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0화. Winter Break (4)
사실대로 말하자면, 도현은 아이돌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노래하고 춤추는 건 도현의 분야와 다를뿐더러, 스스로 연예계에 몸을 담았다 보니 아이돌-Idol, 우상-이란 것에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다.
십 대가 열광하는 화려한 겉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그런 거에 홀릴 거였다면 진즉에 루카 하퍼한테 반해야 했다. 슈퍼 모델 어머니와 배우 출신 영화감독 아버지의 장점만 물려받은 외형은 가십지에서 일상적으로 ‘천사’ 운운하며 찬양할 정도니까.
그런 그가 비현실적으로 예쁘게 꾸미고 무대에서 공연하는 이들을 우상으로 삼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다만….
- 차오르는 꿈, 그 속의 너와 나.
채서가 걸어 나오며 살짝 웃었다.
파트를 마치고 돌아갈 때 얼핏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도현은 생각했다. 저 몇 초를 하려고 몇백 번을 연습했을까?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3분가량이었다. 그 안에 준비한 모든 걸 쏟아붓는다. 사전 녹화라면 모를까, 이런 무대에서는 심지어 재촬영 같은 개념도 없다.
짧지만 강렬하게 반짝이는 별똥별을 닮았다. 여전히 그들을 우상 삼을 순 없지만, 무대에 선 그 단 한 번의 순간 모든 걸 쏟아붓는 태도만큼은 인상적이었다.
나도 그런 생각으로 연기하면 더 나은 연기가 나올 수 있을까? 소소한 의문과 함께 손뼉을 쳤다.
간단하게 인사를 마친 아이리스는 금방 무대를 떠났다. 어딘가 조급해 보이기까지 한 기색이었다.
신휘민이 중얼거렸다.
“바쁘겠네요. 곧장 연말 가요제 가는 거 같은데.”
인기 아이돌은 연말에도 쉴 틈 없이 바쁜 모양이었다. 문득 도현은 신휘민의 말에 위화감을 느꼈다.
“그럼 형은요?”
아이리스가 최근에 급부상한 아이돌이라면, 온탑은 명실상부한 1군 아이돌이다. 아이리스보다 바쁘면 더 바빴지, 덜 바쁘지는 않을 인물이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곧 부드럽게 휘었다.
“우리 그룹은 나 없이 공연해.”
벌써 몇 년 차인데. 나 하나 빠진다고 무대 못 하면 아이돌 그만둬야지.
엄격함과 자신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 기반에는 그룹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음이 분명해서, 도현은 약간, 아주 약간 부러워졌다.
“자, 이제 1부가 거의 끝나 가는데요. 인기상과 베스트 커플상 투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아직 투표하지 않은 분들이 계신다면 서둘러 주세요.”
“그럼 그 전에, 시청자분들이 뽑은 인기상 후보를 한번 만나볼까요? 함께 보시죠.”
인기상 후보가 떠올랐다.
강이든부터 시작해서 유명한 배우의 면면이 나오자, 환호가 끊이지 않았다. 도현은 그중에서 네 번째로 등장했다.
“어때, 받을 거 같아?”
신휘민의 질문에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껏 아역이 인기상을 받은 적은 없다. 이런 투표는 팬덤의 영향력이 중요하니 당연했다. 아역은 팬으로서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보단, 조카 예뻐하듯 응원하는 게 대부분이니.
신휘민처럼 거대한 팬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강이든처럼 오래 활동하여 탄탄한 국민 배우로 자리 잡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성에게 매력을 어필할 수 있을 만큼 나이가 찬 것도 아니다.
“후보에 든 것만으로 만족해요.”
도현은 현실을 잘 파악하는 편이었다.
“네, 정말 모두 감탄이 나올 만큼 대단한 분들이네요.”
