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7화. 겨우내 웅크린 (15)
촬영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조명이 쏟아지던 스튜디오를 나오니 왁자지껄했던 공간이 훅 멀어지면서 현실감이 피부에 와닿았다.
뜨거운 조명, 쏟아지는 관심, 빨간 불빛을 반짝이는 카메라와 사람들의 집요한 시선을 경험했다면, 그 후에 이어지는 고요가 어색한 건 당연했다. 도현은 익숙하게 그 괴리를 받아들였다.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해서 그런가, 자꾸만 갈증이 일었다. 도현은 스태프가 챙겨준 PPL 보리차를 몇 모금 마셨다. 옆에서 나란히 걷는 희운은 여전히 뺨이 상기된 채였다.
“재밌었어.”
“시작 전에는 긴장 많이 했잖아.”
“응. 이런 라디오는 처음이라 어려웠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거 같아!”
뭐든 첫인상이 중요했다. 희운이 라디오에 좋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앞으로 연예계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면 라디오는 물론이고, 인터뷰나 다른 예능 방송에도 나가게 될 테니.
‘아직은 훗날의 일이지만.’
도현은 희운을 먼저 차에 태우고 뒤따라 좌석에 앉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라디오 진행 당시에는 웃고 넘겼던 말이 뒤늦게 그를 고민에 빠트렸다.
‘내가 선을 긋는다고.’
부정할 생각은 없다. 도현은 타인의 접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편이었다. 2반 아이들도 지금이야 친밀하게 지내지만, 처음에는 관심조차 안 두지 않았던가.
도현이 친분을 쌓는 방식은 사실 꽤 일방적이었다. 정확히는 상대방의 일방적인 노력에 가까웠다. 상대가 먼저 울타리 너머에서 문을 두들기면, 도현은 그 앞에서 한참 고민하다가 잠금쇠를 풀어주는 식이다. 문을 두드리는 것도, 잠금이 풀린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도 모두 상대의 몫이었다.
진과 니콜라스도, 맥도, 2반 아이들도, 모두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가까워졌다. 지금까진 거기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그게 안 좋은 건가?’
도현의 고개가 기울었다.
불안정하던 영혼은 안정을 찾았다. 그날 도현은 모든 문제를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무적에 가까운 자신감을 느꼈다. 영혼의 합일이 만들어낸 고양감의 영향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양감은 잦아들었다. 하루하루 흘러감에 따라 도현은 조금 더 멀쩡한 정신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 자신감이 얼마나 근거가 없는 것인지도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은 본래 영혼으로 고민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영혼적인 문제를 앓는 사람이 있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도현은 이제야, 그 ‘사람들’의 일부가 된 것이었다. 출발선에서 한참 뒤떨어져 있다가 겨우 시작 지점에 발을 디딘 상태였다.
그건 도현이 영혼이나 죽음, 기와 순리 같은 것을 떠나, 이제 세속적인 삶을 마주해 다른 사람들처럼 치열하게 부딪히고 살아가야 할 때란 소리였다.
검은 눈동자가 한층 가라앉았다.
지금도 그랬다. 도현은 타인에게 선을 긋는 게 옳은 행위인지, 아니면 과거의 결핍에서 비롯된, 극복해야 할 행위인지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현은 아직 알아야 할 게 너무 많았다.
그리고….
도현의 시야에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희운이 담겼다. 화장을 지우지 않아 평소보다 단정한 얼굴이었다.
도현은 무릎 위에 놓은 손을 가만히 쥐었다가 폈다. 영혼과 죽음, 기와 순리를 떠나서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바라봐야 할 때다. 알고 있다. 그게 해야 하는 일이란 걸…. 덩어리 님도, 형도 가장 바라는 일이란 것을.
하지만, 곧 있으면 형의 기일이었다. 이렇게 된 후로 처음 맞이하는.
도현은 정신을 조금 차린 후부터 내내 되뇌었던 생각을 다시금 입 안에서 굴렸다.
나는 정말 죽음을 떠날 수 있는가?
* * *
중학생 딸을 둔 주부 이 모 씨는 주말을 맞이해서 느긋하게 텔레비전을 켰다. 평일 내내 자식과 남편에게 시달렸던 그녀에게 주말은 달콤한 휴식 시간이었다.
‘오늘은 정말 숨만 쉬어야지.’
