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69화 (470/582)

제469화. Winter Break (3)

도현은 스크린 영상이 끝나자마자 가까이 다가온 카메라를 모른 척하며 박수했다. 카메라는 그런 도현의 모습을 생중계로 송출하다가, 차례로 서지민, 강이든, 신휘민의 모습까지 담은 후 다시 도현을 조명했다.

“네, 정말 다시 봐도 설레는데요.”

“정말요. 시청자분들도 같은 심정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특히, 아역 연기자의 연기력이 대단했죠?”

“아, 정말 대단했죠. 구미호라는 존재를 아주 매력적으로 표현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 시상 부문이 바로, 아역분들에게 드리는 상입니다.”

MC의 진행이 물처럼 유려하게 이어졌다. 미리 순서를 알아두고 왔기에 놀라진 않았다. 도현은 집요하게 자신을 담아내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올해는 경쟁이 정말 치열했죠?”

“네, 황금 세대라고 하죠? 이번에 뛰어난 아역 연기자분들이 너무 많아서, 심사하시는 분들이 정말 힘들지 않으셨을까 싶어요.”

“그런 만큼 기대도 많이 되는데요. 아역 연기상 부문에는… 아! 반가운 얼굴이네요. 부잣집 외동딸 전서희 씨와 지적인 매력의 변호사, 운우정 씨가 시상을 맡아주셨습니다.”

MC의 말이 끝나자 화려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한쪽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 명의 연기자가 걸어 나왔다. 도현은 그들을 흥미롭게 응시했다. 확실히 시상식은 시상식인지, 그간 접점이 없던 배우들이 많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소개했다. 두 사람 또한 이번 베스트 커플상 후보였는지, 자연스러운 어필이 한 차례 지나갔다.

다음은 본격적인 시상이었다.

“저희는 아역 부문 시상을 맡았는데요. 올해 아역의 활약이 정말 눈부셨습니다. 지금부터 시상을 본격적으로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청소년 연기상 후보, 함께 보시죠.”

빠밤, 하는 효과음과 함께 스크린이 다시 켜졌다.

·청소년 연기상·

남자

- 갔다가 돌아오는 거 맞아?

화면에 뜬 얼굴에 도현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입장할 때 보았던 아역 배우, 이문이었다. 중학교 교복을 입고 뺨에 밴드를 붙인 이문은 젊지만, 어딘가 초췌해 보이는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 말해봐, 갔다가 돌아오는 거 맞냐고.

- 정아. 그게, 누나는….

- 쓸데없는 소린 말고. 물어본 거에만 대답해. …안 돌아올 거면 마음의 준비라도 하게.

이 문 · 푸른 별 · 남자 아역상 후보

…잘하네?

아주 짧은 장면이었음에도 실력을 알아보기에 무리는 없었다.

<푸른 별>을 시청하지 않아서 추측일 뿐이지만, 나눈 대사나 분위기를 보았을 때 누나라는 사람이 소녀 가장인 것 같았다. 그런 누나가 자신을 버리려는 상황에서 이문은 침착했다.

청소년기 특유의 방황 어린 눈빛과 애써 내비치는 허세 따위가 무척 인상적인 연기였다. 남자 아역상 후보에 오른 게 충분히 이해될 정도로.

‘이문, 이문….’

그제야 어디서 그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지 생각났다. 올해 흥행한 사극은 도현이 출연한 <왕의 길>이지만, 재작년에는 <화랑>이라는 드라마가 그랬다.

한번 생각나니 연쇄적으로 연관된 것들이 떠올랐다. 도현의 <구미호뎐> 캐스팅 당시, 화제성을 위해서 도현의 합류를 숨겼었다.

그때 강이든의 아역을 두고 추측성 글이 많이 올라왔는데, 그중에서 가장 자주 오르내렸던 이름이 이문이었다. 정희운은 인지도가 부족했고 도현은 한국에서의 활동이 불확실했으니, 가장 유력한 후보가 바로 그였다.

기억을 복기하는 사이 세 명의 후보가 더 지나갔다. 마지막 후보가 등장한 순간, 방청객들이 있는 쪽에서 환호가 쏟아져 나왔다.

