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64화 (465/582)

제464화. 겨우내 웅크린 (22)

우연히 생긴 남는 시간에 도현은 책을 꺼냈다. 책갈피가 꽂힌 부분을 펼쳤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페이지는 한 시간이 다 가도록 넘어가지 않았다. 결국 책을 도로 덮었다.

차라리 등교하는 편이 좋았을까.

시간이 너무 안 갔다. 두꺼운 책 표지 위로 무거운 한숨이 내려앉았다. 소속사라도 들를까. 매니저 형이 시간 날 때 들러달라고 하기도 했고….

도현의 사고는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기보다 바깥에 나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집에 있다간 종일 초침 소리만 듣고 있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곧장 샤워를 마치고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검은색 모자까지 꾹 눌러쓰자 온통 검은색 일색의 소년이 보였다. 모자의 챙이 눈 밑에 깊은 그늘을 만들어냈다. 그것을 잠시 응시하던 도현은 금방 시선을 돌렸다.

“어디 가니?”

외출하려는 기색으로 방 밖에 나오자 거실에 있던 서혜나가 말을 걸었다. 약간은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소속사 다녀오려고요. 저녁 전에는 돌아올게요.”

“집에서 쉬지 않고….”

“몸이 안 좋은 게 아니라 생각이 많은 거였으니까요. 집에 있는 것보다 밖에 나가서 걷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같이 가줄까? 차로 태워다줄 수 있는데.”

“혼자 걷고 싶어서 그래요.”

이랬던 날이 과거에도 있었던 거 같은데. 아마도 리암을 처음 만난 날이었을 거다. 그날도 도현은 생각이 많았고,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무작정 밖에 나가길 선택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어떤 부분은 변하지 않는다. 도현만 그때를 떠올린 건 아닌지 서혜나의 눈빛이 조금 묘했다. 그녀는 잠깐 기다리라며 어딘가로 향했다. 다시 돌아온 그녀의 손엔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회색의 목도리가 들려 있었다.

“오늘 한파래.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목도리 하고 나가.”

도현은 목도리를 둘러주는 손길을 막지 않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목과 턱 끝에서 느껴졌다. 매듭을 잘 다듬은 서혜나는 만족했는지 한 걸음 물러섰다.

“너무 늦기 전에는 들어와.”

불현듯, 도현은 그녀와의 눈높이가 꽤 비슷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몇 년만 더 지나면 위치가 완전히 뒤바뀔 거 같았다. 미묘한 기분에 목도리 끝을 만지작거리던 도현이 대답했다.

“그럴게요.”

밖은 정말 추웠다. 갑작스레 다가온 한파에 사람들은 저마다 꽁꽁 동여맨 차림이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목도리까지 두른 도현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가끔가다 짧은 시선을 던지는 이는 존재했는데, 그 속에 유명 배우가 있으리란 걸 짐작해서라기보단 우중충한 신형에 무의식적으로 쳐다보는 것 같았다. 도현은 걷다 말고 건물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온통 검다. 검고, 어두웠다. 어젯밤에 눈이 내린 터라 거리 위에 우뚝 선 시커먼 소년은 하얀 도화지 위에 검은 잉크를 쏟은 것 같았다.

꼭 장례식에 가는 거 같네.

…아, 도현은 무의식중에 한 생각에 지레 놀라 굳었다. 짙은 색의 목도리 위로 드러난 뺨이 무척이나 창백했다. 거리 한복판에서 장승처럼 굳은 소년에게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이 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장례식…. 그런가.

그래서 이토록 어두운 옷을 골라 입었나 보다.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오 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새솔 엔터테인먼트 건물이 보였다. 도현의 주변으로 흰색 입김이 퍼져나갔다.

정말 소속사에 가고 싶어서 나왔나?

그렇다기엔 차림새가 나타내는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도현은 파르라니 질린 낯으로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그래, 차라리 잘됐지.

도현의 눈에 오묘한 이채가 어렸다. 언젠가는 가야 하는 곳이다. 심지어 영혼이 하나가 된 지금은 시기로 따지자면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기까지 했다. 도현이 마음만 먹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꼭 오늘이어야 할까?

도현은 약간 겁을 집어먹은 채였다. 무엇에 대한 겁인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냥, 형의 죽음을 증명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모르는 것도 아닌데도.

아직도 종종, 눈을 감으면 그때의 차가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복도에 울리던 다급한 목소리. 벤자민이 기계를 가슴에 가져다 댈 때마다 덜컹거리던 창백한 발. 전신을 타고 흐르던 시린 공기. 죽음이 감돌던 그 공간….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그 냄새를 떨쳐내려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런데, 형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내가 멀쩡할 수 있을까.

굳게 먹었던 마음이 다시금 약하게 흐무러졌다. 모른 척,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건물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앞으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막아선 건 오래 다져진 이성이었다. 오늘이 아니면? 그러면 언제 갈 건데? 설마 평생 모른 척하고 살려는 건 아니겠지. 신랄한 비난이 도현을 정신 차리게 했다.

도현이 빨갛게 언 손끝을 말아 쥐었다. 그 말이 옳다. 지금까지 도망친 건 영혼이 불안정하다는 훌륭한 핑곗거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조차 사라진 지금은, 정말로 일방적인 회피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겁이 나는 만큼, 그보다 더 만나고 싶었다. 그게 그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흔적에 불과할지라도….

얕게 심호흡하던 도현은 앞을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퉁명스러운 낯의 택시 기사가 목적지를 물었다. 도현은 목도리 속에서 입술을 달싹였다.

