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8화. Winter Break (2)
“왼쪽! 왼쪽부터 봐주세요!”
“고개 조금만 들어주세요!”
사방에서 요구가 빗발쳤다. 포토월 앞에 선 도현은 당황하지 않고 왼쪽부터 차례로 응시했다. 카메라의 플래시가 포토월과 그 앞에 선 소년을 눈처럼 희게 덮었다.
“도현 씨, 어젯밤에는 잘 주무셨나요?”
포토월 앞에 서 있던 진행자가 턱 아래로 마이크를 대주었다. 그 순간에도 셔터음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네, 푹 잤어요.”
“원래도 그렇지만, 오늘따라 아주 잘생기셨는데요! 의상 컨셉이 뭔지 설명 부탁드려요.”
전속 모델로 있는 마린느에서 맞춤으로 제작해준 정장은 평범했다. 의견을 묻는 말에 ‘무난하게 해주세요’라고 대답한 덕이었다.
특이한 부분을 굳이 꼽자면, 안에 받친 와이셔츠와 나비넥타이까지 검은색이라는 것 정도였다. 자칫 칙칙해 보일 수 있는 디자인은 질감에 차이를 주어서 우중충함을 피했다.
“그냥 무난하게 입었습니다.”
“그러시군요. 그럼, 오늘 좋은 결과 있을 거 같으세요?”
한두 마디 하고 들어간 다른 배우들과 다르게 조금 집요했다.
무난한 대답은 겸손이겠지만, 글쎄. 이런 경우엔 겸손이 더 기만인 법이다. 추운 날씨 탓에 평소보다 더욱 하얗게 물든 소년이 기다란 눈매를 깜빡이다가, 슬쩍 휘었다.
“기대는 하고 왔어요.”
도현은 회장 안에 들어서며 주위를 살폈다. 멈춰 선 모습에 한 직원이 <구미호뎐> 팀이 있는 자리를 일러주었다. 그에 감사를 표하며 발을 옮길 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서려는 것 같아 도현은 옆으로 비켜섰다.
금방 지나가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발걸음은 도현의 앞에서 멈추었다. 도현은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았다. 비슷한 눈높이의 소년이었다.
“너 이도현이지?”
이곳에서 도현을 알아보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몰라서 묻는다기보단 말을 걸기 위한 구실에 가까웠다. 근데 왜 대뜸 반말이지.
“너 나 알아?”
도현은 상대를 꼼꼼히 살폈다.
뒤로 넘긴 머리 아래로 드러난 이마는 반듯했고, 전체적으로 준수한 얼굴이었다. 나이는 도현의 또래, 혹은 그보다 조금 위 정도로 보였다.
아는 사람은 아닌데.
도현은 기억력만큼은 좋은 편이었다. 이렇게 보았음에도 생각나는 게 없다면 정말 만난 적 없는 거였다.
“죄송하지만, 잘 모르겠네요.”
“모른다고?”
소년이 미간을 구겼다가 이곳이 어딘지 의식한 것처럼 금방 표정을 풀었다. 그는 품평하듯 도현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훑어보더니, 툭 말을 내던졌다.
“이문.”
그대로 지나쳐 가는가 싶더니, 뒤를 돌아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상을 맡겨놨다고 해도, 너랑 경쟁할 상대가 누군지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아, 수상 후보자였구나.
도현은 약간 미안해졌다. 그러나 도현이 다시 붙잡아 말을 걸기 전에 이문이라는 소년은 눈앞에서 멀어져 버렸다.
도현은 멋쩍게 서 있다가 눈치를 주는 직원으로 인해 안으로 들어갔다. 신휘민과 구미호뎐의 몇몇 배우들은 먼저 도착했는지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그들은 도현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해 주었다.
신휘민은 밝은 회색의 정장을 갖춰 입은 모습으로, 어느 날 도현이 본 적 있던 무대 영상에서의 차림새보다는-쓰리피스 슈트에 초커와 하네스를 찼는데, 도현은 왜 정장에 초커와 하네스를 차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정숙했다.
“오늘은 내가 제일 일찍 왔네.”
“그러게요. 원래는 형이 제일 늦는데 말이죠.”
“그래도 지각은 안 했어.”