좁은 원룸 침대에 팔자 좋게 누운 도현이 부채를 살랑였다. 부채가 움직일 때마다 요사스러운 입꼬리가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했다.

- 내 보아하니 은인의 사주에 재운이 없구나. 허나. 구미호 된 도리로서 은인의 슬픈 사정을 지나칠 수야 있나.

- 그, 그럼…?

- 영단.

탁. 흔들거리던 부채를 접은 소년이 눈매를 휘었다. 사람을 홀리는 미소였지만, 어딘가 인간을 약 올리는 도깨비의 장난 같은 웃음이었다.

- 내 영단을 줄게. 영단에는 딱 한 번, 주어진 대운을 바꾸는 힘이 있거든.

이도현 · 구미호뎐 · 남자 아역상 후보

그 영상을 마지막으로 다섯 명의 후보 사진이 동시에 떠올랐다. 도현의 옆에 앉아 있던 서지민이 열성적으로 박수했다. 플랜카드가 있었으면 흔들었을 기세였다.

“네, 정말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대단한 후보네요.”

“정말 쟁쟁합니다. 다들 너무 연기를 잘해서 수상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지는데요, 수상자 발표는 우정 씨가 해주시죠.”

“네, 제가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KBN 연기 대상. 남자 아역 연기상, 그 수상자는….”

하얀 카드를 열어보는 손짓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카드를 확인한 운우정의 얼굴에 의미 모를 미소가 떠올랐다.

수상과 관련해서는 이미 방송국 측으로부터 간단한 언질을 받은 후다. 여기서 누가 수상하게 될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만약 모르고 왔더라도, 전담 카메라처럼 도현의 주변을 떠날 줄 모르는 카메라를 본다면 더는 모를 수가 없었다. 그만큼 카메라는 노골적이었다.

‘근데 왜 긴장되지.’

도현은 남몰래 손을 쥐었다 폈다.

그리고, 짧고도 긴 기다림 끝에 운우정의 입이 열렸다.

“네, 한 해 동안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드라마, <구미호뎐>의 이도현입니다!”

짝짝짝짝! 기다렸다는 듯이 박수가 쏟아졌다. 도현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구미호뎐> 동료와 선배 배우들의 축하를 받았다. 같은 성별의 배우들은 가볍게 안아주었고, 서지민은 기쁜 얼굴로 축하한다는 입 모양을 그렸다.

“이도현 분은 <구미호뎐>에서 잔망스러운 매력과 멋진 매력을 동시에 가진 구미호 여우야를 연기해서 큰 사랑을 받았는데요, 올해 남자 아역상의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너무 축하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강이든의 격려인지 축하인지 모를 포옹을 받은 도현은 무대 위로 올라갔다. 무대 위에 있던 두 배우가 도현을 반기며 트로피와 꽃다발을 품에 안겨 주었다.

MC가 진행석으로 돌아가니 중앙 무대에는 도현 홀로 남았다. 스탠드 마이크 하나를 앞에 두고 배우들과 그 뒤의 방청객들을 보자니 묘한 감흥이 일었다.

멀리서 서지민이 주먹을 쥐며 응원하는 게 보였다. 도현은 세 번째로 손에 쥐어본 트로피의 감촉을 느끼며 고개를 조금 내렸다.

“우선, 이런 훌륭한 상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흘끔, 트로피를 한번 쳐다본 도현이 말을 이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연기자로서 받은 상이라서 더욱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이 상을 받기까지 저를 도와주신, 감사한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석적인 순서대로 <구미호뎐>을 함께한 사람들의 이름이 이어졌다. 형식적인 공치사이긴 하나, 이 상이 도현 혼자만 잘해서 받아낸 것은 아니니 당연한 과정이었다.

무대에서 도현의 수상 소감을 보던 MC나 초대된 배우들, 그리고 방청객들은 더듬거림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인사말에 저절로 생각했다.

난 놈은 난 놈이라고.

아무리 해외에서 놀던 배우라고는 하나, 전국에 생중계되는 생방송에서, 모두가 집중하고 있을 상황에 떨림 하나 없이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는 게 그들의 인상에 깊게 남았다.

