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1화. 겨우내 웅크린 (19)
니콜라스는 어느 순간 숨을 쉬는 걸 잊었다. 언제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목소리는 이 순간에조차 다정했지만, 단어와 단어 사이에 녹아든 숨결에서 눅눅한 잔향이 맡아졌다.
- 늦게 말해서 미안해.
네가 사과를 왜 하냐.
답답함이 치솟았다. 뉴욕 생활이 마음에 안 든 적은 별로 없었는데 오늘만큼은 굉장히 별로였다.
찾아갈 수도, 옆에 있을 수도 없다.
니콜라스에게 도현은 참 의뭉스러운 친구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쭉 그랬다. 단정하게 웃는 낯과 어른스러운 성격은 늘 무언가를 꼭꼭 숨겨둔 보물 상자 같았다.
그와 조금씩 친해지면서도 니콜라스는 그가 감춰둔 것을 평생 모를 수 있겠다 생각했다. 도현은 훌륭한 연기자였으니까. 그가 말하지 않고자 한다면 니콜라스는 영영 알 수 없다. 아무것도.
하지만 도현은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평생 감춰둘 수 있었을 텐데 숨기지 않았다.
처음에는 병실에서 살았던 제 과거를. 그다음에는 부모님과 엮인 비상식적인 비극을. 이 순간에는 그가 겪은 가장 큰 슬픔을.
느리지만 한 걸음씩, 다가오기를 멈추지 않는다. 처음의 그가 얼마나 비밀스럽고 의뭉스러운 이였는지 아는 니콜라스는 도현이 그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며 말을 잃곤 했다.
니콜라스는 아주 멍청하진 않지만, 진이나 도현처럼 유별나게 똑똑하지도 않다. 그건 스스로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딱히 부정하고픈 생각도 없고.
그럼에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니콜라스는 도현이 얼마나 깊은 눈으로 그림 속의 남자를 보는지 알았다. 가끔은 아무 말 없이 멍하니 넋을 놓을 때도 있었는데, 그러면 진과 니콜라스는 도현을 방해하지 않으려 숨을 죽였다. 그 순간의 도현은 무척이나 행복하고, 또 무척이나 외로워 보였으니까.
텅 빈 표정은 건들면 그대로 부스러질 것 같아 겁이 났다. 진도, 니콜라스도. 그래서 두 사람 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부스러지는 꼴을 보느니, 그냥 아무것도 못 본 셈 치는 게 나았다.
그때 검은 눈에 어렸던 감정이 무엇인지 이제는 확실히 알지만.
니콜라스는 가슴께가 꽉 조이는 듯했다. 안타까움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저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자연을 봤을 때 느끼는 슬픔처럼, 알 수 없는 서러움과 애틋함이었다.
니콜라스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여기가 뉴욕이라서 다행이다. 지금 도현이 눈앞에 있었으면 머저리 같은 표정을 그대로 보여줬을 테니까.
니콜라스는 잠긴 목소리를 들키지 않으려 작게 헛기침했다.
“어디가 좋았는데?”
- 응?
“네가 제일 사랑한다며. 어디가 그렇게 좋았는데?”
니콜라스는 진처럼 섬세한 위로를 할 줄 몰랐다. 상대의 반응을 살피며 적절한 대처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낯설고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말을 삼킬 법하지만, 니콜라스는 그러지 않았다. 도현이 제 말을 곡해해서 받아들일 리 없다는 믿음이었다. 그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물었다.
- 그런 얘기, 나눠본 적 없는데….
“어차피 나 그 사람 누군지 몰라. 그러니까 그냥 말해. 뭔가 말하고 싶어서 전화한 거 아니야.”
니콜라스는 도현의 나쁜 습관을 알았다. 도현은 툭하면 입을 다물었다. 말하지 않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삭였다. 그는 도현이 그의 부모님과 관련된 문제를 대할 때처럼, 홀로 삼키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니콜라스의 휴대폰 너머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그게 뚝 멈추었을 때. 니콜라스는 반사적으로 도현을 따라 숨을 멈추었다.
