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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456화 (457/582)

제456화. 겨우내 웅크린 (14)

과거의 인터뷰에서 따온 대사로 급습당한 어린 배우들은 형식적인 자기소개를 하면서 점차 본래의 페이스를 찾았다. 그러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진행자들은 그들이 차분해지는 걸 두고 보지 않았다.

“한창 화제였잖아요. 세 사람의 삼각관계가.”

운을 띄우는 김두진에 희운의 얼굴에 불안함이 서렸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실제로, 뭐 그런 거 있어요? 희운 씨부터 말해보자.”

기나긴 연예계 짬밥으로 여기서 제일 무른 사람이 누군지 단번에 맞힌 김두진이 희운을 공략했다.

“네?”

“그 있잖아. 어린 친구들끼리 놀고, 같이 일하다가 호감도 생길 수 있고 그런 거 아니에요?”

“그… 그런 건 없어요.”

당황한 희운이 곧바로 부정했지만, 한번 먹잇감을 문 진행자는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에이, 솔직하게 말해도 돼. 어?”

희운이 쩔쩔매자, 그 모습이 가련해 보였던지 다른 진행자 한 명이 끼어들었다.

“김두진 씨 초장부터 너무 몰아가는 거 아니야?”

“아니, 호감이 꼭 이성적인 호감만 있나? 친구로서 우정을 느낄 수도 있는 거지.”

김두진이 능청스레 변명했다. 아슬아슬하게 선을 밟으면서도 넘어오지는 않는 게 능숙한 예능인다웠다.

김두진의 드리프트로 인해 화제는 세 배우의 친분으로 넘어갔다.

“보통 같이 연기하면서 친해지고 그러던데. 세 사람도 친해요?”

그 질문을 하면서 도현에게 시선을 주길래 도현은 별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하다고 대답하려고 입을 열 때였다.

“아, 사전 인터뷰에서 우리 윤아가 이런 말을 했네요. ‘오빠들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거리를 두는 것 같아서 서운해요.’”

“아이고, 왜 그랬어~.”

한 진행자가 추임새를 넣었다. 도현은 조금 당황해서 옆을 돌아보았다. 진윤아는 입을 만 채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고 있었다.

진윤아의 나이가 워낙 어리다 보니 우쭈쭈 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한 진행자가 제 딸내미를 보는 눈빛으로 물었다.

“뭐가 그렇게 서운했어, 응?”

호의 어린 시선이 모이자 진윤아는 오므렸던 입술을 바로 했다. 빼는 법이 없던 성격은 촬영 중에도 여전한지, 그녀는 이제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일단, 희운 오빠는 너무 조심스러워요.”

“나?”

갑자기 저격당한 희운이 눈을 끔뻑거렸다.

“그냥 와서 말 걸면 되는데 제 눈치만 보더라고요.”

“소심한 사람들이 대개 그러지.”

“정희운 씨가 소심한 타입인가 보네. 그래도 동생한테는 먼저 다가가고 그래야지.”

연달아 이어진 공격에 희운은 정신을 못 차리는가 싶더니 간신히 대답을 쥐어짜냈다.

“아니, 전 윤아가 저를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아서. 아,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관심이 없다고 해야 하나?”

사람들의 시선이 희운에게 부연 설명을 요구했다. 희운은 이걸 말해도 되나, 안 되나 고민하다가 문제 될 것 같으면 알아서 자르겠지 하는 심정으로 뱉었다.

“윤아가 대부분은 도현이한테 가 있더라고요.”

“어어?”

예상치 못한 전개에 진행자들의 눈이 반짝 빛났다. 진윤아 또한 이건 생각지 못했는지 한껏 당황한 기색으로 앞에 놓인 PPL 보리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맥이고 맥이는 상황 속에서 도현은 흥미롭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사이 사이다 원샷하는 기세로 보리차를 들이부은 진윤아가 침통하게 입을 열었다.

“인정해요.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어요. 눈앞에 르옌 누바라가 있는데 어떻게 시선이 안 갈 수 있어요?”

진윤아의 대답은 퍽 능숙했다. 적당히 예능감 있으면서, 문젯거리는 만들지 않는 대답이었다. 의도했든 아니든 예능에 소질을 보이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 그건 그렇지.”

“나도 그랬을 거 같아.”

진행자들이 진윤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여기서 더 물고 늘어져도 별로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까. 적당히 물었다가 적당히 놓아주는 완급이 중요했다.

