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52화 (453/582)

제452화. 겨우내 웅크린 (10)

가는 선율이 희미한 잔향을 남기며 흩어졌다. 그 여운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던 도현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파가니니 카프리스 Op 1, 24번.

열 한 개의 베리에이션은 가는 손끝에서부터 화려하게 피어났다. 고작 5분 길이의, 그다지 길지 않은 연주였으나 끝나고 나니 온 기력을 쏟아부은 것처럼 탈력감이 일었다.

‘확실히 전보다 늘었어.’

이전보다 정교해진 음색들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마치 양손에 달아놓았던 모래주머니가 사라진 것처럼 연주하는 내내 자유로웠다.

그러나 그 대단한 연주를 해낸 도현의 눈동자는 불만에 차 있었다. 여전히 부족하다. 어떻게 해야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있는지 아는데 신체가 따라주질 않아서 답답했다.

조금만 더.

더 정교하게, 더 화려하게, 더 강렬하게.

누르기 어려운 욕심이 치솟았다.

이미 네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바이올린을 연주했으면서 또다시 활을 잡았다. 다시 한번 시작되려는 연주를 멈춰 세운 건 침대 위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이었다.

도현의 미간이 불만으로 찡그려진다. 무시하고 연주하려 했으나, 한번 끊겼던 진동이 다시금 울리기 시작하자 한숨이 새어 나왔다.

결국 바이올린을 정리하고 핸드폰을 열었다. 약간은 불만스러웠던 얼굴은 발신인을 보자마자 풀려버렸다. 겨울에서 봄으로 단숨에 건너뛰어, 온화하게 누그러진 목소리가 상대를 불렀다.

“니키.”

- 엉. 뭐 하고 있었냐.

“바이올린 켜고 있었어.”

- 바이올린? 지금 하고 있던 거야?

“응.”

오, 짧게 감탄한 니콜라스가 말했다.

- 나도 들을래.

니콜라스는 다른 또래에 비해서 클래식에 박식하고, 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도현이 진의 추천으로 핸드폰 플레이리스트를 채운 것처럼, 니콜라스도 도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가 수영이라는 전혀 다른 분야에 집중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약간은 신기한 일이었다. 도현은 웃으며 친구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핸드폰 음질을 통해 전해지는 거니 화려한 연주는 필요 없었다. 잠깐의 여흥을 돋우는 정도면 충분했다.

- 아, 뭐야!

익숙한 멜로디에 니콜라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도현이 선택한 곡은 모차르트의 작은 별 변주곡이었다. 중간중간 즉흥적인 변주를 섞어가며 연주하자 니콜라스가 재밌어했다.

- 그거 연습하고 있었어?

“아니, 다른 거.”

- 그것도 들려줘.

“그건 나중에. 직접 들려줄게.”

- 뭐? 너 이번 겨울에 여기 안 온다면서.

“그렇지. 그래도 안 돼.”

예전에는 완성되지 않은 연주를 들려주는 것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상대가 누구든, 청중이 존재하는 이상 가장 완벽하게 다듬은 연주를 선보이고 싶었다.

- 뭐야….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도현이 작게 웃었다.

“대신에 재밌는 거 알려줄게.”

- 뭔데?

“나 광고 찍어.”

- 광고? 너 그런 거 잘 안 하잖아. 관심 없는 거 아니었어?

정확히 꿰뚫어 본 말이지만, 도현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면 광고를 찍게 된 사정까지 말해야 하는데, 굳이 친구를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 도현이 가만히 웃음을 흘리자 니콜라스가 물었다.

- 무슨 광고인데?

“화장품 광고. 그러니까 로션….”

- 푸흡!

뭔갈 뿜는 소리가 들렸다. 니콜라스는 잠깐 켁켁거리더니, 곧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따라 웃었던 도현도 니콜라스의 웃음이 길어지자 표정이 미묘해졌다.

- 흐흐하하학!

그러다 숨넘어가겠다.