그 말은 맞았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이든과 서지민이 도착했다. 먼저 이쪽을 발견한 강이든이 긴 다리로 휙휙 걸어왔다. 남색의 깔끔한 슈트와 매끄러운 얼굴이 맞물리자, 여기저기서 시선이 꽂혔다. 그는 별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유독 반짝이는 별이었다.
강이든이 다른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걸 의미 없이 구경하고 있으려니 서지민이 도현의 팔을 톡톡 두드리며 아는 체를 해왔다.
그녀는 남색 시스루의 드레스를 입고 단발을 푼 채였는데, 고개를 흔들 때마다 귀고리가 희게 반짝였다.
“드레스 정말 잘 어울려요.”
“너도 턱시도 멋져.”
“고마워요. 그런데 옷, 맞춘 거예요?”
조금 작게 말하자 서지민이 덩달아 목소리를 낮췄다.
“응, 생중계 중에도 투표는 계속 하잖아. 이왕 커플상 후보에 올랐으니 상 타 가야지. 나 혼자 빈손으로 돌아가기는 싫거든.”
시상식에 초대된 배우 중에서 상을 타 가는 사람은 소수다. 그녀가 말하는 건 스터디 인원이었다. 강이든이나 도현은 말할 필요도 없고, 신휘민도 비슷했다.
도현은 금방 납득하며 물었다.
“선배가 쉽게 수락했나 보네요?”
서지민이 밝게 웃었다.
“쉬웠을 거 같니?”
“…음, 아니요.”
머쓱해진 도현이 팔짱을 꼈다.
서지민이 인사를 건넨 다른 사람과 대화를 시작했기 때문에, 도현은 조금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아까 보았던 소년이 앉아 있었다. 도현에게 퉁명스레 굴던 것과 달리 싱글싱글 웃는 낯이었다.
나중에 사과라도 해야겠다. 도현은 미래를 가볍게 기약하며 고개를 돌렸다. 곧 연말 시상식을 시작한다는 안내 방송이 울리고 있었다.
- 시상식에서 딴짓하거나 표정 굳히면 그대로 박제돼서 욕먹는 거야. 넌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조심해.
매니저 형의 당부는 잊지 않았다.
도현은 차츰 정리되어 가는 분위기 속에서 자세를 바로 했다. 반짝, 시상식 무대 벽에 설치된 스크린에 빛이 들어왔다. 동시에 일시에 조명이 켜지는 소리가 들리며 KBN 연기 대상이라는 문구가 크게 떠올랐다.
* * *
“어어, 시작한다!”
김재욱의 말에 치킨을 뜯던 서일준이 고개를 바짝 들었다. 그 말대로 화면에서는 연말 시상식 MC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둘 다 서일준이 익히 아는 연예인이었다.
“리모컨 누가 가지고 있어? 소리 좀 키워봐.”
“7? 8?”
“그냥 크게 틀어!”
“오키.”
김병철이 소리를 9까지 키우자 여러 소음 속에서도 텔레비전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 많은 배우분들이 감사하게도 소중한 시간을 내어 시상식에 참석해 주셨습니다. 올 한 해 KBN을 빛내주셨던 분들이 한자리에 모이니까, 정말 눈이 부시네요. 올해는 더욱 히트한 작품이 많지 않았나요?
- 네, 그만큼 올해 연기 대상에 많은 관심이 모인 것 같은데요. 저도 이 자리에서 직접 보니까 기대가 커지는 것 같습니다!
“이도현은 어딨음?”
“안 보이는데….”
그들이 궁금한 대상은 딱 한 명이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김병철의 집에 모인 이들은 모두 도현의 편이었다.
- 아, 윤지 씨. 그러고 보니, KBN 연기 대상에 정말 많은 상이 있지만, 그중에서 특별한 상이 있죠?
- 네, 그럼요. 인기상과 베스트 커플상, 이 두 개의 상이 시청자분들의 투표로 수상이 이루어지죠. 그래서 더 특별한 부문인 거 같습니다. 그럼, 올해 베스트 커플상 후보를 만나 보실까요?
화면에 배우의 사진이 떠오르며 커플상 후보가 공개되었다. 후보는 총 열 팀으로, 그중 한 팀은 강이든-서지민 커플이었다.
- 두 상은 1부 마지막에 발표될 예정이죠?
- 네, 그리고 1부가 방송되는 동안에도 투표가 계속되고 있으니까, 시청자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리겠습니다.
