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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462화 (463/582)

제462화. 겨우내 웅크린 (20)

도현은 외면당해 왔던 제 욕망을 바로 이해했다.

사실은, 형에 관해서 누구에게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홀로 침묵 속에서 기억을 되짚는 게 아니라, 온기를 가진 누군가와 추억 혹은 미련을 공유하고, 공감받기를.

아주 가끔, 도현은 형을 기억하는 게 혼자만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그를 기억하는 건 나뿐이고, 아무도 그 존재를 모른다는…. 형이 그 정희성인 이상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래서 더욱 덩어리 님에게 의존했다. 그가 도현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형을 기억하고, 공유하는 존재이니까. 그 존재가 형의 흔적을 증명해주는 것 같아서. 그게 사무치도록 허전한 심장에 작은 빛줄기가 되어주었다.

너 혼자 기억하는 게 아니라고.

그는 분명히 이 세상에 존재했다고….

“…아, 도현아.”

희미한 음성이 귀 주변을 웅웅 맴돌았다. 미간을 좁히던 도현은 어깨에 와닿는 조심스러운 손길에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도현아, 깼니?”

검은 눈이 몽롱하게 두어 번 깜빡인 후 초점을 되찾았다. 눈앞에 보이는 건… 서혜나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이 한아름 어려 있었다.

“많이 피곤해? 네가 아침에 못 일어나는 건 처음인데…. 혹시 어디 아파, 도현아?”

아, 짧게 숨을 토해낸 도현이 시선을 굴려 벽에 붙은 시계를 확인했다. 8시….

8시?

벌떡, 누워 있던 몸을 급하게 일으켰다. 도현이 한껏 흔들리는 눈으로 서혜나를 보는데 그녀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혹시 어디 아픈 거면 병원 갈까? 잠깐, 열 좀 재 보자. 손으로 쟀을 땐 괜찮아 보이긴 하는데….”

손바닥으로 도현의 이마를 짚던 서혜나가 체온계를 가져오려는 듯 구부정하던 몸을 펴자 도현이 다급히 말렸다.

“저 괜찮아요. 어디 아픈 거 아니고, 그냥 피곤한 거예요.”

“도현아, 요즘 많이 무리했어?”

아마 도현의 피곤을 학업과 엔터 일의 병행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도현은 어색하게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안 되겠다. 오늘은 학교 쉬자. 무리하지 말고 집에서 그냥 푹 쉬고, 내일 가는 게 좋겠어. 담임 선생님한테는 엄마가 연락할 테니까 도현이 너는 걱정하지 말고.”

“저 진짜 괜찮아요. 학교 갈 수 있어요.”

물론 지각은 이미 예정이지만.

가연 예술 중학교의 등교 시간은 8시 반이었다. 지금부터 챙겨서 부모님의 차를 빌려 탄다 한들 지각을 면할 수는 없었다. 이미 지각이 확정이라 생각하고 나니 도리어 느긋해진 도현이 침대 밖으로 다리 하나를 내렸다.

그리고 어깨를 누르는 손길에 의해 다시금 침대에 올려졌다.

“엄마?”

검은 눈이 의아하게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서혜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오늘은 쉬어. 엄마가 너 피곤한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무리하지 마, 도현아.”

“…….”

차라리 말할까.

밤새 생각할 게 있느라 잠을 못 잤다는 것과 그동안 무리해서 피곤이 쌓였다는 것, 둘 다 듣기에 썩 좋진 않았다. 그래도 이러다가 아들이 무리하는 것도 모르고 일을 시켰다고 자책할 기세라서 힘겹게 입술을 뗐다.

“저 무리한 거 아니에요. 무리한 거 아니고… 생각할 게 조금 있었거든요. 그래서 늦게 잠들었더니 못 일어난 거뿐이에요.”

“얼마나 늦게 잤길래?”

“한….”

“한?”

“다섯 시쯤….”

