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0화. 겨우내 웅크린 (18)
화면에 시선을 주자 막 59분이었던 게 4시 00분으로 넘어갔다. 핸드폰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전화를 걸어볼까, 말까.
오늘은 6교시뿐인 날이라 수업이 끝난 후 최대한 빠르게 집에 돌아왔다. 평소처럼 희운을 기다리지 않고 –일주일의 잠적 이후에 도현은 이전처럼 하교 시간마다 희운의 반에 갔다. 희운은 떨떠름했지만 도현은 당당했다. 동생 하굣길에 형이 동행하는 게 뭐가 이상한가. 심지어 희운은 아직 보호자가 필요한 열네 살이었다.- 문자로 양해를 구한 후 먼저 나왔다.
‘그렇게 서둘렀는데도 네 시네.’
서울에서 네 시면, 니콜라스가 있는 뉴욕은 새벽 두 시 경이다. 완전히 꿈나라에 가 있을 시간이었다.
심지어 니콜라스는 수영선수였고.
미련이 남은 손이 핸드폰을 만지작댔다. 도현은 이성과의 타협 끝에 간단한 문자만 보내놓기로 했다. 그가 알기로 니콜라스는 핸드폰의 알람을 켜두는 편이 아니니, 아마 다음 날 확인할 것이다.
[전화 가능할 때 알려줘.]
망설이다가 전송을 눌렀다. 문자가 잘 발송된 것을 확인한 도현은 침대 위로 늘어졌다. 방 전등을 켜지 않아서 창문을 타고 들어온 온색의 햇빛이 벽지와 흰 가구 위로 내려앉았다.
딱히 무언갈 할 의지도 생기지 않아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있었다. 늘 치열하게 생각하느라 바빠서, 이렇게 무의 상태로 있는 건 오랜만이었다. 들리는 거라곤 시계 초침 소리뿐이었다.
처음에는 편했지만, 갈수록 묘한 초조감이 일었다. 도현은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한 채 있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버릇처럼 다음에 할 행동을 떠올렸다.
그림이라도 그려볼까. 아니면 바이올린을 켤까? 머리를 비우려면 밖에서 달리고 들어와도 좋을 테고… 아니면 얼마 전부터 읽던 소설을 마저 읽어도 괜찮겠다.
다 귀찮으면 영화를 틀어놓자. 분석하다 보면 시간이 갈 테니.
오늘이 수요일이 아니란 게 아쉬웠다. 수요일이었으면 할리, 브라운과 함께 게임이라도 했을 텐데. 도현은 아쉬움을 접으며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켰다. 일단 계속 누워 있는 것보단 무언갈 하는 편이 좋을 거 같았다.
그렇게 미적미적 몸을 일으킬 때였다. 왼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부르르 떨렸다. 도현은 깜짝 놀라 핸드폰을 떨어트렸다. 떨어트려 봤자 침대 위라서 핸드폰은 계속 열심히 울려댔다.
도현의 입술이 벌어졌다.
“…니키?”
[니콜라스 가비]
화면에 선명하게 떠오른 이름은 분명, 도현이 그리워하던 이였다. 도현은 잠깐 넋을 놓고 눈을 깜빡였다. 지금 새벽 두 시가 넘었을 텐데….
도현이 아는 니콜라스는 아무리 늦어도 12시 전에는 잠들었다. 신체 컨디션을 위해서였다. 그게 니콜라스가 운동선수로서 가진 절제력이자 노력이었다.
‘혹시 내가 깨웠나?’
그런 생각에 미안해지면서도 슬슬 올라가는 입꼬리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도현은 제 뺨을 문지르다가 진동이 끊기기 전에 핸드폰을 들었다.
- 어, 받았네.
도현이 친애해 마지않는 목소리였다.
“니키. 혹시 내가 깨웠어?”
- 그건 아니고. 자다 깨서 물 마시던 중에 네 문자를 봐서. 그래서 무슨 일인데?
그런 거였구나. 적어도 도현이 보낸 문자가 그를 잠에서 꺼낸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도현은 아쉬움을 밀어내며 말했다.
“너 내일도 훈련 있잖아. 급한 일은 아니니까 지금은 자고 내일 시간 날 때 전화하자.”
- 싫어, 이미 잠 다 깼어.
“다시 눈 감으면 돼. 너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잠들잖아.”
- 그 정도는 아니거든? 그리고 안 들으면 궁금해서 잠 안 와.
