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53화 (454/582)

제453화. 겨우내 웅크린 (11)

CF 피디는 카메라를 점검했다.

이미 한 차례 점검을 마치긴 했지만, 자꾸만 뭐 이상한 것은 없는지 찾아보게 되었다.

사실 그는 조금 들뜬 상태였다.

‘모델이 이도현이니까.’

이 바닥은 넓어 보여도 사실 굉장히 좁았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쉽게 나도는 곳이기도 했다. 도현이 온갖 화보며 CF를 줄줄이 퇴짜놓았다는 정보도 당연히 이미 알 사람은 다 알았다.

탑 클래스의 연예인들도 자신의 인별에 홍보 게시글을 올리는 시대에 도현의 행보는 다소 특이했다. 하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걸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도현의 그런 면이 할리우드 배우라는 특이성과 합쳐져, 하나의 희소성이 되었다. 배우 쪽에서는 퇴짜를 놓는데 기업체에서는 러브콜을 보내는 재밌는 상황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 이도현이 CF를 찍는다.

심지어 한참 논란이 일었다가 해명이 되고, ‘왕의 길’에서 압도적인 연기력을 선보여서 그 주목도가 천장으로 치솟은 시기에.

지금 이도현이라는 패는 조커나 다름없었다.

왕의 길은 여전히 인기리에 방영 중이고, 성인 배우들은 극의 재미를 잘 이끌어나가고 있지만, 그와 별개로 사람들은 아역 배우를 그리워했다.

‘뭘 하든 이기는 게임이지.’

만약 왕의 길의 인기가 추락한다면, 초반에 호평을 끌어냈던 도현의 뛰어난 연기력이 주목받을 것이다. 반대로 왕의 길의 인기가 유지되거나 치솟는다면, 그 관심은 계속해서 도현에게까지 이어질 것이다. 낙숫물 효과처럼.

그러니 이 시기에 이도현이라는 존재는 성공을 보장 수표, 그 자체였다. 모르긴 몰라도, 광고주들의 눈에는 아주 달콤한 디저트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니 그는 잘 찍기만 하면 됐다.

‘별로 걱정은 안 되지만.’

그가 광고 쪽에 몸을 담고는 있으나, 도현의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들어보았다. 그 소문 속의 주인공은 신의 편애를 한 몸에 입고 태어난 사람처럼 완벽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번 일이 그에게 들어온 건 다시 생각해봐도 행운이었다.

그때, 촬영장의 문이 열렸다.

윤 피디는 물론, 세트장을 돌아다니던 스태프들의 시선이 문 쪽으로 쏠렸다.

먼저 들어온 사람은 장신의 남자였다. 윤 피디도 그를 본 적이 있었다. ‘전지적 참견쟁이들’에 나왔던 이도현의 매니저였으니까.

그다음으로 그들이 진짜 기다리던 이가 들어왔다.

윤 피디가 눈을 깜빡거렸다.

‘꽤 크네?’

물론 프로필을 받아서 도현의 키는 알고 있었다. 프로필상 도현의 키는 172cm였으니까. 그때도 작은 키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 달 뒤에 15살이 되는 나이임을 고려하면 상당히 큰 축에 속했다.

다만, 그가 지금 놀란 이유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커 보여서였다.

‘원체 얼굴이 작고 몸의 균형이 잘 잡혀 있어서 그런가.’

시원시원하게 쭉쭉 뻗는 다리나, 균형감 있는 어깨너비 같은 걸 보다 보면 170 초반대가 아니라 중후반대처럼 느껴졌다. 몸에 두른 성숙한 분위기가 그런 느낌을 더욱 부각하는 것도 같았다.

“안녕하세요.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

정중한 인사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그러나 윤 피디는 작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목소리도 좋지.’

잘생겼는데 키도 커. 근데 비율도 좋아. 거기까지만 해도 세상의 불공평함은 혼자 다 가졌으면서 목소리까지 좋다.

도현이 숙였던 고개를 들자 새카만 눈동자가 보였다. 몇몇 원숙한 배우들에게서 볼 수 있는, 깊이와 무게가 있는 시선이었다.

‘거의 뭐… 연예인 하려고 태어났네.’

그게, 배우 이도현을 처음 본 감상이었다.

잠시 후.

도현은 촬영 의상을 갈아입고 나왔다. 의상이라고 해도 별 건 없었다. 오프화이트 색상의 빳빳한 와이셔츠와 진회색의 슬랙스는 평상복이래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과도하게 깨끗해서 때가 탈까 두려워지는 부분을 제외한다면.

의상을 갈아입고 나서는 평소보다 공들인 화장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기초 케어 제품 광고다 보니 피부 표현이 제일 중요했다. 깨끗하면서도, 화장한 것처럼 두텁진 않게 하는 게 관건이었다.

와,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붓질을 하다 말고 감탄사를 터트렸다.

“피부 화장 안 해도 되겠는데요? 다크서클만 조금 가리면 될 것 같아요. 피부가 어쩜 이렇게 매끄럽지.”

과장을 조금 섞긴 했으나 진심이었다.

보들보들하기보다는 매끄러운 피부였다. 게다가 희기까지 하니, 잘 조각된 석고 조각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눈 밑에 자리한 그늘 정도가 유일한 인간미였다.

“어려서 그렇죠.”

“…어, 보통 그걸 자기가 말하나?”

도현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잠깐 웃음을 터트렸다. 시니컬하게 어려서 그렇다고 말하는 게 조금 재밌기도 했고, 귀엽기도 했다.