“그럼 이도현 씨의 어떤 부분이 서운했어요? 보니까 촬영장에서 졸졸 따라다녔던 거 같은데.”

“저 오빠는 선이 엄청 뚜렷해요. 친해지고 싶은데 틈을 안 주는 느낌?”

“왠지 그럴 것 같은 분위기긴 해.”

이번엔 나를 몰아가려는 모양이었다. 도현은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대본 리딩 날부터 친해지고 싶어서 말을 엄청 걸었는데, 딱 필요한 것만 대답하더라고요. 촬영 시작하고도 한동안 계속 그랬어요.”

“그러니까 친구가 아니라 동료 배우 같다는 거지?”

“네! 그 느낌!”

“촬영장에서 만났으면 동료 배우가 맞긴 한데… 그래도 같은 어린 배우들끼리 친하기 지내면 좋잖아.”

역시 도현을 타박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그러나 이 정도는 수비 범위 안이었다.

애초에 ‘스타 라디오’는 매운맛 라디오로 유명한 방송이었다. 아역 배우니까 이만큼 봐주는 거지, 성인이었으면 아마 영혼까지 탈탈 털렸을 터였다.

그건 그거고, 도현은 쉽사리 몰매를 맞을 생각이 없었다. 도현이 서운한 눈으로 진윤아를 보았다.

“저는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어?”

“나 혼자 친해졌다고 생각했던 거구나. 윤아는 동료 배우 정도로 여기고 있었는데.”

“으어?”

진윤아가 당혹스러운 낯으로 괴상한 탄성을 뱉었다. 그 모습을 보던 김두진이 말을 툭 내뱉었다.

“전에 구미호 역할 맡았다 그랬나? 배역이 제 주인 찾아갔네. 완전 여우야, 여우.”

그 장면을 찍던 예능 감독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딱 이 부분에 도현의 뒤로 구미호 꼬리를 CG로 추가하면 적절하겠단, 도현이 들었으면 수치스러워했을 생각을 하며 카메라를 고쳐 쥐었다.

친하다, 안 친하다로 번지던 논쟁은 한 진행자의 물음으로 인해 결론이 내려졌다.

“비즈니스인지, 친구인지 구분하려면 이게 딱이지. 그래서 두 사람, 밖에서 만나서 논 적 있어요? 피자나 햄버거 같은 거 먹으면서?”

“…….”

도현은 대답하지 못했고, 진실은 가려졌다. 논쟁에서 이겨 좋아하던 진윤아는 잠시 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정말 좋은 게 맞나…?

상처뿐인 결말이었다.

그 후로 세 배우가 사전 인터뷰했던 것을 중심으로 촬영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도현의 주제는 ‘도현의 반 학생들의 답지는 도현의 시험지다?’라는 것이었다.

도현이 먼저 꺼낸 얘기는 아니었다. 딱히 성적 자랑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으니. 이건 작가 측에서 먼저 물어보고 제안한 주제였다.

자랑을 즐기진 않지만, 기를 쓰고 숨길 필요도 없었기에 알겠다고 답했다. 도현은 진행자의 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원래 시험을 치르면 애들이 교무실에 가서 답지를 받아왔거든요.”

“그치, 그게 보통이지.”

“근데 어느 순간부터 답지는 안 가져오고 제 시험지를 가져가서 채점하더라고요.”

도현이 영화 개봉으로 바쁜 와중에도 만점을 받아낸 이후로 생긴 변화였다. 기말고사를 보고 답지는 나 몰라라 한 채 제 시험지를 붙잡고 있는 아이들을 황당하게 쳐다보자, 한 아이가 맑은 눈으로 ‘네가 틀릴 리가 없잖아’라고 말했었지….

“그니까 도현 씨는 만점이었다는…?”

“그게… 그렇게 되네요. 네.”

도현의 비상한 두뇌는 꽤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실물을 두고 보니 더욱 불공평하게 느껴지는 사실이기도 했다.

“스케줄 바쁘지 않아요? 어떻게 만점을 받지? 그건 머리 좋다고 다 되는 게 아니잖아.”

“제가 생각보다 별로 안 바빠요.”

“기만이다, 이건!”

올해만 해도 구미호뎐, 패스파인더, 그리고 왕의 길로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배우의 망언에 진행자들이 야유했다.

진짠데….