“너넨 누구 뽑을 거?”
“당연히 강이든 서지민 아니냐.”
쩝쩝거리는 소리와 수런수런한 말소리가 오갔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텔레비전에 딱 고정된 채였다.
- 이제 올해의 드라마 첫 번째 후보를 만나야겠죠?
- 아! 정말 많은 분을 설레게 했던 드라마죠. 과거와 현대를 오간 로맨스 코미디. 팔백 년 묵은 구미호와 인간 여자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
서일준이 눈을 깜빡였다.
연말 시상식에서 첫 번째 순서라는 게 아무런 의미 없이 주어지는 자리일 리가 없었다. 그 해의 최고의 흥행작에게 주어지는 자리였다.
역시 갓도현.
그는 차오르는 뿌듯함과 부러움을 느끼며 먹던 치킨을 마저 씹었다.
- <구미호뎐>을 함께 만나보시죠!
MC의 마지막 멘트를 기점으로 화면이 바뀌었다. 동양화가 그려진 화면에 떠오른 건 검고 선명한 글씨였다.
최고 시청률, 39.8%
39.8%. 상상하기 어려운 수치다.
그 옛날 스마트폰이 발달하기 전의 시대와는 달랐다. 이젠 텔레비전보다 스마트폰을 선호하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저런 시청률이라니.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퓨전 로맨스 코미디라는 새로운 장을 연 드라마, 구미호뎐
얇은 풀피리 소리가 들렸다. 그들도 익히 아는 그건, 구미호뎐의 오프닝 OST였다. 춤추듯 움직이던 그림 위로 ‘구미호뎐’ 로고가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고요한 달밤이 보였다.
“어, 이거….”
장면을 알아본 누군가 말을 꺼냈다가, 닥치라는 핀잔에 입을 딱 다물었다. 화면에 산수화 같은 섬세한 얼굴과 이질적인 붉은 눈이 들어찼다.
- 요괴가 왜 요괴인지 아느냐?
짧은 백발을 한 소년의 등 뒤로 아홉 개의 꼬리가 돋아났다. 흰 꼬리가 달빛을 받아 요요히 살랑였다.
- 그 태생이 저주이기 때문이지.
첫 등장부터 화제가 된 아역의 명품 연기
이후 서지민의 집에 얹혀살며 빈둥대는 도현의 모습과 강의실에 따라가서 사고 치는 강이든의 모습이 차례로 나왔다. 훈훈한 모습이 빠르게 지나간 후 나온 건 과거 편의 한 장면이었다.
수레가 덜컹거리며 길을 지났다.
저마다 불행을 짊어진 여인들이 수레 안에서 시체 같은 낯빛을 하고 있던 때였다.
- 요, 요괴다!
소란이 일었다.
혼비백산한 사람들 사이에서 창백한 낯의 여인이 다급히 창살을 붙잡았다. 피가 말라붙은 손에 희게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보다 크고, 마디가 불거진 손이 그 위를 덮었다. 긴 백발이 창살 위로 쏟아져 내렸다. 붉은 눈이 아득한 분노와 그보다 깊은 감정을 담아 피처럼 번들거렸다.
- …혼인하러 가는 건 아닌 거 같네. 그렇지?
전생에서 현생으로 이어진 사랑
그리고 대한민국을 강타한 ‘여우야 앓이’ 신드롬!
장면은 다시 현대로 돌아왔다.
울듯이 웃음을 토해내던 강이든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지민을 껴안았다. 마지막 회에 나왔던 재회 장면이었다.
- 싫을 리가…. 싫을 리가 없잖아.
시청자들의 마음까지 완전히 훔쳐버린 두 남자, 이도현·강이든.
구미호뎐의 OST 중 가장 유명한 곡이 흘러나왔다. 절로 드라마를 보던 당시의 감정이 솟아나는 기분에 서일준이 탄식했다.
국내를 넘어 세계에서까지 사랑받는 드라마, <구미호뎐>
화면이 희게 물들며 다시금 드라마 제목이 떠올랐다. 동시에 현장에서 쏟아지는 것이 분명한 박수 소리가 울렸다. 스크린 영상이 끝나고 다시금 시상식 현장을 비춘 화면에 떠오른 건, 그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인물.
이도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