당연한 과정이지만, 시청자들에게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을 걸 알기에 빠르게 감사 인사를 마친 도현이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이번 한 해는 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힘듦이 있었지만, 그렇기에 성장할 수 있었고 더 나은 제가 될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 여정을 함께해 주신 팬분들, 그리고 시청자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눈에 띌 필요는 없다.

도현은 오늘 시상식에서 청소년 연기상을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한 해를 제법 그럴듯하게 마무리한 기분이었다.

즐거운 미소를 띠고 고개를 숙이자 진행자의 축하 인사가 들렸다. 그들에게도 인사한 도현은 후련한 마음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도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서지민이 곧장 몸을 숙여 속삭였다.

“잘했어, 멋졌어.”

오른손은 소심하게 엄지를 치켜올린 채였다. 강이든도 어째서인지 기특하다는 눈빛이었고, 신휘민도 평소와 달리 조금 더 진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도현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리고 싶지만, 가벼운 고갯짓으로 대신했다.

그 후로 여자 청소년 연기상 시상이 이뤄진 후, 신인상 차례가 되었다. 남자 신인 연기상 수상자는 도현의 예상대로 신휘민이었다. 그가 무대에 올라가자 데시벨부터 다른 것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그의 수상 소감은 도현과 별다를 게 없었는데, 특별한 부분을 꼽자면 마지막에 ‘원티어 정말 사랑해요’라면서 프로 아이돌다운 팬서비스를 한 점이었다.

도현은 자신의 팬들을 떠올렸다.

‘나도 사랑한다고 해야 했나?’

무대에서 팬에게 사랑한다고 잔망을 떠는 자신을 생각하니 어색함이 치솟아 올랐다. 물론 잼잼이들을 좋아한다. 감사한 마음도 진실이다. 논란이 터질 때마다 도현을 보호하는 댓글들을 보면 가끔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러나 사랑은….

애초에 사랑이 뭔지 모르겠는걸.

형을 향한 사랑, 덩어리 님을 향한 사랑, 친구를 향한 사랑, 이성을 향한 사랑에 팬을 향한 사랑이라는 항목이 ‘New!’ 느낌으로 추가되었다. 골머리를 앓을 게 하나 더 늘었단 뜻이나 다름없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여자 신인 연기상이 지나간 다음에는 올해의 연기자상이 수여되었다. 그다음은 올해의 드라마 두 번째 후보 소개가 이어졌다.

올해의 드라마 두 번째 후보를 보자, 도현은 어째서 이문이 그토록 불쾌해했는지 알 것 같았다. <구미호뎐>과 경쟁하는 두 번째 드라마는 다름 아닌, <푸른 별>이었다.

그러니까 이도현이라는 변수가 없었다면 당연하다는 듯이 상을 타 갔을 사람은 이문이라는 소리였다. 만약이라는 가정만큼 의미 없는 건 없지만, 그래도 약간은 신경이 쓰였다.

그 생각이 밀려난 건 올해의 드라마 두 번째 소개를 마치고 축하 공연이 시작되었을 때였다. 올해 초대된 가수는 연달아 히트곡을 발매한 걸 그룹, 아이리스였다.

Lalala, lalala lalalalala-

통통 튀면서 어딘가 몽환적인 음색이었다. 인트로가 끝나기 전,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조명이 일시에 켜졌다. 조명 아래에는 보라색의 화려한 무대 의상을 입은 아이리스가 꽃 같은 모양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저기 맨 앞에 있는 사람이 여린이었던가? 그 옆은, 그래. 나이를 듣고 충격받았던 기억이 있다. 15살이라고 했으니까. 이름이 채서였을 거다. 아이돌이라는 특이성 때문인지 연보라로 탈색한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정희운과 함께 있으면서 무대 영상이며 직캠까지 반강제적으로 보게 된 도현은 놀랍게도 모든 멤버를 알아보았다.

띵, 하는 종소리와 함께 센터에 있던 여린이 허공을 툭 건드렸다. 동시에 속삭이는 듯한 음색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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