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59화 (460/582)

제459화. 겨우내 웅크린 (17)

가연 예술 중학교의 기말고사는 다른 학교보다 빠른 편이라서 11월 말부터 12월 초 사이에 마무리되었다. 남은 수행평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기말고사가 끝났다는 것만으로도 학교 분위기는 크게 들떴다.

거기엔 한 해가 마침표를 찍는 연말의 분위기도 한몫했다. 다가오는 연말에 느슨해진 것은 학생들뿐만이 아니었다.

기말고사도 끝났겠다, 진도도 거의 다 나갔겠다. 여유를 되찾은 선생님들은 종종 수업 시간을 자습 시간으로 대체했다. 말이 자습 시간이지, 사실상 노는 시간이었다.

“선생님! 영화 봐도 돼요?”

“자습하라니까? 자습 몰라?”

“저 연기과니까 영화 보면 자습 아니에요?”

“아, 뭐야. 음악과는 어쩌라고.”

“그럼 음악 영화 보면 되잖아.”

“너 천재네?”

아이들이 시끌벅적 떠들어댔다. 처음엔 몇 번 타박하던 선생님도 곧 못 이기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래.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이기겠냐. 그래서 뭐 볼 건데?”

“우와아!”

아이들이 환호했다. 여기저기서 영화 제목이 튀어나왔다. 한참 유행이라는 영화, 작년에 제일 유명했던 영화, 고전으로 취급되는 영화와 애니메이션 영화까지. 다양한 후보들이 쏟아져 내렸다.

자연히 아이들의 의견이 엉켰다.

“아, 그건 음악 영화가 아니잖아.”

“꼭 음악 영화 봐야 해?”

음악 영화를 봐야 공평하다고 주장하는 음악과 애.

“일단 공포 영화는 다 빼! 공포 영화는 싫어!”

공포 영화만 아니면 된다는 애.

“코낸 극장판! 코낸 극장판!”

“누가 저 오타쿠 입 좀 막아 봐.”

극성 애니메이션 파와 취향 존중은 쌈 싸 먹은 애.

아수라장이 된 교실 속에서 도현은 턱을 괴었다. 그는 영화라면 다 좋았다. 수준이 터무니없이 낮지만 않다면 말이다. 뭐를 봐도 상관이 없었기에 아이들이 쏟아내는 영화 제목을 흥미롭게 들었다.

“아! 나 좋은 거 생각났어!”

커다란 목소리의 주인은 김병철이었다. 노래하는 애라 그런지 확실히 목청이 좋다. 아이들의 시선이 단숨에 김병철에게 집중되었다.

김병철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 보자!”

삐끗, 도현의 상체가 잠깐 비틀거렸다. 황망히 눈을 깜빡이자, 어느새 먹잇감을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이쪽을 응시한 아이들이 음흉한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그, 좀 오래된 거 아니야?”

“원래 영화는 클래식이지.”

“어… 그보단, 새로 나온 영화나, 아니면 액션 같은 거….”

“그럼 패스파인더?”

도현은 말문이 막혔다.

패스파인더가 올해 하반기 작품이니 새로 나온 것도 맞고, 일단 판타지 액션 영화인 것도 맞는데….

“아니, 그래도 그건 좀….”

완전히 수세에 몰린 도현에 아이들이 입맛을 다셨다. 저걸 어떻게 요리해 먹을까 하는 얼굴이었다. 분명 착한 애들이었던 거 같은데, 왜 날이 갈수록 이상해질까? 도현은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제 짝을 보았다.

한설아가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둘 중에 고르게 해줄게. 괴짜들이야, 아니면 패스파인더야?”

얘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배신감에 눈을 파르르 떨던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구경 중인 선생님과 눈이 딱 마주쳤다. 빙그레 웃는 그 얼굴에서 도현은 제 편이 없음을 확신했다.

“…그럼 괴짜들.”

패스파인더는 몇 달 전에 반 전체로 관람하러 간 적이 있으니, 다시 보기에는 조금 지루할 수도 있겠단 판단하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래도 괴짜들은 나온 지 오래됐으니까….