“정말 그렇습니다. 투표하기 너무 어려울 거 같아요. 다들 너무 매력적인 분들이라서요. 하지만,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인기상과 베스트 커플상은 오로지 시청자 투표로 합산되니까요. 응원하고 싶은,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배우가 있다면 투표 참여 부탁드려요.”
“그럼 그 전에, 투표를 기다리면서 올해 KBN 연기 대상에서 준비한 특별상을 수여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윤지 씨, 올해의 특별상은 어떤 상이 있습니까?”
“네, 이번에는 정말 특별한 상들이 준비되어 있는데요. 바로 환경상과 먹방상, 그리고 귀여운 백수상입니다!”
도현은 잠시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했다. 여기가 컵스카우트도 아니고. 환경상은 왜 있는 것이며, 먹방상은 무엇이고, 백수면 백수지 귀여운 백수는 또 뭐란 말인가?
그런 의문을 풀어주듯 스크린에 드라마 장면이 재생되었다.
화면에 나오는 배우는 뒷골목에서 깡패로 보이는 이들과 거친 액션을 선보이고 있었는데, 장면이 바뀔 때마다 약간 다른 공간에서 싸움박질을 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누군가 그를 발견한 듯 ‘뭐 하는 거야!’ 소리를 지르자, 쓰러진 깡패를 한 대 더 발로 찬 남자가 뺨에 튄 피를 닦으며 씩 웃었다.
- 청소.
“네, 푸른 별의 서정훈 씨가 환경상의 주인공이 되셨습니다!”
“축하드려요!”
이게… 맞나?
도현이 혼란스러워하든 말든 시상은 이루어졌다.
정석적인 트로피와 다르게 장난감 같은 왕관에 ‘환경상’이라 써진 종이가 떡 하니 붙어 있었다. MC들은 직접 무대 아래로 내려와 서정훈이라는 배우에게 왕관을 씌워주었다.
그가 수상 소감을 뱉는 걸 보며 도현은 헛웃음을 참았다.
먹방상은 봄에 방영했던 아침 드라마의 여자 조연 배우가 타 갔는데, 연인에게 차인 건지 울면서 치킨을 뜯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단숨에 뼈를 발골하는 실력을 뽐내며 정말 맛깔스럽게 먹었는데, 그녀는 수상 소감에서 방영 이후 먹방 예능으로부터 스카우트를 받았다며 고백하기도 했다.
이쯤 되니 슬슬 마지막 상의 주인이 누구일지 기대되었다. 누굴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어째 이쪽을 쳐다보던 MC와 눈이 딱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MC가 활짝 웃었다.
“도현 씨! 수상 축하드려요!”
“귀여운 백수상의 주인공이 되셨는데요, 소감 한마디 부탁드려도 될까요?”
도현은 떨떠름하게 마이크를 받아 들었다. 때마침 스크린에는 한이련의 자취방에서 빈둥빈둥하는 도현의 모습이 차례로 떠오르고 있었다.
기대한다는 게, 상을 받고 싶단 소리는 아니었는데….
도현은 애써 표정을 수습했다.
생각해 보면 크게 당황할 것도 없다. KBN에서 도현에게 정성 들이는 건 익히 아는 일이었으니. 백수상이 정말 호의인지는 둘째치고 말이다.
“어…. 음, 일단, 이런 훌륭한 상을 주셔서 감사하고…. 귀엽게 봐주셔서 감사, 합니다?”
끝이 의문문으로 끝났다.
“네, 수상 소감 잘 들었습니다! 혹시 시청자분들을 위해서 작은 애교 한번….”
말을 꺼낸 여자 MC는 재빨리 도현의 표정을 확인했다. 떫음과 약간의 불쾌함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얼굴에 자연스럽게 드리프트했다.
“은 어렵겠군요! 네, 감사합니다!”
물 흐르듯 유려한 태세 전환에 도현이 황당한 눈빛을 보냈다.
그녀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 윤지 씨, 어떻게 한번, 말이라도 자연스럽게 꺼내봐 줘요. 나이도 어리고 하니까 그러면 시청자들이 좋아할 거 아니야. 장면 하나 잘 뽑히면 화제도 되고.
