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7화. Winter Break (1)
딸랑-
맑은 종소리가 울리자 직원의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직원은 도현을 알아보고 잠깐 눈을 크게 떴지만, 곧 익숙한 듯 다른 일을 하기 시작했다.
연기 스터디는 도현의 방학을 기념해 카페에 모였다. 모인 곳은 이젠 스터디 전용 카페가 된 KBN 사옥 앞의 한 카페였다. 서지민과 강이든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도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휘민 형은요?”
“화보 찍고 오느라 늦는대.”
서지민이 도현을 과하게 반기며 의자를 빼주었다. 그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자리에 앉은 도현은 고개를 주억였다. 곧 시시껄렁한 잡담이 오갔다. 주로 서지민과 도현이 얘기를 나누고 강이든은 조용히 듣기만 했다.
한참 얼마 전에 찍었던 드라마 얘기를 하던 서지민은 흘긋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결과적으로 그녀의 말은 맞았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에 달린 종이 울리며 기다리던 이가 등장했다. 박시한 점퍼에 검은 모자를 쓴 인형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다들 먼저 와 있었네요.”
모자를 벗자 매끈한 얼굴이 드러났다. 화보 찍고 바로 왔는지, 머리카락과 얼굴이 정성 들여 세팅된 상태였다. 본래도 뛰어난 본판에 장인 정신이 깃드니 시선을 주지 않기가 어려웠다.
“와, 휘민 씨 진짜 잘생겼다.”
“그럼, 잘생겨야죠. 원티어가 제일 좋아하는 게 이건데요.”
팬들이 제 얼굴에 미쳐 있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의 발언이었다. 저 얼굴이 쉽게 상할 리는 없겠군. 서지민은 미남은 보존되어야 한다 생각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네 사람이 앉자 드디어 다 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은 서로 일정이 맞지 않아 둘, 셋씩 따로 보는 일이 잦았다. 이렇게 모두 모인 건 두 달 만이었다.
그들은 주문을 마치고 잠시 침묵했다. 할 말이 없어서 나오는 침묵은 아니었다.
“시상식, 다들 가시죠?”
모두 한 가지 주제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나온 침묵이었다. 신휘민의 질문에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휘민 씨도 후보에 올랐어?”
“전 신인상 후보요. 지민 씨는?”
“난 베스트 커플상. 솔직히 기대한 건 우수 연기상인데… 아직 거기까진 아닌가 보더라.”
강이든과 도현을 차례로 쳐다본 서지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버스를 타긴 했지. 그 말에 어색해하는 건 도현뿐이었다.
“지민 씨가 커플상 후보면….”
세 사람의 시선이 강이든에게 닿았다. 그는 갑작스레 몰린 시선에도 왼쪽 눈썹만 한번 까딱일 뿐이었다. 신휘민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시상식 주인공은 선배님이겠네요.”
베스트 커플상, 그리고 아직 시청자 투표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누구나 예측 가능한 최우수 연기상 후보.
서지민은 새삼 저렇게 맹한 사람이 대단한 배우란 걸 실감했다. 스터디 동료이자 학교 후배로서 자랑스러우면서도, 세상만사 상관없다는 표정을 보니 괜히 아니꼬워졌다.
“선배는 이제 너무 당연해서 놀랍지도 않아요. 다른 사람들도 그럴걸? 정말 주인공은 여기, 우리 도현이죠.”
도현이 픽 웃었다.
“전 청소년 연기상 후보라서요.”
“아, 그거 진짜였어?”
서지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최근 연말이 다가옴에 따라 커뮤니티에서는 도현의 상을 두고 갑론을박이 오갔다. 아직 중학생이니 청소년 연기상이 맞다, 주연이었으니 대상 후보 자격이 있는 거 아니냐, 하는 토론이었다.
그에 대한 도현의 의견은 깔끔했다.
“어차피 저 미성년자라서 열두 시까지 못 남아 있어요. 2부 시작 전에 갈 텐데, 대상을 구글 미트나 줌으로 받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 그건 좀 그렇네….”