“어디라고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니야. 오늘 가는 게 제일 나아. 내일은 그곳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올지도 모르니…. 그래, 이게 최선이다. 그는 두어 번 더 망설인 끝에, 택시 기사의 인내가 닳기 전 말소리를 내는 데 성공했다.

택시는 도현을 납골당 앞에 내려주고 사라졌다. 도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물이 시내가 아닌 외곽에 자리한 탓에 조용히 오가는 조문객이 전부였다. 고적한 침묵이 흐르는 곳이었다.

손에 헌화나, 추모 물품을 든 이들과 달리 도현의 손은 휑했다. 그는 처음 와보는 건물 안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안내는 필요 없었다. 형이 어디 있는지 도현이 모를 리가 없으니까.

뚜벅, 뚜벅. 대리석 바닥을 걷는 소리가 고요히 울려 퍼졌다.

마침내 그 소리가 멎었을 때.

도현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무언가 계획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한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도현은 그저 얼어붙어서 하염없이 유리관을 응시했다.

유골함에 정말 형 이름이 새겨져 있다. 당연한 일인데 낯설어서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서 백치가 된 기분이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손을 들었다가, 유리에 손이 닿기 전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아주 조금 멀어진 것뿐인데 기이한 박탈감이 가슴을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갔다. 심장이 뻥 뚫린 듯, 공허한 감각에 파리한 눈매가 처연하게 일그러졌다. 영혼이 공명하며 내는 환희와 슬픔이 한데 뒤엉켜 혼탁한 빛깔을 띄웠다.

텅 빈 눈에 이채가 돌아온 건, 유골함 옆에 놓인 작은 액자를 발견했을 때였다.

…어디서 난 사진이지.

사진 속의 형은 스물여섯 혹은 그 이전의 무렵으로 보였다. 짙은 눈썹, 뚜렷한 이목구비, 가벼운 호선을 그린 입술과 혈색이 도는 뺨…. 모두 그가 쓰러지기 전, 건강하던 때의 모습이었다.

또한 도현이 실제로 본 적 없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가 만난 시기는 형의 병세가 심해진 후였으니. 흰 낯에 쓰라림이 번졌다. 오랜 시간 동안 사진을 꼼꼼히 눈에 담던 도현은 어렵사리 시선을 돌렸다.

“음반도 있네….”

낮게 잠긴, 그러나 힘없이 흩어지는 음울한 목소리였다.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것도 있고 실황 음반도 있었다. 도현의 집에도 있는 것이었다. 누가 가져다 놓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시선을 조금 옮겼을 때였다. 유령처럼 삭막하게 메말라 있던 도현의 낯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생화?

음반 앞, 은은한 생기를 머금은 그것은 인공적으로 만든 조형물이 아니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지, 푸릇한 생명력을 잃지 않은 채였다.

누가?

유리관 안쪽에 물건을 전시해 놓으려면 최소한 고인과 관계 있는 존재여야 했다. 도현의 머리가 어지럽게 돌아갔다. 형의 묘에, 생화를 가져다 둘 만한 사람이 있던가?

그 순간이었다.

도현의 것이 아닌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일정히 반복되는 소리에 이상하게 심장이 쿵쿵 뛰고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소리가 가까워지자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도현은 원래 서 있던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벽 쪽에 붙어 섰다.

이윽고 눈앞에 나타난 여성은 벽의 장식품처럼 멀거니 서 있는 인형에게 시선을 주었다. 거기에 사람이 있기에 쳐다보듯이 무의미하고 기계적인 시선이었다. 도현을 발견하고 잠깐 묘한 눈빛을 하긴 했으나, 그 눈길은 금방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도현은 얼어붙은 듯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검은 눈동자는 크게 확장되어 못 박힌 것처럼 여성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여성이 익숙하게 열쇠로 유리관을 열어 그 안에 든 생화를 새것으로 바꿀 때까지. 계속해서.

“누굴 보러 왔어요?”

“…….”

도현의 침묵에도 여성은 개의치 않았다. 특유의 무감하고도 우아한 낯으로 모자에 가려진 얼굴을 응시하자, 도현은 별안간 숨을 멈추며 뒷걸음질쳤다. 여성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떠올랐다.

“괜찮아요?”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다가오지 않은 채였다. 그러나 도현은 거대한 암흑이 제 몸을 타고 올라 목을 틀어쥔 것 같았다. 생소한 격통에 가는 숨만 내쉬다가, 몸을 틀었다.

등 뒤로 와닿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다급한 발소리가 차가운 공기 속에 퍼져나갔다. 도현은 건물을 빠져나온 후에야 거친 숨을 토해냈다.

손끝에서부터 가는 떨림이 느껴졌다. 명치인지, 심장인지 모를 곳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더, 더, 더! 다시 연주해!

환청이 귓가를 왱왱 맴돌았다. 주변이 한순간에 멀어지며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겉보기엔 부유한 가정집이었다. 바이올린의 현이 마찰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다.

손끝에 무수히 난 상처가 다시금 벌어지고, 붉은 피가 현을 타고 흘러내렸다. 뚝,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처럼 붉게 핏발이 선 눈의 여자가 그를 창백하게 노려보았다.

- 멈추지 마, 계속 연주하라고 했잖아!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따뜻한 목도리를 두르고 있음에도 얼음물 속에 잠긴 사람처럼 몸이 덜덜 떨렸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은 귀신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왜, 왜….

왜 당신이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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