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55화 (456/582)

제455화. 겨우내 웅크린 (13)

[진윤아 : 오빠 어디야???]

[진윤아 : 난 다 왔음]

[진윤아 : 대기실에 혼자 있으니까 심심해 ㅠㅠ]

도현의 핸드폰이 울려대자,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던 희운이 호기심을 보였다. 딱히 숨길 내용도 아니라서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윤아 벌써 도착했대.”

“벌써? 일찍 갔네.”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경찬호에게 몇 분 뒤에 도착하는지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을 그대로 답장에 써서 보낸 도현은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정면을 보았다.

뻣뻣하게 세운 등이나 무릎 위에 올린 주먹은 딱 봐도 ‘나 불편해요’라는 기운을 풀풀 풍겼다. 도현의 밴에 얻어 타는 상황이 무척 어색한 모양이었다.

“조금만 참아. 곧 있으면 너도 매니저 배정될 테니까.”

“응? 아니, 나 괜찮아!”

퍽이나.

도현은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 ‘스타 라디오’에서 연락이 왔다. <왕의 길> 특집으로 아역 배우 편을 편성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확실히, 이런 연락이 올 때가 됐긴 했다.

얼마 전까지는 <왕의 길>의 방영이 오래되지 않아서 시기가 애매했고… 모양새도 좋지 않았다. 한참 시작하는 드라마를 두고 분량이 끝난 아역 배우가 종영이라도 한 것처럼 여기저기 얼굴을 비추는 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고 말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눈치를 보던 프로그램들이 방영 한 달이 지난 지금, 슬슬 시동을 걸었다. 그 첫 시작이 바로 오늘 촬영할 ‘스타 라디오’였다.

<왕의 길> 아역 배우 특집 편은 세 명의 게스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덕만 아역의 진윤아, 용춘 아역의 정희운, 그리고 비담 아역의 이도현. 요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아역들이기도 했다.

“우욱.”

밴에서 내리던 희운이 헛구역질을 했다. 차 안에서 내내 긴장한 채로 있더니…. 검은 눈동자에 걱정이 차올랐다.

“괜찮아? 물 좀 마실래?”

“아니, 괜찮아. 그냥 멀미야….”

“그래도 물은 마셔. 너 지금 아파 보여.”

“으응.”

희운은 요구에 못 이겨 물을 몇 모금 마시더니, 파리했던 안색이 조금 나아졌다. 그는 그제야 속이 풀렸는지 한숨을 토해냈다.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온 희운이 어색하게 도현을 쳐다보았다. 그는 시선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말했다.

“그, 고마워.”

사실대로 말하자면, 도현은 업보를 그대로 돌려받는 중이었다. 그동안 워낙 이상하게 굴어서인지, 희운은 도현을 어려워했다.

싫어하는 건 아닌 거 같은데 도현이 정도 이상으로 다가가면 뒷걸음질을 쳤다. 그뿐만 아니라 친해지려는 의도를 쉽사리 믿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저번처럼 금방 휙 하고 사라지리라 생각하는 거 같았다.

…그래. 내 잘못이지.

“그래.”

차라리 잘됐다. 희운이 금방 해맑게 웃으며 빗장을 열어주면 오히려 더 걱정될 뻔했다. 그러다 어디서 뒤통수 맞고 양말까지 털리고 올까 봐.

도현은 희운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요즈음 도현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속에서부터 피어나는 애틋함이나 친밀함은 던져두고, 일부러 거리감을 두는 중이었다. 웃기게도 이쪽에서 거리를 두면 희운은 자기가 한 발짝 다가왔다.

천천히 하자. 시간은 많으니까.

도현은 마음을 다스리곤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오늘 방문한 곳은 SBC 방송국이었다. 바로 이것이 첫 시작으로 ‘스타 라디오’가 선택된 이유기도 했다.

<왕의 길>이랑 같은 방송사니까.

안내에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제 이름이 붙여진 대기실이 보였다. 대기실은 따로 마련해준 것인지 희운의 대기실은 바로 옆에 있었다.

도현은 희운에게 손을 흔들어준 후 대기실 안에 들어갔다. 희운이 잠깐 버려진 강아지 같은 눈으로 쳐다봐서 멈칫하긴 했지만… 그래도 메이크업은 받아야 했다.

도현은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며 머리를 휘휘 저었다.