상식적인 이야기에 서지민은 금방 수긍했다.
그들은 조금 더 잡담을 나누었다.
배우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외에는 다른 부분이 많아서 이야깃거리는 끊임없이 샘솟았다. 본격적인 스터디가 시작된 건 한 시간가량이 흐른 후였다.
* * *
KBN 연말 시상식의 대상 후보에 이변은 없었다. 시상식이 시작되기 일주일 전,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강이든이 최우수상 후보에 올랐다.
발표된 건 최우수상 후보뿐이 아니었다. 신휘민의 신인상 후보 소식에 아이돌계가 한차례 술렁였으며, 도현의 청소년 연기상 후보 소식에는 여러 의미로 커뮤니티가 불타올랐다.
- 이도현이 아역상ㅋㅋㅋ
- 이게 맞는 거임?
- 근데 ㅇㄷㅎ 생태계 파괴자 아니냐
실상 주연이나 다름없었던 도현에게 아역상을 수여하는 KBN에 대한 욕이 반, 후보에 이름만 걸치고 집으로 돌아갈 게 뻔한 다른 후보에 대한 동정이 반이었다.
그리고 도현은 그러한 것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바빴다. 일단 도현은 마린느 F/W 신상 화보를 찍었고, 캐주얼브랜드 티엘-T.ell-의 러브콜을 받아 엠버서더 관련한 미팅을 했다.
그런 제안을 한 건 티엘뿐만이 아니었다. 이번에 도현의 CF로 크게 성공을 거둔 닥터디 측은 도현을 뮤즈로 삼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이 부분은 소속사에서 검토하는 중이었다.
그 외에도 꽤 화제가 되었던 건 도현의 통신사 광고 발탁이었다. 정수기부터 통신사까지. 경찬호는 농담으로 이제 냉장고랑 화재 보험 광고만 하면 완벽하다는 말을 던졌다.
그리고 지금은 한 잡지사의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여서 조용한 카페에서 만난 참이었다. 카페는 크리스마스 주를 맞이해 알록달록한 전구로 벽면을 장식했다. 잔잔한 캐럴이 부드럽게 흘렀다.
인터뷰어는 녹음기를 틀고 도현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건넸다.
“곧 연말인데 기분이 어때요?”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해요.”
“어떤 부분이 아쉬운데요?”
“평범하죠. 그땐 최선이라 생각했던 것도 지나고 보면 더 잘할 수 있었을 것 같잖아요.”
그녀는 도현의 말에 웃었다.
“제가 보기엔 도현 씨는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팬분들도 그렇게 생각할걸요.”
그다음엔 조금 은근한 말이 나왔다.
“하지만 이해해요. 올해 복잡한 일이 많았잖아요. 아쉬움이 클 만하죠.”
지난 논란에 대한 발언을 유도하는 말이었다. 도현은 가볍게 웃었다.
만약 여기가 미국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논란이 있던 시기였다면 말을 삼갔을 거다. 그러나 최근 도현은 취급 주의 품목이었다.
미성년자에 인종 차별, 그리고 루머 피해자.
안 그래도 동정 여론이 큰 상황에서 도현에 관한 악질적인 기사를 올렸다간 그 회사는 온갖 손가락질과 몰매를 맞을 상황이었다. 동정의 대상이 된 건 유쾌한 일이 아니지만, 그 덕에 편해진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뭐든 뒷면이 존재한다더니.’
피해자 이미지가 공고해지면 곤란하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뭘 해도 어화둥둥, 호의를 받는 이 상황을 충분히 누리기로 했다.
“제가 다방면으로 관심을 끌긴 했죠.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관심을 즐기는 편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이슈가 절 따라다니더라고요. 음, 그래도 딱히 억울하다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힘들지는 않았어요?”
“유쾌하진 않았죠. 하지만 뭐랄까… 제가 어떤 의미로든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구나 싶어요. 좋든, 싫든 저를 무시하지는 못하는 거잖아요.”
