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4화. 겨우내 웅크린 (12)
컷 사인이 울리고 나니 정신이 돌아왔다.
‘저렇게 망설임 없이 한다고?’
스태프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사람은 이전의 습관이 몸에 깃드는 법이었다. 그리고 도현은 딱 보아도 바른 생활을 영위해왔을 것같이 생겼다. 만약 영국인이었더라면 귀족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런 도현이 아무 주저 없이 책상을 쓸어버렸다. 그 장면만 돌이켜보자면 평소에 자주 해본 것처럼 느껴질 수준이었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촬영 시작 전만 해도 뚱하던 스태프의 낯이 누그러졌다.
‘…그게 그럼, 정말 자신감이었나.’
긴장하거나 불안한 기색도 없길래 스태프의 고생은 생각도 안 하는 줄 알았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이도현은 한 번에 끝낼 자신이 있었던 거다.
스태프의 눈동자에 미안함이 깃들었다. 오해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그녀는 한쪽에서 콘티를 확인하고 있는 도현에게 다가가 음료수를 내밀었다. 도현이 고개를 들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거 마시면서 봐요.”
“아,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본래 타고난 분위기 탓에 표정은 차가워 보이지만, 목소리는 다정했다.
이렇게 착한 애를 왜 오해했을까.
그녀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촬영 힘내요.”
난데없이 응원하고 사라지는 스태프에 도현은 눈을 끔뻑거렸지만, 곧 머릿속에서 지우곤 콘티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런 도현을 집중해서 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부담 갖지 말랬더니 부담 없이 한 번에 끝내 버리네.’
바로 윤 피디였다.
재촬영이 필요한지 판단하기 위해 휴식 시간을 가졌지만, 촬영된 영상은 몇 번을 돌려봐도 더없이 완벽했다. 다시 촬영한다고 해도 이토록 깔끔하게 공병들이 바닥에 떨어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부담이 없었다는 부분에서 맥락이 비슷하긴 한데….’
헛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덕분에 일이 줄어든 스태프들만 화색이 돌았다. 윤 피디는 두어 번 더 영상을 돌려본 후 재촬영이 불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 이건 됐고. 이다음 장면이….’
다음 장면은 CG 처리가 필요한 장면이었다. 도현은 허공에 대고 손을 움직이며 무언가 있는 것처럼 연기해야 했다.
그런 유의 연기는 몇몇 성인 배우들도 어색해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있는 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근데 걱정이 안 된다.
윤 피디는 촬영 시작 삼십 분 만에 무럭무럭 피어나는 신뢰를 느끼며 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촬영 시작해도 되겠어요?”
“네.”
도현이 가볍게 수긍했다. 그는 방금까지 들고 있던 콘티를 잘 정리해두고, 공병이 늘어진 세트장에 다시 가서 섰다. 마지막으로 동선을 한번 맞춰보고 촬영이 재개되었다.
“레디, 액션!”
도현은 엉망이 된 방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카메라는 그런 도현을 비스듬한 각도에서 따라갔다. 세 걸음 정도 걸은 도현이 허공에 두 손을 들어 올린 후, 무언가 압축하듯이 사이를 좁혔다.
[복잡한 성분은 줄이고]
도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장면에서는 유해한 성분이 비눗방울처럼 도현의 주변을 감싸는 CG가 들어갈 예정이었다. 둥둥 떠다니는 유해 성분을 보던 도현이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바람에 살랑이는 커튼과 함께 유해 성분들이 날아간다.
[유해한 성분은 없애고]
창문 밖에 설치해둔 선풍기가 바람을 일궈냈다. 두 손바닥으로 창틀을 짚은 채 풍경을 구경하던 도현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가는 머리카락이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거렸다.
역광이었지만, 환한 조명 덕에 얼굴은 잘 보였다. 오른뺨과 목덜미, 그리고 흰 와이셔츠에 비친 햇빛이 유려한 수채화를 완성해냈다. 이대로 로션 광고가 아니라 세제 광고를 해도 될 것 같은 모습이었다.
흰 뺨에 번진 햇빛이 얼핏 조각상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처럼 보였다. 도현은 그렇게 생생하게 아름다운 낯으로 웃었다.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가며 차름한 호선을 그렸다.