“우오오!”

“야, 틀어! 틀어!”

“누구 윗플렉스 가입된 사람! 너야? 빨리 아이디 비번 내놔!”

영화를 볼 생각에 신이 난 건지, 아니면 도현을 골릴 생각에 신이 난 건지. 잔뜩 흥분한 아이들이 소리를 높여댔다. 도현은 이마를 짚었다.

“자자, 조용. 옆 반에서 공부하는데 시끄럽게 하면 안 돼, 얘들아. 너무 시끄럽게 떠들면 영화 못 보게 할 거야.”

선생님이 과열된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갑자기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교실에 파하하, 웃던 선생님이 작게 장난을 쳤다.

“자습용으로 보는 거랬으니까, 우리 다 보고 감상문 쓰기로 할까?”

장난이어야만 했다.

한층 차분해진 분위기 속에서 서일준이 윗플렉스를 연결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아이들이 커튼을 치고 반 불을 껐다. 순식간에 교실이 어둑해졌다.

틱. 마침내 재생 버튼을 누르자, 교실 벽에 설치된 커다란 스크린이 까맣게 물들었다. 화면에 영화 제작사와 ‘Freak!’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화면은 여전히 캄캄했다.

그 어두운 화면에 빛이 들어오기 전.

아빠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익숙하다면 익숙하고, 약간 낯설다면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이 영화 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도현은 아까까지 골치 아파하던 것도 잊고 화면에 집중했다.

키티,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있어.

둥, 둥. 클럽 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보랏빛의 조명과 푸른빛 전등이 섞여 지하 특유의 퇴폐적인 열기를 형성했다. 위로 높게 솟은 사람들 손 사이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남자가 보였다.

그의 손이 기타의 중심을 크게 가로지르자 강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환호와 음악, 열망과 희열이 어지럽게 섞여 푸른빛으로 퍼져나갔다.

카메라의 앵글이 돌면서 클럽 구석에 있는 소녀를 비추었다. 열 살은 되었을까 싶은 작은 소녀였다. 조명이 움직일 때마다 부분적으로 염색한 보라색 브릿지가 눈에 띄었다.

도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루카 하퍼를 보았다.

저렇게 어렸었나.

상기된 낯으로 눈을 반짝이는 소녀는 무척이나 어리고, 또 작아 보였다. 내가 저런 애랑 그렇게 싸워댄 건가 싶을 만큼.

매캐한 푸른빛, 환호와 열기에 동화되어 향수에 잠긴 도현의 기억이 과거로 회귀했다.

저 촬영 당시 도현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저 때문에 서혜나가 미국에 머무르는 것에 대해, 제 이기심으로 사이좋은 부부를 갈라놓은 것에 대해….

그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많은 게 달라졌다. 일단 도현은 한국으로 왔다. 그리고 부모님은 서로에게서 떨어지는 일 없이 잘 지내고 계신다. 지난 헤어짐을 만회하듯이, 부부는 무척이나 사이가 각별했다.

그것만으로도 아주 큰 변화였다.

그로 인해 도현은 짐을 조금 내려놓았고, 조금 더 자유로워졌으며…. 그리고 달라졌다. 한국에서 도현은 기어이 영혼을 한데로 섞는 데 성공했다.

오랜만에 튼 영화는 도현이 잊고 있던 여러 가지를 상기시켰다. 그중 대표적인 건 그가 마주한 문제가 곧 있을 기일뿐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부모님을 대하는 자세도, 정희운도,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도, 전부. 전부 생각할 것 투성이었다.

도현이 상념에 빠진 사이 영화는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어느새 무대에서 내려온 남자가 루카를 품 안에 안아 들고 있었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다음 독백을 입 안에서 굴렸다.

사랑이랑 음악, 그리고 꿈.

사랑이랑 음악, 그리고 꿈….

하나같이 달착지근한 잔향을 남기는 단어들이다. 스크린 속에서 벤튼은 제 아내인 멜라니와 실랑이 중이었다.

이상을 추구하며 무대에 서는 벤튼, 그리고 현실에 집중하며 가족에게 몰두하는 멜라니.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

무엇이 정답인가?

