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66화 (467/582)

제466화. 겨우내 웅크린 (24)

눈앞에 정희운을 두니 모든 사고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낙관주의자보다는 염세주의자에 더 가까이 닿아 있는 성향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었다.

어제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랐지만,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도현이 기일을 앞두고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정희운이었다. 정확히는, 형의 기일에 정희운과 함께 형을 찾아가야 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였다.

찾아가자니 아무것도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정희운을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고, 그렇다고 혼자 두자니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 그곳에서 만난 여자는 도현에게 훌륭한 핑계가 되어주었다.

또 그 여자를 만나긴 싫으니까.

그런데 시선이 너무 따가웠던 걸까.

“…왜 그렇게 쳐다봐?”

정희운이 떨떠름히 물었다. 움츠러든 손끝이 보였다. 도현은 침묵하다가, 태연하게 웃었다.

“그 문제 틀렸어.”

“어, 진짜?”

정희운이 허둥지둥 지우개로 적은 답을 지워냈다. 다시금 끙끙대며 문제를 푸는 모습을 보다가 도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미안해, 같이 있어 주지 못해서.

그나마 죄책감을 위로해주는 건, 정희운이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서운할 수도 있을 법한 상황이었지만, 도현은 도리어 안도했다. 동시에 아릿함을 느꼈다.

네가 많이 슬퍼하지 않아 다행이었고, 내가 없는 사이 혼자 이겨냈을 시간이 마음 아팠다. 동요를 숨기려 부러 짙게 웃었다.

“접근 방식이 잘못됐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일단 도형 사이에 이렇게 선을 그려야지. 저번에도 알려줬던 유형 같은데.”

도현이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하자, 희운이 발끈했다.

“기억 못 할 수도 있지!”

쉬는 시간에 공부하는 것도 억울한데 잔소리라니. 너무한 것 아닌가. 희운의 말간 낯에 억울함이 번졌다.

물론 도현도 지지 않았다.

“내가 도형이 나오면 선부터 그으라고 했는데, 계속 까먹잖아. 아니면 나처럼 보기만 해도 암산으로 풀이할 수 있어서 그래?”

제 동생이 공부를 잘하길 바라는 마음은 만국 공통이 아닌가. 도현은 떳떳했다. 희운은 도현의 잘난 척에 황망하면서도, 반박할 수가 없어 입술만 뻐끔거렸다.

“괜찮아. 네가 부족한 게 아니라 내가 특이한 거니까.”

어떻게 객관적인 사실을 관조하는 듯한 어투로 저렇게까지 재수 없을 수가 있지. 희운은 새로이 발견한 도현의 재능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러다가 이내 기운이 빠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도현한테 무슨 말을 하겠는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희운은 단 한 번도 도현을 완벽히 이해한 적도, 이겨본 적도 없었다. 희운이 시들시들해지자 도현이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왜 또 기운이 빠졌지.

발끈해서 성을 내는 건 귀엽지만, 기운이 없는 건 싫었다. 도현은 희운이 흥미를 보일 만한 것을 찾아 머릿속을 뒤졌다. 도현의 입술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연말에 소속사에서 파티 하는 거 알아?”

“파티?”

“응. 시상식 끝나고 소속사에서 단출하게 파티를 열 거래. 시상식 축하 겸 연말 파티인데… 너도 올 거지?”

“내가?”

도현의 고개가 기울었다.

“안 올 거야? 나 상 받은 거 축하하는 자리기도 할 텐데.”

마치 상을 맡겨두었다는 투였다.

다른 이가 들었다면 오만하다며 눈살을 찌푸릴 수 있겠으나, 희운은 아니었다. 그는 도현의 수상에는 한 치의 의심을 두지 않고 두 눈을 빛냈다.

“수상 후보에 올랐어?”

“응, 청소년 연기상.”

“우와!”