햇살에 물든 다른 곳과 다르게 여전히 검은 눈동자는 어딘가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그 검은 눈동자가 카메라로 향하자, 윤 피디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눈꺼풀이 한 번 닫혔다가 열린다.
별거 아닌 작은 동작임에도 스태프들은 숨을 죽였다. 마치, 이 공간에 도현과 단둘이 남겨져 비밀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낮으로 물든 공간에서 유일하게 새벽빛을 유지하는 검은 눈은 감각을 교란하는 힘이 있었다.
“대신, 수분은 꽉 채워서.”
재밌는 이야기를 하듯이 속삭이는 음색이다.
아니, 수분을 꽉 채운다는 말이 이렇게까지 감미롭게 들릴 일인가…? 얼떨떨한 사람들의 심정과 다르게 장면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건, 해당 광고의 정체성과 다름없는 문장이었다.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 만족했는지 슬쩍 웃은 도현이 발걸음을 돌렸다. 카메라가 소년의 뒷모습을 담았다. 그대로 소파로 향한 도현이 풀썩 늘어졌다. 한쪽 발을 까딱이며, 손은 옆에 있는 책을 들어 넘긴다.
마치 일상처럼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다. 그 평온한 모습 위로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이마를 덮은 앞머리가 미약하게 하늘거렸다.
이 장면에서 다시금 내레이션이 등장한다.
[매일 함께하려면 편안해야 하니까. 닥터 디, 에브리데이 로션]
촬영이 끝났음을 알 텐데도, 도현은 컷 소리가 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책장을 넘겼다. 흰 손끝이 느긋하게 책장을 넘기는 모습은 보는 사람이 절로 나른해질 정도로 평화로웠다.
그 평화에 전염된 윤 피디는 몇 초 늦게 촬영이 끝났음을 알렸다. 도현이 책을 내려놓자 스태프들 사이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마치 아주 아름답고 아늑한 공간에서 쫓겨난 것 같은 아쉬움이 치고 올라온다. 몸 주변을 감쌌던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느낌이다.
도현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윤 피디를 응시했다.
“괜찮았어요?”
“…괜찮냐고요?”
“네. 잘 찍혔는지 궁금해요.”
뭐라고 대답해줘야 할까.
CF를 찍으려고 했는데 청춘 영화 한 편을 찍어버린 거 같다고? 혹시 청춘 영화는 찍어볼 생각이 없냐고? 아니면 이 광고가 나가면 세제 광고가 들어올 것 같다고?
“오늘 촬영이 일찍 끝날 것 같아서 아쉽네요.”
모두 진심이지만, 그중에서 가장 현재 심정에 가까운 건 바로 이거였다. 윤 피디의 말에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은방울꽃에 맺힌 물방울처럼 맑은 웃음이었다.
“네? 아하하, 퇴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거 아닌가요?”
물론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사회생활 4년 차 즈음 된 직장인의 것이었지만.
“모델이 잘해주면 찍는 저도 즐겁거든요. 그럴 때는 오히려 일찍 끝나는 게 아쉽죠.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더 촬영해봐도 될까요? 지금도 잘 나왔지만… 다음번에는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서요.”
손댈 것 없이 잘 나온 상황에서 추가 촬영은 불필요하다. 그렇기에 윤 피디는 도현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 귀찮아하거나, 불만스러워할까 봐서였다.
그러나 도현은 오히려 시원하게 웃었다.
“어차피 한 번으로 끝낼 생각 없었어요.”
섬세한 외견과 다르게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윤 피디는 직감적으로 도현이 그러한 일들을 싫어하는 인물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럼 다시 가보죠.”
오늘 제법 괜찮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윤 피디는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하며 카메라를 다잡았다.
흘러가는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 * *
“다음에 또 같이 일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윤 피디는 도현의 양손을 꼭 잡고 눈을 빛냈다. 그의 두 눈에는 즐거움과 아쉬움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저도요. 오늘 촬영 즐거웠어요.”
도현의 대답에도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에 용기를 얻은 것인지, 윤 피디가 내내 생각만 하고 밖으로 꺼내진 않았던 것을 물었다.