언뜻 보면 그냥 별생각 없는 것 같았지만, 도현은 이게 니콜라스의 배려라는 걸 알았다. 도현이 니콜라스를 아는 만큼 니콜라스도 도현을 알았다. 특히 니콜라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현이 자주 ‘눅눅해’졌기 때문에 그는 도현의 변화에 예민한 편이었다.
그건 비단 니콜라스만의 특징이 아니긴 했다. 맥도, 진도. 도현의 기분에 놀라우리만치 섬세하게 반응했으니. …내가 주변인에게 걱정을 끼치는 편이었나?
나름 덤덤하게 굴었던 거 같은데.
묘한 억울함과 고마움에 간질거림을 느끼며 큼, 헛기침했다. 아무튼, 상대의 시간을 귀신같이 맞추던 도현이 갑자기 새벽 두 시에 문자를 보냈는데 니콜라스가 아무것도 모를 리가 없었다.
도현이 미안해할까 봐 고집을 부리는 거였다. 그에 도현은 다음 날 니콜라스의 훈련이 걱정되면서도 가슴께가 몽실몽실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이전이라면 칼같이 이성적인 판단을 따라서 니콜라스를 다독였을 것이다. 그리고 재웠겠지. 통화는 다음 날로 미루면서. 그런데 어째선지 도현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는 바라도 되지 않나. 딱 한 번인데.
친구한테 무언갈 바라거나 요구해본 적이 없던 도현에게 낯선 일이었다. …아마, 형이 가진 대범함이 도현의 강박적인 조심스러움을 누른 모양이었다. 도현은 또다시 발견한 변화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너무 피곤하면 말해.”
- 내 컨디션은 내가 조절해. 그래서 뭐냐니까?
니콜라스와는 많은 비밀을 나누었다. 진과 함께 셋이 있을 때 델마 입학 전에 병원에서 살았다는 걸 처음 밝혔으며, 후에 니콜라스의 부모님이 이혼할 때 과거 사람들이, 그리고 제 부모님이 저를 기피하고, 꺼렸던 것을 말했다.
그러나 모든 걸 밝히진 않았다.
나처럼 사람들에게 기피당하고 꺼려지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그가 나의 첫 친구이자 가족이며 형이 되어준 것도, 종래엔 내게 모든 것을 선물해주고 떠난 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때 당시엔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건 도현의 비밀이 아니라, 형의 비밀이었으니까. 도현이 멋대로 위로받기 위해 누군가에게 털어놓아도 될 문제가 아니니까.
그러나 도현과 형의 비밀이 구분이 없어진 지금. 도현은 어떻게 해야 할지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해도 니콜라스는 이해해줄 것이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유대는 그러한 것이니까. 도현은 니콜라스와 저 사이에 이어진 신뢰를 믿었다.
하지만….
- 어떻게 안 좋아하겠어….
어쩐지,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니콜라스가 도현을 불렀다. 도현은 너무 지저분하게 자란 생각의 잔가시들을 잘라내고 입을 열었다.
“내가 정말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 …뭐?
니콜라스의 목소리에 당혹이 깃들었다. 도현은 그가 무슨 상상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이상한 생각으로 뻗어나가기 전에 담담히 말했다.
“곧 기일이야.”
- …….
누군지, 왜 좋아하는지, 왜 이젠 없는지까지는 밝히지 않더라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한참 숨소리만 들렸다. 니콜라스의 당혹스러운 심정이 도현에게까지 느껴졌다. 새벽에 깨서 날벼락을 맞은 니콜라스에게 약간 미안해졌다.
뒤늦게 양심의 한 자락을 되찾은 도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다 말했으니까 이제 잘래?”
- 미쳤냐?
곧장 반박이 날아들었다.
도현이 생각해도 미친 말이긴 했다. 사실 반쯤은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것 같은 니콜라스를 건져내기 위함이었고. 머쓱하게 입을 다물자 니콜라스의 한숨이 들렸다. 그래도 아까보단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그가 힘겹게 더듬더듬 물었다.
- 그러니까… 기일이, 언제인데?
“이틀 뒤.”
- …….
다시금 말소리가 끊겼다.
도현이 친구들에게 쉽사리 많은 것을 말하지 않은 이유는 내적 문제뿐이 아니었다. 좋고 예쁜 것, 곱고 아름답고 향기 나는 것만 보고 듣고 느끼며 자라야 하는 친구들에게 짐을 얹어주는 게 탐탁지 않아서였다.
