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3화. 겨우내 웅크린 (21)
미국, 미국이라니.
설마 그 말이 부모님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정말 몰랐던 건지, 아니면 관심이 없었던 건지는 모호했지만.
복잡한 와중에 고민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부모님을 탓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긴 고민 끝에 꺼낸 말일 게 뻔해서,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대신 애꿎은 머리카락만 엉망으로 헤집었다. 그러다 거울에 비친 까치집을 보고 타격이 왔다. 나 왜 이러고 있지.
다시 머리카락을 단정히 한 도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에 납이 얹힌 것처럼 답답해서 창문을 활짝 연 도현은 의미 없이 바깥에 시선을 고정했다.
단정한 낯 아래. 격한 풍랑이 해일처럼 몰아쳤다.
미국, 기일, 정희운, 부모님, 덩어리 님, 영혼.
교집합이 존재하면서도 독립적인 문제들이 머릿속을 제멋대로 헤집어 놓았다. 하나를 들여다보면 다른 하나가 농락하듯이 툭 튀어 올랐다. 그것을 잡으러 가면 다른 하나가 또 이상한 곳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식이다. 그 가운데서 도현은 오도 가도 못 했다.
내가 이렇게 멀티가 안 되는 사람이었다니.
인정하기 싫은 진실과 마주한 도현은 씁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무능력한 자신을 향한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아쉬움은 도현을 오래 잡아놓지 못했다.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일단 이 상황을 좀 어떻게 해야 할 텐데. 입술 사이로 막막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 도현을 놀리듯이 낙엽 하나가 창틀로 굴러 들어왔다.
“모르겠다….”
도현은 눈을 내리감았다.
그대로 깜빡 졸았나 보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도현이 몽롱하게 눈을 깜빡였다. 문밖에서 밥 먹으러 나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너무 늦기 전에 적절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창틀에 기대어 있었던 탓에 어깨가 뻐근했다. 한 손으로 어깨를 주무른 도현이 느릿하게 한 걸음 움직였다. 나가기 싫다는 듯이, 미적대는 움직임이었다.
주방에 가자 먼저 와 있던 부모님이 여느 때처럼 도현을 반겨주었다. 이미 완벽하게 차려진 상에 도현은 부모님이 일부러 자신을 늦게 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다. 그들이 늦게 부른 게 아니라 도현이 깜빡한 것이었다. 본래 도현은 부모님이 부르기 전에 나와서 옆에서 식사 준비를 거들었으니까.
도현의 표정이 조금 민망함으로 물들었다. 그 기색을 모를 리 없건만, 부모님은 그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맛있는 반찬을 앞에 밀어줄 뿐이었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입 안에 밀어 넣던 도현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저….”
“응?”
“회사는요?”
방에서 나오기 전에 확인한 시계는 아홉 시와 열 시 사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출근 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아, 아빠는 이따가 갈 거야. 엄마는 오늘 휴가.”
그 휴가 누구 때문에 낸 건지 알 것 같았다. 근데 CEO도 휴가를 내던가. 그럼 누구한테 내는 거지…?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다시금 음식을 씹었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 없는 식사 시간이 이어졌다.
서혜나의 말대로 이장혁은 아침 식사를 끝낸 후 출근했다. 서혜나와 함께 그를 배웅한 도현은 도로 방으로 들어왔다가, 차 한잔 마시겠냐는 서혜나의 질문에 다시 거실로 나왔다.
향긋한 차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활짝 열어놓은 커튼 사이에 자리한 통창이 거실에 환한 햇빛을 드리웠다. 도현은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 도현을 기민하게 살피던 서혜나가 조심스레 말문을 뗐다.
“도현아, 아까 엄마가 했던 말.”
“네.”
“그거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거 아니야. 천천히 고민해도 돼. 어차피 곧 있으면 방학이니까.”
도현은 제 뺨을 문질렀다.
그렇게 겉으로 티가 났나. 차를 마시자길래 할 말이 있는 건 알았는데… 이 말을 해주려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말이 옳다. 성급히 결정할 필요 없는 문제였다. 결정한다 해도 부모님이 쉬이 받아들일지도 모르겠고. 그러니 천천히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다가, 적당한 때에 말을 꺼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도현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형….’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해요…?
아까부터 저를 충동질하는 이 성질머리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도현은 아랫입술을 핥았다. 쌉싸름한 차의 맛이 퍼졌다.
스읍, 숨을 들이마신 도현이 차분히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이미 과부하였다. 내일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작은 머리통은 꽉 차버렸다. 이 순간 이 문제로 고민하고 신경 쓰는 것도 사실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래, 도현은 이쯤 해서 자신의 본심을 인정했다. 내일은 그에게 여러모로 의미가 큰 날이었다. 형의 기일이자, 영혼이 하나가 된 후 처음으로 맞이한 날이며, 동시에 정희운을 만난 후로도 처음인 날이었다. 그런 날이 무겁게 다가오지 않을 리가.
도현의 완벽주의자적인 면모는 이러한 부분에서도 영향을 발휘했다. 그는 그날이 완전무결하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형과 나, 정희운, 덩어리 님… 그 외의 문제가 끼어드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구구절절 말했지만, 결국엔 그거였다.