주말만큼은 아무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었다. 이 모 씨는 소파와 혼연일체가 되어 최선을 다해 늘어졌다.
그때, 이 모 씨의 평화를 깨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엄마!”
안 들리는 척, 안 들리는 척….
“엄마아!”
“엄마 없다.”
“뭔 소리야. 거기 있잖아. 왜 멀쩡한 내 엄마를 없애!”
네 엄마는 좀 없어지고 싶대.
이 모 씨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딸아이가 어느새 그녀의 머리맡에 와 있었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입술은 오리처럼 나온 채였다.
“또 뭔 일인데 그래.”
“아니… 이거 보여?”
“뭐가? 못생긴 얼굴은 보이는데.”
“그거 말고! 얼굴에 트러블 났잖아!”
그녀의 딸은 막 사춘기에 접어든 나이였다. 호르몬이 왕성할 나이라 그런지 피부 상태도 들쭉날쭉하는 중이었는데, 딸애는 거기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었다.
“봐봐. 이거 어떻게 해?”
“그 나이에 벌써 얼굴에다가 떡칠하니까 피부가 그렇지.”
“아, 또 잔소리야! 그리고 나 정도면 별로 화장 진한 것도 아니거든?”
“알았어. 알았으니까 비켜 봐. 엄마 텔레비전 봐야 해.”
“내 얼굴은!”
“그건 평일에 같이 병원이라도 가든가.”
그제야 만족했는지 불평을 토해내던 소녀가 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찾은 자유와 평화에 이 모 씨는 힘없이 소파에 늘어졌다.
‘뭐 볼 거 있나….’
띡, 띡. 성의 없이 누르는 리모컨에 의해 채널이 넘어갔다. 그녀가 멈춘 건, 방영 전 해당 화를 예고하는 예고편이었다.
“스타 라디오?”
이거 재밌지. 동태 같았던 이 모 씨의 눈에 생기가 차올랐다. 화면에서는 오늘 나올 게스트에 대한 힌트를 주듯, 한 드라마의 장면이 삽입되었다.
그건 이 모 씨도 아는 장면이었다.
“왕의 길!”
어젯밤에도 챙겨 봤던 사극이었으니까! 요즘 영 재밌는 드라마가 없는 와중에 한 줄기 빛 같은 드라마였다.
화면으로 세 아역이 스쳐 지나갔다. 한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을 때는 그녀도 모르게 어머머,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세상에, 세상에. 이도현이 나와?”
이도현!
대한민국에 모르는 이가 없는 배우 아닌가. 그녀 또한 제 딸의 또래 배우에게 호감과 기특함, 그리고 부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하릴없이 돌아가던 채널이 고정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예고 영상이 한 차례 끝이 나고, 지겨운 광고 영상이 줄줄이 이어졌다. 이 모 씨는 채널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러다가 ‘스타 라디오’ 시작을 놓쳐 버릴까 싶어서 가만히 멍만 때렸다.
그때였다.
따단, 딴.
세련된 비트의 BGM이 흘러나왔다. 화면에 등장한 건 세제 광고에서나 나올 법한 새하얀 집인데, 나오는 비트는 어디 힙합에 깔릴 것처럼 미끈해서 두 가지의 부조화가 묘하게 주의를 잡아끌었다.
카메라가 이동하며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여주었다. 덜 여문 게 성인은 아닌 것 같았지만, 흰 와이셔츠 아래로 진회색의 슬랙스에 감싸인 다리는 우월한 비율을 자랑했다.
‘모델인가?’
어째 뒤태만 봐도 잘생긴 걸 알 것 같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이 모 씨의 표정은 꽤 심드렁했다. 그때 카메라가 이동하며 거울을 비추었다.
피부에 이것도 저것도 다 좋다던데
뭐, 목소리는 좋….
이 모 씨는 멈칫했다. 거울 속에서 소년이 제 흰 뺨을 쓸어내렸다. 한쪽 팔은 화장대에 기댄 채였다. 카메라에 담기는 비스듬한 옆모습도, 거울에 비친 얼굴도 어디 하나 시선을 뺏지 않는 구석이 없어서 이 모 씨의 눈이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당연했다. 지금 그녀가 기다리는 ‘스타 라디오’의 게스트였으니까! 어느새 이 모 씨는 몸을 반쯤 세운 채였다.