서혜나의 표정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어째… 아까보다 조금 더 무거워진 분위기였다.

나 실수했나. 도현은 도륵도륵 눈동자만 굴렸다.

“도현아.”

“네.”

찔끔한 도현이 조금 뻣뻣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깊은 눈으로 도현을 응시하던 서혜나가 입을 열었다.

“우리 미국 갈까?”

그 말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둘 사이에 시계 초침 소리가 지나갔다. 마침내 말뜻을 이해한 도현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서혜나는 도현의 놀란 표정에도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한국에 온 뒤로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았어.”

“그건,”

“들어봐, 도현아. 엄마는 물론 아빠랑 같이 한국에 있는 게 좋아. 좋은데, 근데 도현이 네가 더 중요해. 네가 건강하고 행복한 거. 그거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어. 엄마뿐만 아니라 아빠도 마찬가지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도현아.”

오늘따라 서혜나에게서 무시할 수 없는 기세가 흘렀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그의 얼굴에 미약한 후회의 빛이 스쳤다.

그냥 일 때문에 무리한 척할걸.

일이 이런 식으로 흐르게 될 줄 알았으면….

“이번 일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도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기가 막힌 타이밍의 대답이었다. 서혜나가 천천히 도현의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시선이 제법 엇비슷하게 마주쳤다.

“한국에 온 뒤로… 네가 여러모로 혼란스러워하는 거 같았어. 그런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거니까, 그 과정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도현은 금방 알아챘다. 아마, 희운을 처음 발견한 후의 이야기일 것이다. 도현은 그때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종종 넋을 놓고는 했으니까.

심지어 희운을 피하겠답시고 ‘구미호뎐’ 촬영이 끝났는데도 학교에 돌아가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정을 소화하지 않았나. 그게 부모님에게 전달이 안 될 리가 없었다.

“기다려 보니까 네가 점점 괜찮아지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엄마랑 아빠도 안심했지. 아, 이제 도현이가 한국에 적응했구나. 그랬는데… 너한테 견디기 힘든 일들이 너무 많이 생기는 거야.”

생각나는 게 매우 많았다.

‘왕의 길’ 촬영장에서의 인성 논란, 학교 폭력 논란과 그로 인한 각종 루머와 악플까지….

심지어 학교 폭력 논란을 일으킨 건 도현의 학교 선배였다. 그로 인해 부모님은 도현이 학교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모두 알게 된 상태였다.

“그때 엄마 아빠 많이 후회했어. 우리 욕심에 널 여기로 데려왔구나. 네가 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을 우리가 기어이 시켰구나. 우리가.”

서혜나의 낯에 고통이 스쳤다.

도현은 당혹스럽고도 생경한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당장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그러기엔 서혜나가 너무 힘들어 보였다. 이대로 도현이 괜찮다고, 그러니 신경 쓰지 말라고 단호히 말하면 그녀는 꼭… 쓰러질 것만 같았다.

왜 그때 말하지 않았을까.

의문에 대한 답은 금방 나왔다.

도현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현은 논란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 부모님이 신경 쓰는 걸 탐탁지 않아 했다. 그의 일에 타인이 과도하게 걱정하는 게 부담스러워서였고… 더 진실하게 말하자면, 조금은 성가셨다.

도현은 홀로 문제를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인성 논란도, 학교 폭력 논란도, 그 외의 것도. 부모님의 도움 없이 혼자서 충분히 해결할 능력이 있었고, 실제로 해내었다.

그런 도현에게 부모님의 과도한 관심이나 걱정은 부담스러운 짐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걸 부모님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더라면. 그렇다면 침묵했겠지.

지금처럼.

“그래도 네가 괜찮아하는 것 같아서. 우리도 조금 생각해 보기로 했거든. 지금 미국에 가자고 하면 너를 더 힘들게 하는 거 아닐까 해서. 도현이 너는 괜찮은데, 너를 보는 게 힘든 우리가 또 욕심부리는 거면 안 되니까….”