연말 시상식 피디는 윤지에게 도현이 애교 부리는 장면을 찍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피디 앞에서 싫다고 할 수는 없으니 대충 노력해 보겠다고 말은 했지만….
‘시상식에서 애교를 왜 부려.’
그녀가 생각하기에 시상식은 한 해의 결과를 확인하러 온 거지, 애교를 부리러 온 곳은 아니었다. 여자 배우라는 이유만으로 예능에서 애교를 요구받아 본 적 있는 그녀였기에 더욱 거부감이 들었다.
‘말 한번 꺼내 보긴 했으니까 됐지, 뭐.’
후련한 마음으로 도현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준 MC는 잘 어울린다는 칭찬을 몇 마디 해준 후 쿨하게 무대로 돌아갔다.
도현은 애교를 부리려다가, 미련 없이 돌아가는 MC의 모습에 황망히 눈만 깜빡였다.
그때, 서지민의 웃음 어린 목소리가 정신을 깨웠다.
“잘 어울린다. 왕자님 같아.”
“왕자가 귀여운 백수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다 혁명 일어나지.
도현은 어딘가에서 저를 보고 있을 친구들을 떠올렸다. 이미 캡처부터 움짤까지 다 땄겠지. 반톡은 이미 포화 상태일 게 뻔했다. 한동안 예약된 놀림에 도현은 씁쓸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사이, MC가 시청자 투표가 마감되었다고 말했다. 도현은 머리에 올라간 왕관을 벗어서 테이블에 잘 내려놓았다. 어쩐지 아쉬운 탄식이 들린 것 같았지만 무시하고 정면을 응시했다.
이제 베스트 커플상과 인기상 시상만 끝나면 퇴근 시간이었다. 물론 미성년자인 도현만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성인 배우들은 2부 끝까지 남아 있어야 했다.
드레스 코드까지 맞춘 서지민의 염원이 통했는지, 베스트 커플상의 주인공은 강이든·서지민 커플이었다.
기쁜 기색으로 무대에 선 서지민은 수상 자리를 꽤 알뜰히 썼다. 둘 사이에서 도는 열애설을 그 자리에서 부인한 것이다.
“저랑 이든 씨는 사귀는 사이가 아닙니다. 정말 좋은 선후배 사이고, 또 친구이자 동료 배우 사이지만, 연애적 감정이 오가는 사이는 아니니 추측성 기사는 삼가주세요.”
이미 얘기가 된 건지 강이든은 놀라지 않았다. 또박또박한 말에 강이든은 무표정하게 있는가 싶더니, 고개를 살짝 숙여 마이크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네, 그 말이 맞습니다. 제가 아깝죠.”
“예?”
“드라마를 인상 깊게 봐주신 거 같아 감사합니다. 베스트 커플상도요.”
“아니, 잠깐. 이든 씨?”
“그럼 저희는 앞으로도 좋은 연기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황당해하던 서지민은 강이든이 먼저 무대에서 내려갈 것처럼 굴자 빠르게 감사 인사를 마치고 허둥지둥 옆에 섰다. 작게 주먹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보여서, 관객석에는 잠깐 웃음이 터졌다.
“내가 미쳐, 진짜!”
도현의 옆자리에 앉은 서지민이 앓는 듯한 탄식을 뱉더니, 뻔뻔한 낯의 강이든을 밉지 않게 노려보았다. 도현은 조금 가엾은 눈으로 서지민을 보았다.
해명이 무색하게도.
‘그 스캔들, 안 사라질 거 같은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잠시 후, 인기상이 발표되었다.
도현의 예상대로 수상자는 강이든이었다. 도현은 별다른 아쉬움 없이 박수를 보냈다. 머릿속으로 ‘완전히 이든 선배의 해네’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1부가 막을 내리고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 퇴근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