형과 영혼이 하나가 된 건 좋은데, 거기서 몇 가지 문제가 파생되었다. 그러니까 정희운이 자꾸 동갑내기 친구가 아니라 한참 어린 동생으로 보인다거나 하는, 그런 것들….

아니, 이상하잖아. 동갑내기를 볼 때 걔 기어 다니던 시절을 떠올리며 흐뭇해하는 건….

‘이게 부모의 마음인가.’

가슴께를 지그시 누르며 누군가 들었더라면 경악했을 법한 생각을 한 도현은 스태프의 부름에 화장대 앞에 앉았다.

“원하는 스타일 있어요?”

“그냥 깔끔하게 해주세요.”

스태프는 도현의 주문을 받아들여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현은 앞머리에 분홍색 핀을 꽂은 채로 진윤아와 문자를 나눴다.

[진윤아 : !!!]

[진윤아 : 나 거기 가도 돼?]

정말 심심했나 보다. 잠깐 고민한 도현은 답장을 보냈다.

[아니, 내가 끝나고 네 쪽으로 갈게.]

[진윤아 : ㅠㅠㅠㅠㅠ]

보면 볼수록 친화력이 뛰어나다 싶었다. 희운이도 이렇게 편하게 대해주면 좋을 텐데. 불쑥 튀어나온 아쉬움을 고이 집어넣고 핸드폰을 덮었다.

얼마 안 있어 스타일링이 끝이 났다. 도현의 요구사항대로 깔끔하게만 정리해준 모습이었다. 고맙다고 인사하자 스태프가 사진을 부탁해왔다. 도현은 익숙하게 그녀와 사진을 두어 장 찍고는 대기실을 나왔다.

먼저 희운의 대기실 앞에서 노크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희운은 헤어 스타일링을 받고 있었다. 희운의 풍성한 갈색 머리칼이 스태프의 예술혼을 자극했는지, 그녀는 한 올 한 올 섬세하게도 고데기를 넣고 있었다.

“벌써 끝났어?”

“응, 넌 덜 끝났네.”

그들의 대화를 듣던 스태프가 끼어들었다.

“희운 씨도 금방 끝나요! 다 됐거든요.”

“저 그럼 뒤에서 기다려도 돼요?”

“그럼요.”

그녀는 흐뭇한 눈치였다. 아역 배우들이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은 모양이었다. 도현은 사양하지 않으며 뒤편에 마련된 소파에 몸을 맡겼다. 옆자리를 툭툭 두들기며 매니저 형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진윤아 : 아직도 안 끝났어?]

그사이 도착한 문자가 도현의 양심을 저격했다. 거짓말을 해볼까 하다가 그냥 진실을 적었다.

[끝났어. 희운이 대기실이야.]

금방 답장이 올 것 같았는데 문자를 확인하고도 잠잠했다. 삐졌나. 도현이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벌컥! 다급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연히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거기엔 뾰루퉁한 기색의 진윤아가 서 있었다.

“뭐야! 끝나고 온다면서! 배신자!”

“희운이랑 같이 가려고 했지.”

“…그런 거야?”

그녀의 화는 맥없이 풀렸다. 누그러진 낯을 한 진윤아가 화장대 앞에 앉아 있는 희운에게도 인사를 했다.

“오빠 안녕. 오랜만.”

“응, 안녕.”

터덜터덜 걸어온 진윤아가 도현의 옆자리에 풀썩 앉았다.

“괜히 일찍 왔어. 와서 한참 기다렸단 말이야.”

“늦는 것보단 낫지.”

“그렇긴 한데…. 아, 있지. 나 오늘 여기 들어오다가 아이리스 언니들 봤다? 오빠 아이리스 알지?”

아이리스. 들어본 적은 있었다.

요즘 인기 있는 여자 아이돌 그룹이었던가. 반에서 애들이 몇 번 대화하는 걸 들었던 것 같다.

“응, 알아.”

“진짜 완전 예뻤어! 영상은 실물을 못 담더라. 완전 여신이야. 여신. 게다가 엄청 착해서….”

진윤아는 도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말을 쏟아냈다. 수다를 즐기지 않는 도현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맞장구만 치면 되니까.

“아, 여린 님을 봤다고?”

그래서 도현은 옅게 상기된 희운의 얼굴을 한 박자 늦게 알아챘다.