희운이 낯이 얕게 상기되었다. 다갈색 눈에 동경과 선망이 차올랐다. 어제 매니저 형한테 소식을 들었을 땐 아무 생각 없었는데, 반짝이는 눈빛을 받으니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축하해! 그런데… 내가 가도 되는 자리야?”

“네가 안 오면 누가 와. 집에 돌아가는 건 걱정하지 마. 매니저 형한테 부탁하면 되니까.”

그 정도는 선선히 들어줄 것이다.

도현의 말에 희운은 갈등하는 듯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시상식과 연말 파티에 관해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성실하게 답해주던 도현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그러니까 불안하게 깜빡이는 눈과 슬그머니 움직이는 손 같은 것을. 도현은 희운이 은밀하게 문제집을 시야에서 치우는 것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러려고 주의를 분산시킨 건가.

공부가 그렇게 싫나 의아하면서도, 싫은데 싫다고 말하지 않고 저렇게 수작을 부리는 게 웃겼다. 도현은 그의 노력을 가상히 여겨 모른 척해주기로 했다.

“나 그런 파티 한 번도 가본 적 없어. 선물 들고 가야 해?”

연말 파티를 무슨 생일 파티 같은 걸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왜? 나 주게?”

“네가 받고 싶으면….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멈칫한 도현이 물끄러미 희운을 쳐다보았다. 늘 방문 앞에 선물을 두고 가기만 했지… 설마하니 희운에게서 선물을 주겠다는 말을 들을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괜찮아.”

아직은 그런 걸 받을 자격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갚을 게 너무 많은데, 여기서 무언가 더 늘면 감당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나만 주인공인 자리도 아니고. 그냥 편하게 와. 네 소속사 이적 기념 파티기도 하니까.”

“나?!”

희운의 얼굴에 놀라움과 당혹이 어렸다. 그사이에 설핏 스쳐 지나간 것은 기쁨이었다.

처음에 주눅 들어 물 한 잔 마시는 것까지도 눈치를 보던 희운은 천천히 새로운 소속사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여전히 가끔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래도 스스로 무언갈 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듣기론 전담은 아니지만 새 매니저가 붙었으며, 그녀와 제법 잘 지낸다는 것 같았다. 이번에 오디션을 보게 되었단 소식도 들었다.

도현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거면 됐다.

영영 오지 못하리라 믿었던 평범한 일상이 펼쳐진 것만으로도, 도현은 수없이 많은 것을 참아낼 수 있었다.

* * *

학교에서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도현은 집에 오자마자 바이올린을 들고 연습실에 콕 박혔다. 오늘도 휴가를 냈다던 서혜나는 도현이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줄 알고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걱정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도현은 연습실 벽에 기대어 앉아 문밖의 서성이는 기척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한참 뒤에 주변이 텅 비었을 때,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서혜나의 걱정이 유별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이 시기마다 아픈 도현을 경험했으니까. 그리고 얼마 전 도현이 깨달은 대로, 그녀가 형의 존재를 안다면 오늘이 그 기일임도 알 테니까.

저 정도면 그녀 나름대로 노력한 거였다. 당장 병원에 가자며 손목을 끌고 차에 태우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녀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도현은 멍하니 바이올린을 매만지다가, 작게 읊조렸다.

덩어리 님.

작은 부름에 나타나는 빛 덩이는 없었다. 설마 떠났나. 불안이 솟구쳤지만, 바이올린을 쥔 손에 힘을 한번 주는 걸로 참아냈다.

떠나지 않았을 거야.

분명, 민들레가 피기 전까지는 곁에 있겠다고 했다. 민들레가 피려면 아직 멀었고, 덩어리 님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불안해할 필요 없어.

그럼에도 한구석에서 치솟는 후회는 어쩔 수 없었다. 눈앞에 나타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하지 말걸. 그때는 그저 붙잡는 게 중요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성급했단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불쌍하게 매달렸으면 지금 다시 모습을 보여줬을지도 모를 텐데. 끝을 모르는 욕심이 기도를 간질거렸다. 도현은 그것을 한숨 한 번으로 흘려보냈다.