물론 이번 겨울방학부터는 말이 조금 달라지겠지만, 그간은 촬영 일정을 제외하고는 안 바빴던 게 맞았다. 그러나 도현은 더 변명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세 명의 주제가 한 번씩 지나간 후, 김두진이 의미심장한 서두를 던졌다.

“자, 지금 우리 앞에 세 명의 게스트가 있죠. 게다가 한참 핫한 아역 배우분들로.”

또 무슨 얘기를 꺼내려고.

“또 우리가 연애 얘기를 빠트릴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제가 사전 인터뷰를 보니까 이 세 분 중에서 연애 경험이 있는 게 딱 한 분이더라고요.”

확실히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도현은 눈을 깜빡였다. 우리 중에 연애 경험이 있는 애가 있다고?

자연스레 옆을 돌아보자, 희운이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확신이 담긴 시선에 도현은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나 아닌데?

이제 보니 스태프들의 시선도 도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도현의 눈썹이 꿈틀했다. 대체 왜 나를 보는 거야. 그런 오해의 시선이 걷힌 건, 진윤아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을 때였다. 진행자 한 명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윤아가?”

“네. 사귄 적 있어요.”

“아니, 윤아 씨는 지금 초등학생 아니야?”

“내년에 중학교 올라가요!”

그게 그거였다.

진행자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약간 얼이 빠진 채 대답했다.

“근데 연애를 해봤다고? 요즘 애들 진짜 빠르네….”

윤아의 연애 경력이 두 번임이 밝혀지면서 스튜디오는 한 번 더 술렁거렸다. 그리고 그다음 타깃은 멀거니 앉아 있던 두 소년이었다.

“아니. 그럼 나머지 두 명은?”

“하하….”

“진짜 둘 다 연애 안 해봤어요?”

희운은 조금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딱히 별생각이 없었기에 멀뚱멀뚱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이렇게 잘생겼는데? 그럼 고백은. 고백도 안 받아봤어?”

“네. 유치원 때 빼고는 한 번도….”

“도현 씨도?”

그 물음에 거의 잊었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오후, 티타임. 그리고 쿠키 먹겠냐는 말투로 고백하던 진의 소꿉친구 지니. 본인이 고백해놓고 장거리 연애는 관심 없다던 쿨한 발언. 경악하던 친구들….

“어, 고민하는 거 보니 있네!”

생각하다가 시간이 지났나 보다.

도현은 순순히 그렇다고 시인했다.

“근데 왜 안 사귀었어요? 취향이 아니었나?”

“눈이 높은가 보지. 근데 높을 만해. 매일 아침 거울을 보는데 다른 사람이 눈에 차겠어? 제 말 맞죠?”

내가 눈이 높은가. 딱히 그런 문제는 생각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실상 도현은 이상형 같은 것도 없었다. 그게 연애적인 의미라면 말이다.

“눈이 높은지는 모르겠어요.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그리고 그 친구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그냥 제가 연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어요.”

“왜요?”

도현이 애매하게 눈을 찡그렸다.

“그… 너무 어리잖아요. 그런 걸 하기엔.”

사실 이 주제로 말하는 것도 민망스러웠다. 그런 것을 논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인 것 같기도 하고, 연애한다면 아마 상대는 또래일 텐데 죄를 짓는 기분이기도 하고….

그러나 이런 사실을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었다.

“아직 중학교도 안 들어간 윤아도 연애하는데?”

“음.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지금의 저한테는 연애보다 더 중요한 게 많아요. 연기, 공부, 발레, 음악, 친구… 거기에 더 집중하고 싶어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기도 하고, 무엇보다 전 지금이 무척 마음에 들거든요.”

“이거 완전히 시험지가 답지인 사람만 할 수 있는 대답이네.”

장난스레 대답하긴 했으나 김두진은 조금 놀랐다. 딱히 엄청난 대답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실성이 남달랐다. 정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는 듯, 도현의 입술이 은은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도현이 연기에 얼마나 진심인지 단숨에 알 법한 모습이었다. 김두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거 좋죠. 또 도현 씨가 열심히 해줘야 국위선양도 되고.”

“하하, 그런가요?”

대화는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라디오 분위기에 적응한 세 배우는 초반과 다르게 적극적으로 말을 얹기도 하고, 또 서로에게 장난을 치기도 하면서 분량을 뽑아냈다.

라디오 촬영이 끝난 건 그로부터 두 시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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