도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수영으로 늘린 폐활량을 이런 식으로 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만 웃지?”

- 프흐, 흐흑….

웃지 말라니까 이젠 숫제 흐느낀다.

“그게 그렇게 웃겨?”

- 그럼 안 웃기겠냐?

물론 재밌어 하리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즐거워하니 슬슬 기분이 이상해졌다.

“왜?”

- 왜냐니?

“너 예전에 내가 앨리스보다 예쁘다고 했다며.”

앨리스는 한때 델마 아카데미에서 그 미모로 명성이 드높았던 미소녀였다. 도현이 들춘 과거에 니콜라스가 기겁했다.

- 내, 내가 언제?!

“진한테 다 들었어.”

정확히는 왜 앨리스보다 예쁜 애가 남자인 거냐는 한탄이었지만.

‘그게 그거지.’

- …아씨, 그때 눈이 삐어서 그랬어! 그리고 그땐 귀엽기라도 했지, 지금은 징그럽거든?

징그럽다니.

도현의 얼굴에 불만이 떠올랐다.

“그럴 리가. 그때나 지금이나 난 여전히 귀여워.”

- 너… 미쳤냐?

진심이 한가득 묻어난 목소리였다.

- 너 어디 아파? 열나는 거 아니야? 약은 먹었어?

“……”

그게 이렇게까지 기겁할 일인가.

도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거울을 보았다.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소년은 아직 덜 자라 젖살이 남아 있었다. 그 아래로 뻗은 목은 곧았고, 성장 중인 어깨에선 풋풋함이 묻어났다.

그날 이후로 몇 가지 소소한 변화가 생겼다.

본래 도현은 자신을 잘생겼다거나 예쁘다고 여겨본 적이 없었다. 병자였다는 걸 증명하듯이 흰 피부는 힘이 없어 보였고, 날카로운 이목구비는 비호감이었다. 종종 저에게서 병실의 약품 냄새가 묻어나는 거 같아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사실 창백한 피부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단사처럼 보기 좋게 어두운 피부면 지금보다 더 건강해 보일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하지만 이전처럼 진저리를 칠 만큼 싫지는 않았다.

눈매는 너무 날카롭지만, 입꼬리가 살짝 위로 말려 올라가 있어서 그렇게까지 차가워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또 눈꺼풀의 움직임에 따라 살랑거리는 긴 속눈썹은 날 선 분위기를 중화해 주었다.

도현은 스스로를 ‘나쁘지 않다’로 결론 내렸다. 물론 그와 별개로 니콜라스는 괘씸했다. 그게 그렇게까지 경악할 일은 아니잖아.

“진짜야. 내가 지금 거울 보는 중인데, 여전히 귀여워.”

- 미친.

“그럼 귀여운 나는 일하러 갈게. 다음에 또 연락하자, 안녕.”

- 잠깐, 도리토ㅅ…!

도현은 사정없이 통화를 종료했다. 이후에 핸드폰이 울린 것 같았으나 가볍게 무시했다. 일하러 가야 한다는 말은 진짜였으니까.

도현은 적당히 두께감 있는 겉옷을 걸쳐 입고 핸드폰을 들고선 방을 나섰다. 매니저 형이 어디까지 왔나 전화해 보려던 도현은 핸드폰 상단에 뜬 메시지에 픽 웃고 말았다.

[야… 너 진짜 아픈 거 아니야? 죽을병 걸린 건 아니지? 아프면 빨리 병원을…]

긴 메시지에 바람 빠지듯이 웃은 도현은 가볍게 답장을 쳐서 보냈다. ‘^^’라는 답장을 받은 니콜라스가 다시금 물음표를 찍어 보냈지만, 고민 없이 뒤로 가기를 눌렀다.

때마침 집에 도착한 매니저 형이 벨을 눌렀다. 도현이 현관으로 나가니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부모님도 따라 나왔다.

“잘하고 와.”

“네, 그럴게요.”

이장혁의 말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혜나가 물었다.