“이제 CF도 종종 찍을 생각인 건가요? 그간은 이런 활동보다는 연기에 집중했던 것 같아서요.”
“음….”
도현은 흘긋 제 옆에 선 남자를 쳐다보았다. 경찬호는 왠지 찔린 기분이 되어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친구를 도우려는 소년에게 조건을 달아 CF를 찍게 하는 게, 딱히 바람직하지는 않았으니까. 물론 새솔이 기업인 이상 어쩔 수 없지만….
그런 문제를 차치하고서, 어른으로서 못 할 짓을 하는 거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아니, 실제로 맞을 것이다.
“네, 그럴 거 같아요.”
“이유를 물어봐도 돼요?”
“흥미가 생겼거든요. 그리고 오늘 촬영해 보니까… 재밌었고요.”
립서비스임을 앎에도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윤 피디는 기분 좋게 웃은 후 도현에게 제 명함을 건네주었다.
“다음에 또 봐요.”
이번 인연이 여기서 끝이 아니길 하는 바람에 주는 명함이었다. 도현은 그의 명함을 받고, 제 명함도 건네준 후 촬영장을 떠났다.
소년이 사라진 촬영장은 잠시 조용했다. 그의 발소리가 멀어진 걸 확인한 후, 한 스태프가 한탄처럼 말했다.
“이래서 이도현, 이도현하는 구나….”
겨우 CF 한 편으로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 버리고 간 도현이었다. 말 그대로, 폭풍 같은 존재였다.
* * *
“그거 진심이야?”
“뭐가요?”
“흥미가 생겼다는 거….”
“아.”
건물을 나서자, 오후의 하늘이 그들을 반겼다. 주차장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서 걸어가야 했다. 두 사람은 느긋하게 발걸음을 뗐다.
그러나 그 걸음은 곧 멎고 말았다. 도현이 툭 내던진 질문 탓이었다.
“저한테 미안해요?”
“…….”
“희운이로 저를 휘두르는 거 같으니까? 아니면, 희운이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렸는데 대가를 받아 가는 거 같아서?”
귀신인가.
경찬호의 속내를 낱낱이 꿰뚫은 것 같은 발언이었다. 이럴 때 도현은 절대로 14살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아니라고 해볼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거짓말을 해봤자 금방 들킬 것 같았다. 고작 열네 살짜리 소년을 너무 대단하게 보는 것 같긴 했지만… 그 열네 살짜리가 도현이라면 말이 달라졌다.
“그래, 맞아.”
결국 경찬호는 진실을 토해냈다.
그는 나름대로 힘겹게 인정한 거였는데, 돌아오는 반응은 선선하다 못해 심심하기까지 했다.
“그거라면 괜찮아요.”
“괜찮다고?”
“네. 형 눈에는 제가 많이 어려 보이겠지만… 아니, 실제로 어리기는 한데.”
그러니까 보통은 어린애가 스스로 어리다고는 안 한다니까.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함께 ‘어려서 그렇죠’란 발언을 들었던 경찬호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그런데,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 정도는 구분하거든요. 그 정도는 상관없으니까 제안한 거예요. 일이 쉽게 풀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
“이러면서 어리다고….”
“네?”
“아니, 아니야.”
“뭐, 그래요. 그리고 형,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 눈빛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굳혔던 경찬호는 도현의 입가에 은은히 떠오른 미소에 다시 긴장을 풀었다.
“정말 제가 휘두른다고 휘둘릴 사람처럼 보여요?”
그 말에 경찬호는 사적인 감상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시선으로 도현을 보았다. 꼿꼿한 검은 눈은 돌풍에도 중심을 지키고 있을 것 같다.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유약함이 아니라, 때에 따라 형체를 바꾸는 유연함이었다.
“아닌 것 같다.”
“그렇죠? 이만 가요.”
경찬호는 저 ‘이만 가요’에 내포된 의미가 단순히 집으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이 문제를 더는 언급하지 말자는 것임을 이해했다.
보통 어린애는 안 그런다니까….
경찬호는 헛웃음을 삼키며 도현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