼 정지해 있었다. 무언가를 보고 있는 거 같았는데, 그 시선이 향한 방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ㄷㄷ 난 좀 무서운데… 귀신 보는 거 아님?
- 저러고 삼십 분 동안 서 있었다고? 근데 왜 사인을 안 받음?
⌞ 네가 저기 있었으면 너도 못 받았을걸;; 진짜 보면서 말 걸어야겠다는 생각조차 안 들었어.
오버한다고 조롱하는 댓글도 많았지만, 그 말에 동감하는 댓글도 많았다. 그만큼 그 사진은 뭔가 기이했다. 기이, 기묘. 그게 김병철이 부족한 어휘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였다.
‘진짜 귀신 보나?’
그는 본래 오컬트를 그리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 대상에 도현을 대입해보니 그럴듯했다. 애초에 ‘8살에 베니스 수상하고 할리우드 스타 되기’ vs ‘귀신 보기’로 비교해보면 후자가 더 현실성 있지 않은가?
그런 이유로 김병철은 도현이 갑자기 ‘나 사실 신기 있어’라고 고백해와도 그리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니, 근데 그러진 않았으면 좋겠다. 이도현이 그러면 진짜로 귀신이 있을 거 같아서 무서웠다.
김병철은 의심 반, 두려움 반의 시선으로 도현을 관찰했다. 일단 지금은 귀신을 보고 있는 것 같진 않은데….
그보단 그냥 나른하고 귀찮아 보였다. 일주일 동안 밀린 필기를 옮겨 적으면서, 지루해하는 하얀 낯이 눈에 띄었다.
쟤도 귀찮은 일이 있구나.
새로운 발견에 김병철은 꽤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림으로 찍어 놓은 듯한 모범생인 줄 알았는데…. 저 이도현도 결국 사람인 것이다.
갑자기 급격히 친밀감이 솟은 김병철은 실실 웃었다. 이도현이 귀신을 보든 신기가 있든, 결국 제 친구에 불과하단 걸 떠올리니 마음이 편해진 것이다.
김병철은 잔뜩 틀었던 몸을 바로 하고 책상 위에 엎드렸다. 너무 집중했더니 졸렸다. 잠깐만 자고 일어나야지…. 가물가물 정신이 흐려지다가 이내 암전했다.
그렇게 누군가는 변화하고. 누군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변화를 받아들이며, 또 다른 하루가 지나갔다.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 * *
도현이 돌아온 후 시간은 급격히 흘러갔다. 주말에는 여전히 <왕의 길>이 방영됐고, 학교는 기말고사로 인해 조용해졌다. 도현의 돌발 행동도, 기묘한 목격담도 시간이 흘러 잠잠해졌다.
그 모든 게 끝나갈 즈음.
“네?”
“시험도 다 끝났으니… 지금이 적기인 것 같아서.”
도현은 경찬호의 말에 제 앞에 놓인 기획서를 다시금 확인했다. CF 기획서는 제 존재감을 뽐냈다.
이 상황을 예상치 못한 건 아니었다. 정희운을 데려오는 조건이 그거였으니까.
“혹시 싫어?”
경찬호가 조심스레 도현의 눈치를 보았다. 그들의 거래 조건으로 이미 논의된 사항임에도 경찬호가 조심스럽게 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도현이가 확보한 녹취록 덕분에 일이 쉽게 끝났지.’
그랬다. 그들은 법적 공방까지 예상하며 도현에게 이것저것 조건을 달았는데, 정작 일이 너무 쉽게 끝나버린 것이다.
그렇다 해서 그때 했던 말을 물릴 생각은 없지만… 눈치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한결 대표도 같은 생각인지 도현의 편의를 최대한 맞추라고 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 싫다기보단….”
도현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제가 이걸 해도… 괜찮을까요?”
“음.”
경찬호도 도현의 시선을 따라 종이를 보았다. 거기에 굵게 쓰인 글씨가 유독 시선을 사로잡았다.
[닥터 디 에브리데이 로션]
“으음….”
경찬호의 낯에도 곤란함이 떠올랐다.
그랬다.
이번에 도현에게 온 광고는 다름 아닌 화장품 광고였다.
‘여러모로 파격적이지….’
아무리 색조 라인이 아니라고는 하나, 보통의 경우 아역 배우를 모델로 세우지는 않는다. 아예 어린 모델을 데리고 와서 훈훈한 가족의 모습을 찍으면 모를까….
그것도 파격적인데, 도현은 소년이었다. 보통 이런 화장품 광고에서 여자 연예인을 내세운다는 걸 생각해보면, 여러모로 새로운 시도였다.
“광고면 매출을 올려야 하는 건데… 제가 그런 면에서 도움이 될까요?”
제안한 건 저쪽이니 그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다만 도현의 성정을 아는 경찬호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제 아티스트를 판단해 보았다.
곤란한 듯 살짝 찌푸린 눈매 아래로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형광등 아래에서도 굴욕 같은 건 없는 피부는 도자기처럼 매끄러웠다.
경찬호는 생각했다.
…될 것 같은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