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1화. Winter Break (5)
촬영 기간 내내 함께했던 인원이 모두 모여 있는데, 홀로 먼저 자리를 뜬다는 건 꽤 아쉬운 일이다. 도현은 제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고, 그 말을 들은 서지민은 유쾌하게 웃었다.
“나중엔 가고 싶어도 못 가. 지금을 즐겨.”
그러면서도 도현이 눈에 밟혔는지, 낮게 속삭였다. “다음에 우리끼리 뒤풀이하면 되지, 안 그래?” 그 말을 들은 도현은 고개를 냅다 끄덕였다.
어쨌거나 도현은 너무 많은 이들의 인사와 신년 축하를 듣고, 이러다가 2부 시작 전까지 회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들 때쯤 퇴장하는 데 성공했다.
아직은 바깥에 기자들이 남아 있을 시간이었다. 더 이상의 놀림거리는 사양인지라, 옷매무새를 점검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때맞춰 나오는 이를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아.”
도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탄성에 막 화장실에서 나오던 이가 고개를 들었다. 이문과 도현의 시선이 맞닿았다.
와그작, 꼭 그 소리가 날 것 같이 이문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가 말없이 지나쳐 가려던 걸 도현이 붙잡았다.
“못 알아본 건 미안해요.”
대답이 돌아오기 전, 한 번 더 선수 쳤다.
“시간 날 때 <푸른 별>을 봐보려고요.”
“왜? 미안해서?”
“아뇨, 재밌어 보여서.”
찌그러졌던 미간이 조금 누그러졌다. 아까보다 기분이 풀린 것처럼 보이자, 도현이 한 손을 불쑥 내밀었다. 이문이 제 앞에 드리워진 희고 기다란 손을 뭐냐는 듯이 응시했다.
“이도현이에요.”
화해의 제스처였다.
어쩌다 보니 구설수와 논란에 휘말렸을 뿐, 도현은 본디 온건한 관계와 상황을 지향했다. 평화주의자라는 거창한 말이 붙을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양보해서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다면 그쪽을 택하는 편이었다.
그런 도현을 보고 ‘착하다’라고 평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글쎄. 그건 착하다기보단 계산이 빠른 게 아닐까. 어찌 보면 지독한 효율 중심적 사고기도 했다.
“…이문.”
이름을 말하며 악수에 응한 이문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경계심이 떠올라 있었다.
“설마 나한테 선배 소리 듣고 싶은 건 아니겠지?”
까칠하다.
“제가 선배인 줄도 몰랐는데요. 그냥 편하게 불러요.”
“그러든가.”
“그래. 대신 나도 말 편하게 할게.”
“뭐라고?”
“서로 편하게 하자고. 왜, 안 돼?”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싱글싱글 웃으니 이문이 주춤했다.
도현은 이 소년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찌를수록 뾰족해지고, 물렁하게 굴수록 덩달아 물렁해지는 타입이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기 전 태연하게 손을 한 번 흔든 도현이 자연스럽게 악수를 풀었다. 그리고 지나가라는 듯이 한 걸음 비켜섰다.
“피곤할 텐데 먼저 들어가.”
편히 가라고 비켜주기까지 했는데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지금 자신이 물 먹은 건지, 아닌지 고민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도현은 짧게 웃었다.
“다음에 마주치면 인사하자.”
멋대로 훈훈하게 대화를 끝낸 도현을 이문은 붙잡지 못했다. 기분이 나쁜 듯, 아닌 듯 오묘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짧게 혀를 찬 후 자리를 떴을 뿐이었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던 도현은 본래 용건대로 옷매무새를 깔끔히 정돈했다. 앉아 있던 탓에 바짓단에 약한 주름이 진 것 빼고는 단정한 모습이었다.
경찬호는 로비에 앉아 있었다.
피로한 기색으로 핸드폰을 보던 그는 인기척이 느껴지자 고개를 들었다.
“형, 기다리기 힘드셨죠.”
“괜찮아. 종일 대기할 때도 있는데, 뭘. 가자. 차는 뒤쪽에 주차해둬서 기자는 없을 거야.”
“없다고요?”
“숨어들어 왔으면 또 모르지만. 일단은 관계자 외 출입 금지거든.”
“아하….”
괜히 단장했네.
둘은 대화를 나누며 뒤편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사이에 마주친 몇몇 이들이 인사를 건네거나 사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도현은 그 요청을 어렵지 않게 들어주며 주차장에 들어섰다.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맨 경찬호가 시동을 걸며 말했다.