신경 쓸 문제가 느는 게 싫다는 거.
인정하고 나니 실행하기는 쉬웠다. 속에서부터 울리는 충동에 슬쩍 발을 올리면 되는 일이니.
“고민해 보라고 하셨지만, 제 생각은 여전해요. 여전할 거고요. 전 여기 있을 거예요.”
그 순간 공기가 경직되었다.
서혜나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도현이 이렇게 곧장 반응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듯이.
도현도 공감했다.
평소라면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한 후, 삽질도 한 번, 아니 다섯 번은 하고 나서야 말 한 마디 꺼내 보았을 테니까.
“도현아, 그렇게 빠르게 결정하기는 어려운 문제잖아. 조금 더 천천히 생각해보자. 당장 가자는 거 아니니까….”
다정히 어르는 음성이다.
하지만 말을 꺼낸 순간부터, 도현의 마음은 확고하게 기울었다. 내일은 도현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날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형과 정희운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싶었다.
“생각해도 변하는 건 없어요.”
그러려면 이 문제부터 매듭지어야 했다.
“도현아.”
“저를 걱정하신 건 이해해요. 한국에 온 후로 제가 조금 이상하기는 했으니까요. 그 부분은 저도 인정해요. 그로 인해 두 분이 죄책감을 느낀 것도 이해했어요.”
약간 성급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딱히 문제 될 것도 없지 않은가. 어차피 오래 고민한다고 해서 도현의 생각이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곳에 정희운이 있는 한은 그랬다.
“그런 오해가 빚어질 만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이상했던 건, 자세히는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국에 온 것 때문은 아니에요. 미국에 있었더라도 언젠가는 마주할 문제였어요.”
이 부분만큼은 확신했다.
영혼은 결국 익숙한 것을 찾아간다. 도현은 이번에 한국에 오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분명히 정희운을 만났을 터였다. 만나고, 결국에는 마음을 내주었겠지.
“오히려 전 제가 한국에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 덕에 더 늦지 않고 정희운에게 그가 누려야 할 것을 돌려줄 기회가 생겼을뿐더러, 영혼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이 정도면 다행인 수준을 넘어서 행운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실수하신 거 아니에요.”
진심을 담뿍 담아 서혜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도현은 쐐기를 박기 위해 단호히 말했다.
“미국엔 가지 않아요. 적어도 지금은요.”
* * *
걱정과 이해를 말하는 낯은 한없이 이성적이었다. 선택한 단어들은 모두 차분하고, 또한 배려가 묻어 있었음에도 서혜나는 차가워지는 심장을 느꼈다.
가끔, 부모의 직감은 무서우리만치 정확하다.
“그런 오해가 빚어질 만했다고 생각해요. 그에 관해서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건 한국에 온 것 때문은 아니에요. 미국에 있었더라도 언젠가는 마주할 문제였어요.”
저 말은 진심일 것이다.
도현은 이런 상황에서, 그런 거짓말을 입에 담는 성정이 아니었으니. 언제나 배려심 넘치고 착한 아들은 이 순간에조차 그녀를 안심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녀는 자꾸만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차분히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와 설득하려는 말씨, 태도. 그 모든 것에서 미약하게 성급함이 묻어났다.
“오히려 전 제가 한국에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만치 아주 미약하게.
“실수하신 거 아니에요.”
다정한 말이었다.
네게 실수를 했을까 봐 두렵다는 이에게 건네기에 참 적절한 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결여한 말이기도 했다.
왜?
왜 자꾸 이리도 선득한 기분이 든단 말인가.
언제 보아도 사랑스럽고 애틋한 검은 눈이 그녀를 향했다. 두 눈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미국엔 가지 않아요. 적어도 지금은요.”
“아….”
서헤나는 이 순간 그녀가 사늘함을 느끼는 이유를 깨달았다. 도현이 말하는 것은 오직 한국에 있어야 할 이유에 관해서다.
서혜나의 뺨이 창백해졌다.
그들의 걱정은 거기에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 * *
잠깐 침묵하던 서혜나는 도현의 뜻을 받아들였다.
다만, 오늘 하루 쉬도록 한 것은 물리지 않았다. 그건 도현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 또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티타임 이후 다시 본래의 분위기로 돌아와 대화를 나누고 방에 들어온 도현은 꽤 만족스러운 심정이 되었다. 일이 더 이상하게 흘러가기 전에 빠르게 해결했다는 데서 온 만족감이었다.
그러나 도현은 알지 못했다.
도현이 방에 들어간 후 거실에 남은 서혜나의 표정이 지독하리만치 고요했다는 것도. 납덩이처럼 무거운 한숨이 침묵을 채웠다는 것도.
그건 도현이 알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 사이에 이루어진 게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통보였으며, 그것을 서혜나는 인지하고 도현은 모른다는 것. 그 이유가 그들 관계에 명확한 상하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거나. 혹은 힘겹게 용기 내어 다가온 그들을 자신이 단숨에 잘라내었다는 것 따위를.
한 번도 감정적인 위치에서 우위를 점해본 적이 없고, 여전히 부모님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는 도현은 알 수는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