- 잠깐. 너, 그럼. 그간 이 시기에 학교에 안 나왔던 것도….
아. 니콜라스의 생각이 벌써 거기까지 닿은 모양이었다. 그때 학교에 결석했던 정확한 이유는 영혼의 균열 때문이었지만…. 근원적으로는 니콜라스가 생각하는 바와 틀리지 않았다.
도현이 부정하지 않자 탄식이 들려왔다. 앓는 소리를 낸 니콜라스가 부스럭댔다. 침대에서 내려온 모양이었다. 어쩐지 바르게 앉아 있을 그가 상상되었다.
도현은 니콜라스가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질책해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에게 숨기는 사실이 있었던 건 배신감을 느낄 법한 일이니.
하지만 니콜라스가 꺼낸 말은 정말로, 예상 밖이었다.
- 혹시, 그 사람이야? 그, 네가 예전에 그렸던….
“…….”
이번엔 니콜라스가 아니라 도현이 말문이 막혔다.
아무것도 모르리라 생각했던 니콜라스가 단박에 누군지 알아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니콜라스도 이렇게 짐작할 정도라면 진은, 부모님은 더 많은 것을 짐작하고 추론했으리란 사실을 직감해서였다.
그중 누구도 도현에게 묻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 순간 도현은 더 많은 진실에 가까워졌다. 진의 아버지, 밀턴은 음악 평론가였다. 그를 따라 수많은 공연장을 찾았던 진이 형을, 그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를 모를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렇게 문턱이 닳도록 도현의 다락방을 드나들면서, 몇 년 동안 그 그림을 눈에 담고. 그리고 도현이 그들에게만큼은 자주 들려주었던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면서. 정말로 몰랐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그 지니 레이시가.
“아….”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까 전 도현은 자연스럽게 연락할 대상으로 니콜라스를 떠올렸다. 진보다 니콜라스가 소중해서는 아니었다. 진도, 니콜라스도. 무게를 잴 수 없을 만치 귀하고 소중했다.
다만, 니콜라스는 진보다 더 도현을 닮아 있었다. 정말로 온전한 가정에서, 온전한 환경 속에서 다정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자란 진과 다르게 니콜라스는 불안정했다.
니콜라스와 도현은 서로의 불안정함을 알아보았다. 서로의 흠집이나 결함을 본능적으로 인지했고, 그리하여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음을 깨닫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걸 더 강렬하게 느끼는 건 도현이었다. 단순히 유대를 느끼는 니콜라스와 달리 도현은 이게 제 친구를 잡아둘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수단이란 걸 알았다.
그리하여 니콜라스에게는 제 결함을 내비치며 곁에 잡아두었고, 진에게는 온전하고 다정한,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며 떠나지 못하게 했다. 솔직히 음습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면.
진이 도현의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았고, 그럼에도 눈을 감은 거라면. 아무것도 모른 척 도현의 뜻을 따라준 거였다면….
도현은 형용할 수 없는 심정이 되어 입 안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쩌면, 진은 도현이 직접 말해주길 기다린 건지도 몰랐다. 아니, 진이라면 그랬을 터였다. 무척 다정한 애니까.
한 발짝 물러서서 도현을 기민하게 관찰하고. 알아낸 사실 중에서 도현이 원치 않는 게 있다면 모르는 척 숨기고….
도현은 니콜라스가 전학을 갈 때, 그와 자신이 만나 얘기를 나누었다는 걸 듣고서도 가만히 수긍했던 진을 떠올렸다. 그 깊은 금갈색 눈동자도.
어쩌면 진은 니콜라스와 도현의 사이에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 오갔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 소중한 친구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으니, 이해하기를 선택한 거겠지.
도현은 진을 조금 더 완전히 이해한 느낌이 들었다.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 결국, 그냥 진도, 니콜라스도, 도현도… 서로를 아꼈을 뿐이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치열하게.
- 미안, 말 잘못했다. 내가 이상한 얘기를 꺼내서….
“아니야. 맞아.”
- …….
“맞아, 그 사람.”
내가 제일 사랑하는 형이야.
뒤따른 말은 거의 한숨처럼 새어 나왔다. 문장에 숨결이 섞여, 배 속을 무겁게 누르던 무언가가 함께 빠져나간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