근데 방금 뭐라고 했더라? 피부?
그녀가 의아해할 새도 없이 도현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화장대 위에는 화장품이 정신없이 늘어져 있었다. 꼭 제 딸아이 책상을 보는 거 같아 눈을 찌푸리기도 잠깐.
검은 눈이 장난기를 담아 빛나더니.
탁, 데구르르!
화장대에 있던 모든 화장품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대참사를 만들어낸 장본인은 즐겁다는 듯이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 난 복잡한 건 싫거든.
이번엔 내레이션이 아니었다. 화장대를 뒤엎어 놓고선 상큼하게 말한 도현이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지러운 바닥 사이로 흰 운동화가 지나갔다.
도현의 앞에 비눗방울 같은 게 잔뜩 떠올랐다. 그는 몇 개를 품에 끌어안더니 꽉 눌러서 하나로 압축했다.
복잡한 성분은 줄이고
유해한 성분은 없애고
촤악!
엑스 자가 그려진 비눗방울들이 활짝 열린 창문으로 불어온 바람에 의해 멀리 날아갔다. 카메라가 시원하다는 듯이 창밖을 바라보며 웃는 도현을 보여주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무게감 없는 머리카락은 부잣집에서 잘 먹고 잘 자란 고양이의 검은 터럭 같기도 했다.
…화장품 광고인가? 내내 넋이 나가 있던 이 모 씨는 그제야 광고의 정체성을 짐작했다. 그다음은 의아함이었다. 아역 배우. 그것도 남자 아역 배우가?
그녀의 얼굴에 의문이 피어오른 것도 잠시.
도현이 빙글 돌아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긴 속눈썹에 걸린 햇빛이 호수의 표면처럼 반짝였다. 그 아래 눈동자는 이도현을 떠올리면 곧장 생각나는, 이제는 그의 상징이 되어버린 새카만 색채를 품고 있었다.
그게 창백하거나 차가워 보이지 않는 것은 뺨과 입술에 내려앉은 햇살 덕분이었다. 비단 같은 피부가 매끄럽게 반짝였고 발간 생기를 머금은 입술은 다정하게 휘어졌다.
- 대신 수분은 꽉 채워서.
이 모 씨는 빠른 납득을 마쳤다.
그래, 할 만하네.
그사이 도현은 창가에서 멀어져 아늑해 보이는 소파에 몸을 맡겼다.
소중한 당신을 위해 필요한 것만 남겼습니다.
읽다가 아무렇게나 두었던 것 같은 책을 주워다가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한다.
매일 함께하려면 편안해야 하니까.
닥터 디, 에브리데이 로션.
반투명한 흰 커튼이 휘날렸다. 바람은 도현이 누운 소파까지 날아와 머리를 헤집고 지나갔다. 그 풍경 위로 푸른색의 깔끔한 문구가 떠올랐다.
[Dr. d, Everyday Lotion]
그 상태로 이 초 정도 있던 문구는 곧 거품처럼 흩어졌다. 광고도 당연히 끝이나 다음 광고로 넘어갔다.
그러나 이 모 씨는 다음에 나온 광고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방금 화면에 떠올랐던 제품명을 인터넷에 검색해보는 중이었다.
때마침 그녀와 같은 이들이 꽤 있었는지 실시간 검색어에 ‘닥터 디’, ‘이도현 로션’ 같은 키워드가 떠올라 있었다. 이 모 씨는 키워드를 통해 제품 상세 페이지에 들어갔다.
유해 성분이 어쩌고 수분이 어쩌고…. 흔히 보이는 화장품의 상세 페이지였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홈 화면에 떠오른 사진이 이도현이라는 거였다.
- 얼굴에 트러블 났잖아!
딸아이의 투정이 귓가에 울렸다.
…이거 사주면 좀 나아지려나? 화장품이 의약품이 아니라는 것을 앎에도 이도현의 사진이 그녀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 이도현이 복잡한 성분은 줄이고 유해 성분은 없앴다니까. 피부에 나쁘진 않겠지. 상세 페이지 보니까 괜찮아 보이고….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그녀의 손가락은 착실하게 구매를 눌렀다. 제 딸 피부가 이도현만큼은 아니더라도 조금은 나아지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닥터 디의 매출은 또다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