“바로 새솔로 갈 건데, 혹시 피곤해?”
“앉아만 있었는데요.”
“카메라가 보고 있는 곳에서 앉아 있었지.”
“그건 그렇네요.”
생각보다 카메라 앞에 선다는 건 체력을 많이 소모하는 일이다. 거기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너무 늦게 들어가지만 않으면 돼요. 형이야말로, 연말인데 저랑 있으셔도 괜찮아요?”
“매니저 일이 원래 그렇지.”
진심인지 별달리 유감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두 사람을 태운 차가 어둑한 밤거리를 내달렸다. 아무리 연말이라도 많이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도로는 한산했다.
“시상식은 어땠어? 핸드폰으로 보긴 했는데….”
“별거 없었어요. 그냥 예쁘게 앉아 있다가 때 되면 박수하고, 때 되면 상 받고. 그런 거죠.”
“그래, 이래야 도현이지….”
“아, 새로운 사람을 만나긴 했어요.”
“누구?”
“이문이라고. 아세요? 푸른 별에 나온 아역 배우인데.”
“…이문?”
말 사이에 약간의 공백이 있었으나, 신호가 바뀐 순간하고 겹쳐 도현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 애랑 친해졌어?”
“그 정도는 아니고요. 마주치면 인사하기로 했어요.”
“으음, 그래.”
반응이 조금 미적지근했다. 그러나 그가 곧 화제를 돌려 버렸기에, 도현은 피곤했나 보다 생각하고 말았다.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회사에 온 적은 처음인데. 이대로 귀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단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닫힌 문을 두드렸다.
- 들어와!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환한 빛이 눈을 찔러 반사적으로 눈매가 좁혀졌다. 안이 제대로 보이기도 전이었다.
파앙!
폭죽에서 터져나온 종이가 머리 위로 쏟아졌다. 도현은 조금 어벙하게 눈을 깜빡였다.
“수상 축하해!”
“고생했어, 도현아!”
익히 아는 얼굴들이었다. 이제는 전담팀에 가까워진, 도현을 담당하는 직원들과 낯이 익은 몇몇 사람들, 그리고 정한결 대표가 거기 있었다.
도현은 얼굴에 붙은 종잇조각을 떼어내며 안을 둘러보았다. 소규모 파티치고 꽤 본격적이었다. 색색의 풍선이 붙어 있고… 파티용으로 차려진 간식 테이블이 눈에 띄었다.
도현은 고마운 동시에 미안해졌다. 수상을 축하해주는 건 고마운데, 그 탓에 연말부터 고생한 것 같아 미안함이 인 것이다.
‘대상을 탄 것도 아닌데.’
물론 청소년 연기상도 훌륭한 상이긴 하지만…. 아, 귀여운 백수상도 있었지. 아무튼. 여러모로 미안해지는 터라 도현은 더욱 활짝 웃었다.
그러다가 발견했다.
고깔모자에 꽃목걸이, 양손에 선물까지 들고 신나 있는 정희운을. 보통 사람보다 밝은 갈색 눈동자가 반짝반짝하니, 별을 박아 놓은 것처럼 총총했다.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낸 거 같은데?
도현에게 수상 축하 겸 소속사 이적 기념 겸 연말 파티라고 언질을 주더니, 그 말대로 도현이 없는 사이 희운을 제대로 놀아준 모양이었다.
도현의 시선에 제 모습을 깨달은 희운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그, 수상 축하해.”
도현은 대답 대신 희운의 고깔모자를 벗기고, 귀여운 백수 왕관을 씌워주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무척 좋아하며 사진을 찍어대자 희운은 불타는 토마토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웃음을 흘린 도현이 안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한쪽에선 크게 틀어놓은 화면으로부터 KBN 연기 대상 2부가 송출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 자리한 통창은 반짝이는 도시를 비췄다.
“어, 눈!”
누군가의 탄성을 시작으로 모두의 시선이 창문을 향했다. 그 말대로 하늘에서 며칠간 잠잠하던 눈이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지잉- 때맞춰 울리는 핸드폰을 열어보자, 가연예중 단톡에 올라온 사진이 보였다. 그들도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발견한 건지, 풍경 사진이었다. 답장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취기가 오른 낯으로 흐물흐물 다가온 정한결 대표가 어깨에 팔을 둘렀다.
“한 해 동안 정말 잘했고… 내년에도 잘 부탁해요.”