- 막상 말하려니까 어렵다.
싱거운 대답에 니콜라스의 긴장도 쭉 빠지고 말았다. 무의식중에 힘이 들어갔던 어깨가 부드럽게 풀렸다. 니콜라스는 가벼운 실소와 함께 생각했다.
그 이도현이 제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몇 년을 잊지 못해서 기일만 되면 학교를 빠지게 했던 사람이고, 보아하니 틈만 나면 도리토스를 눅눅해지게 한 범인 같기도 했다.
몇 년 만에 범인을 검거했지만, 니콜라스는 적의와 아니꼬움 대신에 의문을 띠었다.
누구길래. 대체 어떤 의미였길래?
충격으로 인해 기를 펴지 못했던 궁금증이 조금씩 몸집을 부풀렸다.
그가 궁금해하는 건 당연했다.
어떻게 해야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맹목적으로 좋아할 수 있는지, 헌신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지 누구나 의문이 들 법하니까. 솔직히 약간은 부럽기도 하고….
그때,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 처음이었어.
감정적인 흥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애꿎은 니콜라스에게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 누군가랑 친근하게 대화를 나눈 것도, 장난을 친 것도, 웃어본 것도, 온기를 느껴본 것도, 그렇게 오래 같이 있어 본 것도.
가끔, 제 옆에 있는 게 얼마나 찬란히 반짝이는지 깨닫는 순간이 있다.
그러니까 이럴 때.
그렇게 선이 뚜렷하면서 니콜라스에게는 쉬이 허물 때, 당연하다는 듯이 진심을 털어놓을 때.
비극이라 칭해도 마땅한 그 모든 일을 겪고도 무너지거나 절망하는 게 아니라, 담담히 감내하며 또 한 발자국 나아가려 할 때.
니콜라스는 도현이 얼마나 대단하고 빛나는 존재인지 새삼스럽게 깨닫곤 했다.
- 딱히 특별한 걸 한 건 아니었는데… 그래서 그렇게 특별하게 느껴졌나 봐.
아마 도현은 니콜라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일 것이다.
니콜라스는 부모님의 불화와 이혼만으로도 그렇게 힘들어했는데, 도현이 겪은 것은 그보다 더한 이별이었다.
이제 니콜라스는 조금이지만 알았다. 부모님이 이혼한다고 해서 그가 버려지는 건 아니란 것을. 엄마와 아빠는 여전히 나름의 방식으로 니콜라스를 아끼고 사랑했다.
그것을 깨닫자 니콜라스는 점차 안정되어 갔다.
그러나 도현은 아니다.
도현은 니콜라스가 받은 만큼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도현의 부모님은 여전히 도현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짐작건대 도현이 기댈 수 있는 어른은 지금 말하는 사람뿐이었을 거다. 그 외의 사람을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으니까. 그 의미가 얼마나 남달랐을지, 니콜라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 존재를 잃었다.
그런 존재를 잃고도, 이만큼이나 견뎌내어,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데 어떻게 강한 사람이 아닐 수 있을까?
도현은 어디서든 눈에 띄는 편이었다. 그의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도현은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존재감이 있었다.
그 존재감은 그가 유명한 배우여서도, 뛰어난 외모를 가져서도, 똑똑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도현이라는 사람 자체가 이렇게 단단하고 반짝여서, 본능적으로 알아본 사람들이 반응한 것이다.
때때로 그는 도현을 만난 게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도현의 옆에 있다 보면 당연한 하루가 당연하지 않은 것 같고, 매일매일을 열심히 살아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으니까.
니콜라스가 유명한 수영 클럽에 들어오게 된 것도 반쯤은 도현에게 물든 거고.
그런 대단한 친구에게 니콜라스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사실 니콜라스는 별로 자신이 없었다. 니콜라스가 도현보다 잘하는 것이라곤 수영밖에 없었으니까.