괜찮아, 옆에 있을 테니까.

적어도 아직은.

깊이 심호흡한 도현은 쌓아두었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보이진 않았지만, 그가 듣고 있으리란 건 확신했다.

“덩어리 님, 저 어제 형을 보러 갔어요.”

첫마디를 뱉고 잠시 망설이던 도현은 천천히, 급하지 않게 하나씩 풀어내었다. 저 정말로 형의 흔적을 봤는데도 멀쩡했어요. 오늘도 아침에 눈을 떴는데… 하나도 아프지 않은 거예요. 기분이 정말 이상했어요. 이게 기쁜 걸까요, 슬픈 걸까요? 전 오늘이 되면 알 줄 알았는데, 여전히 모르겠어요. 덩어리 님은 혹시 아세요?

반쯤 낮아진 음성이 차가운 공기 사이로 느릿하게 퍼졌다. 아, 저 형의 양어머니도 봤어요. 기억과는 다르더라고요. 많이 지치고… 피곤해 보였어요. 웃기죠. 자기가 뭐라고. 거기에 생화를 가져다 둔다고 형이 살아나는 건 아닌데 말이에요….

이젠 크기가 얼추 들어맞는 바이올린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이보다 더 어렸던 날처럼, 그것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연습실에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

* * *

가연 예술 중학교는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저마다 한껏 멋을 내고 온 학생들로 학교가 북적거렸다. 1, 2학년은 코앞으로 다가온 방학을 기대하며, 사실상 졸업이나 다름없는 3학년들은 설렘과 아쉬움이 섞인 낯으로 학교 내부를 돌아다녔다.

방학식이라 수업이 없었다. 그 자리를 채운 건 교감 선생님의 길고 긴 훈화 말씀이었다. 훈화 말씀이 끝난 후에는 방학 동안 지켜야 할 안전 수칙 교육이 이루어졌다.

물론 그걸 제대로 듣는 아이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선생님도 아이들을 집중시키기는 포기했는지,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아이들을 방치했다.

“오늘 학교 끝나고 피시방 갈 사람!”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왔다. 도현은 손을 들지 않았다.

“좋아, 김우석이, 이대현이, 김병철이, 이도현이….”

제 의견이 어떻든 끌고 갈 걸 아니까.

안전 교육이 끝나자 성적표와 상장을 주는 시간이 되었다. 성적표를 받은 아이들은 저마다 희비가 엇갈렸다. 물론 도현은 새로울 게 없는 성적표를 덤덤하게 받아 들었다.

“와씨, 이게 사람이냐.”

“1등급 아닌 게 뭐야….”

도현의 성적표는 금방 공공재가 되어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이런 일은 익숙해진 지 오래인 도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너희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는 해탈한 태도였다.

“성적 우수상은… 당연히 도현이지. 도현아, 나오렴!”

앞으로 불려간 도현은 성적 우수상 말고도 환경상, 모범상 등, 갖가지 상을 받았다. 그래도 델마 아카데미 졸업식 때 받은 상보다는 적었다.

‘그때 교장 선생님이 정말 온갖 상을 만들어낸 거구나….’

과거의 기억에 픽 웃었다. 델마에서의 기억은 온통 따뜻한 것뿐이다. 진과 니키가 사고 쳐서 같이 화단을 수습한 일도, 헤더와 함께 AMC를 준비하던 시간도, 언제나 붐비던 도서관과 점심시간마다 나가 놀던 잔디밭도…. 모두 눈을 감으면 선명히 떠오르는 찬란한 순간들이다.

그래도.

‘여기도 나쁘지 않아.’

시침이 10시로 넘어가자 종이 쳤다.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공부하라는 선생님의 잔소리는 아이들의 환호 소리에 묻혔다.

방학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