역시 이게 목적이지.
짧게 웃은 도현이 그가 애타기 전에 잽싸게 말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 * *
1월 1일, 도현은 연말 동안 이곳저곳에 아들을 빼앗겼던 부모님과 아침부터 함께했다. 다 같이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는 것으로 시작해서, 점심에는 새해 기념 케이크를 함께 만들고, 오후에 접어들었을 땐 집 안 불을 모두 꺼놓고 다 같이 영화를 관람했다.
녹진녹진, 노곤노곤한 시간이었다.
조금은 샌디에이고에서 맞이했던 크리스마스가 생각나기도 했고.
‘그땐 진과 니키가 찾아왔는데.’
울타리 너머에서 활짝 웃으며 인사하던 둘을 떠올린 도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도현의 여유는 딱, 새해 첫날까지였다.
그다음 날은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그들과 내내 어울려야 했으며, 이튿날에는 소속사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제가 청소년 홍보대사요?”
- 정부가 주도해서 만든 사단법인 단체야. 기업 주도가 아니라서 논란될 여지도 없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도 않을 거야. 그쪽에선 위촉식 참가랑 단원 모집 홍보물 촬영 정도만 하면 된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왜 저를?”
- 네 이미지가 좋으니까?
“제가요?”
- 응. 논란도 다 거짓인 거 밝혀지면서 이미지는 오히려 더 깨끗해졌잖아. 거기다가 시련을 이겨낸 서사도 있고, 인기나 인지도는 말할 것도 없고, 나이도 딱 청소년이라… 솔직히 너만큼 괜찮은 후보도 없을걸.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도현은 솔직히 말했다.
“전 청소년 관련된 활동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적어도 봉사활동을 여러 번 다닌 사람한테 가야 하는 자리가 아닌가. 물론 수익의 일정 부분을 꾸준히 기부 중이긴 하지만… 그거랑은 별개의 문제였다.
- 정 마음에 걸리면 지금부터 하면 되지.
“형은 제가 홍보대사 했으면 좋겠어요?”
- 그래. 솔직히 좋은 기회니까.
“하지만 저는 미국인이잖아요.”
- 한국인이기도 하지.
“…그, 맞는 말이긴 한데.”
-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 이미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넌 국민 아들이니까.
이게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도 되는 문제인가. 도현은 아리송했다.
전화는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도현은 자신이 아는, 저보다 더 현명하고 능숙한 사람에게 조언을 구했다. 도현의 문자를 받은 에드워드는 성심성의껏 답해주었다.
[내 작은 친구, 중요한 건 네가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야. 네가 어떤 사람처럼 보이느냐지. 꼭 완벽하게 결백할 필요는 없어.]
결과적으로 큰 도움이 되진 않았다.
에드워드에겐 미안하지만… 약간은 할리우드식 타성에 젖은 말 같았다. 그쪽 동네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할리우드니까’라는 말로 심심치 않게 허용되는 곳이니.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것저것 생각해본 도현이 결국 매니저의 말처럼, 수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여기서 양심적 문제는 제외되었다.
대신 최소한의 타협으로 미뤄두었던 봉사활동을 하기로 했다. 안 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
그러나 도현은 곧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뭘 해야 하지?’
물론 세상은 넓고 도움이 필요한 곳은 많다. 하지만… 이왕 홍보대사까지 맡게 된 김에 잘할 수 있는 활동을 하면 좋잖아.
생각 정리를 마친 도현은 티엘 첫 화보 촬영을 끝내고 이동 중인 차량에서 제 생각을 말했다. 그 추상적인 말을 성의 있게 들어준 경찬호는 딱 한 마디로 정리했다.
“재능 기부를 하고 싶다는 거지?”
“!”
“그것도 좋지. 아니, 오히려 그편이 낫겠네. 그럼 재능 기부를 할 만한 게… 흠. 내가 한번 알아볼게.”
며칠 후, 경찬호는 목소리 기부 자원봉사 건을 소개해 주었다. 고전과 동화를 녹음하는, 일종의 성우와 같은 활동이었는데, 시각장애인협회와 EBA가 함께 ‘77인, 77색’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77인의 성우, 아나운서, 배우, 뮤지컬 배우, 아이돌 등, 기타 연예인들을 섭외해 목소리를 녹음하는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지금까진 그 반절 정도가 섭외된 상태였다.
도현은 감탄했다.
경찬호는 정말 유능한 매니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