도현은 한국에 온 후로 부모님이 저를 자유롭게 놔둔다고 생각했다. 그게 그냥, 도현에 대한 믿음인 줄 알았다.

믿음이 아니라 인내였다.

“그 후로 너도 정말 잘 지내서 역시 말하지 않길 잘했다, 기다려보길 잘했다 했지. 그런데 도현아. 요즘은 그게 엄마가 또 실수한 게 아닐까 싶어. 너를 너무 어른으로 봐서 네게 부담을 준 게 아닐까 싶어서, 그래서 너무….”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서혜나의 깊은숨과 함께 공기는 한없이 가라앉았다.

그들은 또다시 도현을 기다려 보기로 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시간대에, 도현은 희운과 새솔에서 형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혼란에 빠졌다.

변명하자면 할 건 많았다.

다른 건 생각할 틈도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고, 힘들었다고. 그러나 그런 변명이 지금 의미가 있나?

부모님은 또다시 이유도 모른 채 방에 틀어박힌 아들을 보았다. 심지어 학교도 일주일씩이나 빠지면서. 도현은 그 시간 동안 부모님이 학교에 양해를 구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도현이 말하길 원치 않아서 많은 건 묻지 않고. 그저 도현이 원하는 대로, 그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뒤에서 조용히 일을 도와주었다.

이제껏 부모님이 그를 건드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저 두 사람이 도현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이미 힘든 도현을 더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 최대한 거슬리지 않게 군 거였다.

아. 한국에서의 행적을 돌이켜 본 도현은 처음으로 그것을 부모님의 시선에서 바라보았고, 또 그들이 얼마나 도현을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는지 알게 됐다.

“미국은….”

도현의 입술이 달싹였다.

솔직히 그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나? 지금 당장 짐을 싸서 미국에 가 버리면 머리 아픈 일들 여러 개가 해결되어 버린다.

하지만, 알지 않나.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그리고 이곳엔 희운이 있었다. 이젠 도현이 보호해야 할 대상이.

그리고 도현은 알았다. 도현이 미국에 있지 않다고 해서 그의 소중한 인연과 멀어지는 건 아니었다. 어제 니콜라스와 도현은 분명 미국과 한국에 있었지만, 동시에 같은 공간에 존재했다. 그 믿음이 도현을 굳건히 만들었다.

“그건 괜찮아요.”

도현은 서혜나가 반박하기 전에 얼른 뒷말을 이었다.

“하지만 말씀처럼 학교는 하루 쉴게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름의 협상안이었다. 둘 다 괜찮다고 하면 서혜나는 분명 걱정을 버리지 못할 테니까. 일종의 휴전 선언이기도 했다.

“…그래. 그럼 엄마가 오늘 너 아파서 학교 못 간다고 말씀드릴게. 도현이 너는 아무 걱정 하지 말고 푹 쉬어. 미국은… 그건 바로 결정하지 말고 조금 더 고민해 보고.”

여기서 곧장 싫다고 해봐야 그녀를 설득할 수는 없다는 걸 아는 도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편안한 낯이 된 서혜나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한쪽으로 쏠렸던 침대가 다시 균형을 찾았다.

서혜나는 푹 쉬라는 말을 남긴 후 방을 나섰다. 문 앞에서 이장혁이 기다리고 있었는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그건 조용한 발소리와 함께 곧 멀어졌다.

방에 홀로 남은 도현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눈만 멀거니 깜빡였다. 그리고 침대 한쪽에서 우웅, 울리는 핸드폰에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2반 서일준 : 너 오늘 스케줄?]

8시 31분. 메시지 위로 시간이 도현을 놀리듯이 깜빡거렸다. 서혜나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시간이 지나버렸는지 이미 등교 시간을 넘긴 후였다.

“하아….”

도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쉬는 숨결까지 엉망으로 꼬인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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