그 세 가지가 없다면 살아도 죽은 것과 다름없어.

멜라니가 이혼 서류를 던지자 벤튼이 덜그럭 굳었다. 벤튼의 마지막 희망마저 부수겠다는 듯이 멜라니가 벤튼의 무대 포스터를 찢었다.

찢어진 종잇조각이 허공에서 힘없이 추락했다. 그 사이로 캐시의 짙푸른 눈이 보였다.

사랑, 음악, 꿈.

캐시의 발치로 종잇조각 하나가 굴러왔다. 캐시는 쓰레기가 된 그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도현도 함께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날.

듣기 좋은 말들은 전부 쓰레기가 되었다.

영화가 서막을 알렸다.

* * *

Think whatever you want.

After all Love, music, and dreams are all trash.

덩달아 심장이 쿵쿵 뛰는 신나는 비트와 함께, 한동안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밴드 곡이 흘러나온다.

화면 가득히 푸른 눈동자가 채워졌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푸른 눈은 무척이나 뜨거워 보였다. 손을 대면 델 것 같을 정도로. 딱 그만큼 소녀는 찬란했다.

그러니까, 괴짜인 것도 나쁘지 않잖아?

즐거움이 담긴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모든 소음이 일순 사라졌다. 어두워진 화면은 한동안 그 상태를 유지하다가, 천천히 제작자의 이름을 띄웠다.

“…우어.”

제이 로빈의 첫 등장 때는 도현을 쳐다보며 야유하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영화에 푹 빠져 집중하더니, 영화가 끝난 지금은 꿈에서 깬 몽롱한 낯으로 이상한 감탄사를 내었다.

“영화 진짜 좋다.”

한설아도 여운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녀는 이미 한번 을 본 적이 있었다. 유튜브에서 짧은 영상은 수없이 많이 봤고.

그런데도 오랜만에 다시 본 영화는 그녀에게 즐거움과 몰입, 그리고 어떤 향수를 선물해줬다. 한설아는 제 옆을 흘끔 돌아보았다.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청소년 영화는, 별똥별처럼 짧게 반짝이고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처럼의 영향력이나 화제성은 없을지언정 꾸준히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로 이름이 오르내렸다.

은 사실상 연말마다 돌아오는 가족 영화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중이었다. 비단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인기에 가까웠다.

아마 이번 연말에도 텔레비전 어디에선가 을 방영할지도 몰랐다. 작년, 재작년처럼 말이다.

교실이 다시금 시끄러워졌다. 저마다 영화에 대해서 떠들어댔다. 노래가 얼마나 좋은지, 마음이 얼마나 술렁이는지, 제이가 얼마나 귀여운지….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오가는데 도현은 그저 조용했다.

“…무슨 생각해?”

조심스럽게 꺼낸 질문에 도현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직 커튼을 걷지 않아서 교실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도현의 검은 눈동자는 햇빛 아래에서 그 특별함을 드러내지만, 이렇게 어둑한 곳에서는 시선을 강렬히 잡아끌었다. 두려워도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검은 숲처럼.

눈을 내리깔자 긴 속눈썹이 검은 윤기를 흘렸다. 모호한 흰 낯은 고요했다. 기실 도현은 말없이 있을 때면 무척이나 고요한 공기를 품었다. 어둑한 심해 속 정적같이 숨 막히는 고요보단, 오래된 성당에 둥둥 떠다니는 잿빛 먼지 같은 고요함이었다.

“그냥, 오늘따라… 친구가 보고 싶어서.”

나의 비밀을 공유한 친구. 또 제 비밀을 내어준 친구.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도현을 등지지 않을, 깊은 연대로 이어진 존재.

영화가 이어지는 내내 과거에서 현재로 이동한 도현은 니콜라스에게 그간의 일을 털어놓고 싶은 깊은 충동을 느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한설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친구?

‘루카 하퍼를 말하는 건가?’

저번에 사귀는 거 아니랬는데, 애틋한 표정을 보니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한설아가 저와 루카의 사이를 의심하는 것을 전혀 상상치도 못한 도현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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