“저녁 전에는 들어오지?”

“그럴 거예요.”

“그럼 저녁은 집에서 먹을까? 아니면 외식하고 싶어?”

“음….”

도현의 시선이 그늘진 서혜나의 눈가에 닿았다. 그녀는 회사 일이 바쁜 것인지 최근에 자주 피곤해했다.

“집에서 시켜 먹어요. 치킨 먹고 싶어요.”

“그래, 그러자.”

도현은 두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마당을 지나 대문 밖으로 나오자, 익숙한 검은색 차가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가며 인사를 건네자, 핸드폰을 톡톡 두드리고 있던 경찬호가 인사를 받아주었다.

“안전벨트부터 매고.”

“가는 데 얼마나 걸려요?”

“음… 보자. 안 밀리면 40분?”

“노래 틀어도 될까요?”

“좋지.”

드뷔시의 연주와 함께 차가 출발했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줄기처럼 유려하게 이어지는 선율에 경찬호는 핸들을 쥔 손을 까딱거렸다.

“요즘 클래식 많이 듣네?”

도현은 보통 이것저것 트는 편이었다. 대중가요부터 팝 음악을 넘어 브리티시 락까지. 그런데 요즘 도현이 트는 노래는 클래식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조금 달라져도 뉴에이지나 재즈 정도일까.

“이게 제일 취향에 맞아서요. 익숙하기도 하고.”

“그래? 특이하네.”

“그런가요?”

그 나이대 애들은 특별함에 집착하는 법이었다. 누구보다 돋보이길 원하는 시기기도 했다. 그러나 도현은 그런 것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도현은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댄 채 창밖을 응시했다. 나무가 보이는가 싶더니 건물이 지나가고, 이내 그 모든 게 멀어진다. 풍경을 그리도 빠르게 변화했다.

도현은 자연스럽게 상념에 잠겨 들었다.

변화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영혼이 하나가 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거나, 아예 낯선 존재로 변모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당연했다.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있었을 뿐, 두 영혼은 한데 뭉친 그 순간부터 구분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건 아니었다.

‘메리가 좋아하겠네.’

메리는 도현이 강박증을 앓고 있다고 설명했다.

도현의 성격도, 태도도, 방어기제도, 근원적으로는 모두 강박에서 기인했을 거라고. 그러니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해지지 말라고 충고했다.

메리는 유능한 상담사였고, 도현은 그녀를 신뢰했다. 그래서 그녀의 충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다만 이성과 합리를 통해 동의했을 뿐이지, 가슴 깊이 공감하지는 못했다.

그걸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 건 영혼이 하나가 되었을 때였다. 그때 도현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칭칭 묶어놓은 밧줄이 느슨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홀가분함이었다.

‘형과 나를 구분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은 결과는 놀라웠다. 어려운 문제처럼 느껴졌던 일들이 무척이나 단순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서 정희운의 존재라거나, 형의 기억 같은 것들이.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 자연스럽게 인정하면 된다. 그렇게 해서 흘러가는 게 있다면 가도록 놓아주고, 곁에 머무는 게 있다면 붙잡으면 된다. 이토록 쉬웠다.

이토록 간단했다.

여린 숨결을 내뱉은 도현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풍경이 보이는 시간보다 세상이 검게 물드는 시간이 더욱 길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릴 때였다.

“졸리면 자도 돼. 도착할 때 깨워줄게.”

도현이 피곤해하는 걸 눈치챈 경찬호가 부드럽게 말했다. 도현은 그의 배려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럼 잠깐 눈 좀 붙일게요.”

아까 잠깐 연주한다는 게 너무 길어진 탓에 몸이 무거웠다. 이대로 촬영에 들어가는 것보단,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 일어나는 게 나을 것이다.

나름 합리적이라 생각한 사고 끝에 도현은 눈을 감았다. 드뷔시의 전주곡, 아마빛 머리의 소녀가 점점 멀어졌다. 도현은 제게 뻗쳐오는 수마를 거부하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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