얼마 전에 스터디에서 만난 신휘민이 해준 말이었다. 진정한 스타는 까와 빠를 동시에 미치게 만든다고. 그런 식으로 스타성을 인정받게 될 줄은 몰랐는데. 듣고 보니 꽤 재밌어서 기억해 두었다.
기자의 눈이 번뜩였다.
“무관심보다는 낫다는 말이죠?”
도현은 무플보다 악플과 루머를 즐기는 특이 취향은 아니었다. 어느 쪽도 별로인 건 마찬가지였다.
“글쎄요. 그보단, 피할 수 없는 일에 힘쓰지 않는 것뿐이에요.”
“관심을 받는 게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군요?”
뉘앙스는 그보단 ‘관심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군요?’에 가까웠다. 도현은 꽤 흥미로운 가능성을 생각했다. 갑질 논란과 학폭 논란 당시 눈앞의 이 기자가 여러 재밌는 기사를 냈을 거 같다는 가능성이었다.
이제 와 기분이 상하거나 하진 않았다. 미국에 있을 때부터 알았던 부분이다. 도현에게 관심을 표하는 기자들은 대부분 돈으로 움직이지, 사감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그런 상대에게 일일이 반응하며 마음 쓰는 건 시간 낭비였다.
도현이 그녀를 보며 웃었다. 입꼬리 각도가 너무 올라가지도, 너무 내려가지도 않은, 딱 적당한 미소였다.
“제 생각이 아니라 사실 아닐까요?”
* * *
- (사진)
- (사진)(사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서일준 개 못생김
- ㅗㅗㅗㅗㅗㅗㅗ
도현과 친한 반 남자아이들로 구성된 톡방은 오늘도 시끄러웠다. 그들은 연말을 맞이해 다 같이 모였는지, 아까부터 괴상한 사진을 찍어 보내고 있었다.
- 상 잘 받고 와라
- 형님들 여기서 보고 있겟음
- (이모티콘)
연말에 함께하지 못하는 도현을 향한 배려임이 분명했다. 딱히 그들이 따돌린 게 아님에도 신경을 쓰는 게 고마워서 도현은 작게 웃었다.
경찬호는 그런 도현을 흘끔거렸다. 핸드폰으로 카톡을 하는 모습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몸에 꼭 맞게 재단한 정장에 완벽한 스타일링을 한 모습이란 걸 제외하면 말이다.
역시 할리우드 배우.
연말 시상식 정도는 긴장할 거리도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경찬호는 한국에서 영상으로 보았던 프리미어 시사회를 떠올렸다. 그런 곳에도 아무렇지 않게 참석하는 애가 새삼스레 국내 시상식에 덜덜 떨 리가 없었다.
방송국 측에서 보내준 하얀 리무진이 레드카펫 앞에서 멈춰 섰다. 레드카펫을 밟고 들어가는 건 배우뿐이다. 경찬호는 걱정과 신뢰가 적당히 섞인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잘하고 올게요.”
“그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차 문이 열렸다. 와아아! 곧장 날것 그대로의 함성이 귓가에 꽂혔다. 한겨울의 추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거 같았다. 경찬호는 저도 모르게 질린 낯이 되었다. 어떻게 스타들은 저런 관심 속에서 사는 걸까.
“이도현!”
“도현아! 여기야!”
레드카펫을 주변으로 늘어선 팬들이 손을 흔들어댔다. 도현은 차에서 내려 잠시 멈춰 섰다가, 곧 가벼운 웃음을 매단 채 걸음을 내디뎠다.
“꺄악!”
손을 내밀었다가 가벼운 하이파이브를 받은 여성이 비명인지 함성인지 모를 소리를 내질렀다. 도현은 눈앞에 보이는 계단을 올랐다. 익숙한 셔터 소리가 귀를 간지럽히고, 겨울 공기가 쌀쌀하게 목덜미를 스쳤다. 어느새 연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