검은 눈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설마….

“아, 여린 언니는 없었는데. 오빠 여린 언니 팬이야?”

“응. 나 데뷔 때부터 팬이었어.”

진짜였어?

심지어 데뷔 때부터 팬이란다.

도현은 떨떠름한 눈으로 희운을 보았다. 어느새 진윤아와 희운은 아이리스를 주제로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딱 그 나이대의 아이들 같았다.

연예인에 환호하고, 열광하는. 일단 본인들도 연예인이라는 건 차치하고서 말이다.

새삼 정희운이 열네 살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아니, 어쩌면 이제야 안 게 맞는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형의 동생에 불과했고, 나중에는 열등감과 비틀린 애정의 대상이 되었다. 형과 영혼이 하나가 된 후에는… 그때도 하나의 인격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아끼고 보호해야 할 대상에 가까웠다.

도현은 뭔지 모를 기분으로 즐겁게 대화하는 희운을 보았다.

그사이 희운의 스타일링도 모두 끝이 났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끊긴 건 한 스태프가 그들을 데리러 왔을 때였다.

그대로 그들은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제일 먼저 반겨준 건 라디오 피디였고 그다음은 라디오를 이끌어가는 진행자들이었다.

그들은 도현과 다른 아이들을 차별대우하지 않았다. 도현을 조금 더 흘긋거리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도현은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잠시 후.

그들은 한 차례 안내받았던 진행 순서에 대해 다시금 설명을 들었다. 세 배우가 준비가 끝나자, 스튜디오 내부의 모든 불이 켜졌다.

“스탠바이- 큐!”

예능 감독의 지시에 따라 진행자가 카메라를 응시했다.

“아~ 오늘은 정말 제대로 톱스타들을 모셨는데요. 하반기 최고의 사극 드라마 <왕의 길>의 주연! …의 아역을 맡아 화제가 된 분들을 모시겠습니다!”

한 차례 페이크에 희운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카메라는 진행자를 비추던 앵글을 돌려 스튜디오 내부로 입장하는 세 배우를 담아냈다.

제일 먼저 발을 디딘 진윤아에 진행자가 입을 열었다.

“‘공부하는 건 한 시간도 버겁지만, 연기할 때면 몇 시간이고 즐겁게 할 수 있어요.’”

“??”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가던 진윤아의 발걸음이 주춤했다. 그녀는 그게 어디서 나온 말인지 짐작한 듯,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웃음을 참으려는 노력이었다.

“공부는 못할지언정 연기는 천재, 진윤아!”

“저 공부도 잘해요!”

진윤아의 항변에 한차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다음은 도현의 차례였다.

나는 뭐가 나오려나.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스튜디오를 향해 걸어 나갔다.

“‘연기요? 저는 카메라 앞에 설 때 제가 살아 있다고 느껴요.’”

도현은 앓는 소리를 삼키며 얼굴을 가렸다.

그래. 기억난다.

분명 옛날에, 다른 방송사의 보이는 라디오에 출연했을 때 했던 대답이었다.

분명 진심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느끼는데 왜 이렇게 수치스럽단 말인가. 도현은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이제 중1인데 왠지 존경해야 할 것 같은 배우, ‘내가 변해도, 너는 변하지 마’ 레전드 찍어버린 내로남불 매력남, 이도현!”

“아….”

기어이 탄식이 흘러나왔다.

도현에게서 반응이 나오자 진행자들이 신이 나 달려들었다.

“아, 안 변할게, 안 변할게!”

“김두진 씨는 조금 변해도 될 것 같은데요?”

“아니, 저 사람은 조금이 아니라 많이 변해야 해.”

살면서 이토록 부끄러웠던 적이 있던가. 도현은 진행자와 피디를 원망스레 쳐다보다가, 옅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은 희운이었다.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고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도현은 희운의 멘트로는 뭐가 나올지 집중했다.

“‘절절한 사랑은 해본 적 없지만, 연기를 좋아하는 마음도 사랑 아닐까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

“아직 첫사랑은 이른 나이, 하지만 연기만큼은 연애 고수처럼. 될성부른 연기 고수, 정희운!”

희운은 살짝 빨개진 볼로 나왔다.

그렇게 촬영 십 분 만에 세 명의 게스트를 초토화한 라디오가 막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