“네가 특별하게 느꼈으면 특별했던 거겠지.”
- 하하, 그런가?
“그래서, 어쩌다 만난 사람인데?”
- 음… 말하자면 긴데.
“어차피 잠 다 깼다니까.”
퉁명스러운 대답에 웃음기 어린 대답이 돌아온다. 도현은 조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의 배경은 어느 가을날이었다. 도현이 멋대로 병실을 빠져나가 공원에서 사람들을 구경하던 날.
니콜라스도 도현과 함께 겨울에서 가을로 되돌아갔다. 니콜라스는 도현에게 멋들어진 조언도, 도움도, 위로도 줄 수 없지만…. 그래도 그가 덜 외롭게 옆에 있어 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소슬바람을 닮은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함께 밤이 깊어져 갔다.
두루뭉술하게 피어나는 기억 속에서 꼭 지금과 같았던 순간이 있었다. 그때는 서로 눈앞에 두고 시선을 나누었지만. 비행기로 열네 시간 걸리는 거리에서 휴대폰을 붙잡고 있는 지금도 그리 다르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화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나지막한 오후의 해가 지고 서늘한 밤공기가 코끝을 스칠 때까지.
무슨 말을 그리도 많이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시간을 인지했을 땐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도현은 시계를 확인하고 나서야 니콜라스의 목소리에 묻어난 졸음기를 인지했다.
지금 자도 얼마 못 잘 텐데.
뒤이어 미안함이 몰려왔다. 도현이 이만 끊자고 하자 니콜라스가 뭐라 웅얼대며 말해왔다. 대충 괜찮다는 뜻인 거 같았다. 도현은 안 가려고 버티는 니콜라스를 어르고 달래서 통화를 마무리했다.
통화를 완전히 끊기 전, 도현은 짤막하게 말했다.
“고마워. 나 사실 말할 사람이 필요했나 봐.”
- 으응….
반쯤 잠에 먹힌 대답이었다.
도현은 웃으며 그를 보내 주었지만, 그 후로도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한참이나 말없이 쳐다보았다.
초저녁 공기 속에서 푸른 화면만 고요히 반짝였다. 술렁이던 파문은 어느새 잔잔히 가라앉은 후였다. 도현은 가느다란 숨을 내쉬었다.
이 시기에 형을 떠올리고도 이토록 평온한 적이 있었던가. 그의 기일이 가까워지면 어쩔 수 없는 슬픔과 서러움에 가득 차, 영혼 탓인지, 속앓이 탓인지 알 수 없는 것으로 고생했다.
그러나 도현은 지금 무척이나 담담했다. 애틋한 그리움에 잠기고, 평생토록 털어낼 수 없을 미련과 후회가 발목을 잡긴 하지만, 그건 거센 풍랑이라기보단 나무배 아래로 흐르는 잔잔한 물결이었다.
전화는 끊겼지만, 도현은 여전히 과거를 곱씹고 있었다. 퇴근해 집에 돌아온 부모님을 맞이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도현은 침대 위에서 홀로 긴 생각에 빠졌다.
밤이 새벽이 되고,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새벽을 밀어내고 기어이 아침을 불러올 때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기억 속에서 유영했다.
마침내 해가 방 안에 침범했을 때, 도현은 니콜라스에게 그가 누구며 그를 어떻게 잃었는지 말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도현은 니콜라스를 소중한 친구로 여겼지만, 동시에 희운을 제 동생으로 아꼈다.
그냥, 그런 거였다.
도현이 제 친구에게 비밀을 밝혔듯이, 형 또한 제 비밀을 누군가에게 말하게 된다면, 그 첫 대상이 제 동생이길 바라는 거였다.
도현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고는, 누군가 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작게 읊조렸다. 그래도 그건 조금 나중으로 미룰게요. 형이 생각해도 걔가 알기엔 조금 이르잖아요.
묵묵한 정적 속에서 도현은 대답이라도 들은 것처럼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뒤늦은 수마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