한 듯 안 한 듯, 메이크업을 마치고 헤어 스타일링에 들어갔다. 성숙해 보이도록 뒤로 넘길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앞머리가 자연스럽게 이마를 덮는 스타일이었다.

“넘길 줄 알았어요.”

“아, 앞머리요?”

“네.”

“그편이 성숙해 보이긴 하겠지만… 근데 성숙함이 필요했으면 성인 배우를 모델로 썼을 테니까요. 그 나이대 같은 게 제일 예쁘죠. 자연스럽기도 하고.”

“아….”

그녀의 말로 인해서 도현은 이번 촬영의 힌트를 얻었다.

그 말대로였다. 성숙한 이미지가 필요했다면 애초에 도현을 부를 이유가 없었다. 도현은 촬영에 오기 전, 참고용으로 보았던 수많은 CF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렇네요. 고마워요.”

“네? 네, 네.”

모든 준비를 마친 도현은 오늘 촬영을 맡아줄 감독에게로 향했다. 아까 한 번 인사하기는 했지만, 한 번 더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를 건네자 그가 사람 좋게 웃었다.

“하하, 저도 잘 부탁해요. 콘티는 확인했죠?”

“네. 확인했어요.”

“봤으면 알겠지만, 아무래도 장면이 장면이다 보니… 최대한 반복 촬영 없이 끝내는 게 좋거든요. 괜찮겠어요?”

윤 피디는 긴장이 덜 풀렸다면 해당 장면을 뒤로 미뤄도 된다며 친절히 말했다. 도현은 잠깐 고민하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괜찮을 것 같아요. 지금 컨디션 좋거든요.”

아까 차에서 낮잠을 잔 건 좋은 선택이었다. 짧은 수면이 도움이 되었는지, 지금 무척이나 머릿속이 맑았다.

“그래요? 그럼 바로 촬영 들어가도 될까요?”

“네, 괜찮습니다.”

도현의 대답을 들은 윤 피디는 촬영할 장면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도현은 그의 설명을 집중해서 들었다.

그의 설명이 끝나고.

“자, 이제 촬영 들어가 봅시다.”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세트장은 집처럼 꾸며져 있었다.

보통 집이 이렇게 예쁘고 깨끗하지 않다는 건 넘어가고, 아무튼 도현은 현재 화장대 앞에 서 있었다. 도현은 벽에 걸린 커다란 거울과 마주 보고, 카메라는 거울 속의 도현을 촬영하는 구도였다.

윤 피디는 다시 한번 구도를 확인한 뒤 크게 외쳤다.

“레디, 액션!”

그의 신호에 도현이 화장대를 한 손으로 짚고선 거울 속의 자신을 응시했다. 화장대를 짚지 않은 손은 한쪽 뺨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윤 피디는 머릿속으로 이 장면에서 들어갈 나레이션을 떠올렸다.

[피부에 이것도 저것도 다 좋다던데]

독백이 끝날 타이밍에 정확히 맞춰서 도현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카메라 또한 도현의 시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온갖 화장품이 빽빽하게 늘어선 화장대는 무척이나 어지러웠다. 도현의 미간이 자연스럽게 좁아졌다.

“컷, 오케이!”

윤 피디의 외침에 스태프들의 긴장 어린 시선이 도현에게로 향했다. 이다음으로 찍을 장면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찍어야 하는 장면은, 화장대에 어지럽게 놓인 화장품들을 팔로 쓸어서 바닥에 떨어트리는 장면이니까.

한 번에 성공하지 않으면 그 공병들을 일일이 주워서 다시 세팅해야 했다. 몇 번 정도야 괜찮겠지만, 너무 NG가 많이 나면 그야말로 개고생이었다.

“준비됐어요?”

윤 피디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다시금 확인했다.

“네, 됐습니다.”

부담감을 느낄법한데 도현의 태도는 여상했다. 이전의 촬영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태도였다.

그에 몇몇 스태프들은 프로답다고 생각하며 감탄했지만, 한 스태프는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가 치우는 거 아니라 이건가.’

스태프들을 배려하는 연예인들도 많았지만, 하인 취급하는 연예인들도 흔했다. 시선을 의식해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고생을 당연히 여기는 연예인들이 제일 많았고 말이다.

한번 촬영이 끝날 때마다 여러 명이 달라붙어서 치우고 정리해야 하는데, 그런 건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행동하니 좋게 보이지 않았다.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해요. 그럼 촬영 시작합니다!”

그녀의 속마음이 어떠하든, 촬영은 속행되었다.

“레디, 액션!”

외침과 함께 도현의 시선이 화장대에 닿았다. 마스카라 없이도 긴 속눈썹이 한번 팔랑이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팔이 크게 움직였다.

툭, 투두둑!

데구르르, 공병들이 제각각 다양한 방향으로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촬영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에까지 닿지 못했다. 머릿속에 ‘망설임’이란 게 전혀 없는지, 거침없이 쓸어버린 도현이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상황을 채 파악하기 전에, 소년의 입에서 듣기 좋은 미성이 흘러나왔다. 약간은 짓궂고, 약간은 나른한 목소리였다.

“난 복잡한 건 싫거든.”

정확히 카메라를 응시하고 정해진 대사를 읊은 도현이 살짝 웃었다. 얼굴에 가볍게 떠오른 미소는 자신감과 오만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십 대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패기는, 소년 특유의 여유와 맞물려 무척이나 매력적인 방향으로 표현되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스태프 또한 홀린 듯이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응시했다.

감독의 외침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건 통과였다.

그리고 역시나.

“컷! 오케이…!”

오케이 사인이 울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