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2화. Winter Break (6)
EBA와의 일정은 금방 잡혔다.
정식으로 방송에 나가는 게 아니라 대단한 준비가 필요치는 않았기에 의사를 전달하는 것만으로 빠르게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도현은 EBA 방송국에 들어가면서 유명한 방송국은 거의 다 들러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서 와요.”
도현을 반긴 건 푸근한 인상의 피디였다. 본래 어린이 방송의 고정 피디인 그는 이번에 ‘77인, 77색’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도현을 안내해주며 양해를 구했다.
“먼저 오신 분들이 있어서요. 그분들 녹음이 먼저 끝나야 해서 조금 대기해야 할 거예요.”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요…. 최대한 빨리 끝내보겠지만, 하하. 아까부터 계속 늦춰지고 있는 터라.”
남영국 피디가 머쓱하게 옆머리를 긁적였다. 기다리게 한 것에서 오는 약간의 미안함과 무안함 정도가 전부였다.
‘교육 방송 전문 방송국이라 그런가.’
다른 여타 방송국과 달리 제 눈치를 보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 도현을 시청률을 물어와 줄 복덩이 정도로 여겼다면, 남영국 피디는 옆집 학생 대하듯이 했다.
도현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괜찮아요. 이후에 따로 일정 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아이고,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럼 잠깐 앉아서 쉬고 있어요.”
그는 도현과 매니저에게 마실 것과 간식거리를 권했다. 도현이 커피 과자 한 개를 입에 물 때였다. 녹음실이 있는 안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 -까!
- 나도 안…, 어떻게 해!
도현의 귀가 쫑긋했다.
허허, 하고 난감하게 웃던 남영국 피디는 호기심 가득한 검은 눈동자에 멈칫했다. 그리고선 딱히 비밀도 아니었는지,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안에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아이돌분들이 와 계시거든요. 사실, 원래 일정대로면 늦어도 삼십 분 전에 끝나야 맞는데. 그게 굉장히 열정적인 분들이라….”
“누군데요?”
“아실지 모르겠네요. 엑스텐이라는 그룹이에요.”
엑스텐?
도현은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고개를 돌린 경찬호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시선으로 생각을 교환했다. 그 엑스텐 맞는 거 같죠? 응, 맞는 거 같은데.
“전 그럼 안에 들어가 볼게요. 일단 제가 총괄이라, 안에서 상황 보면서 진행해야 해서….”
“저도 같이 들어가도 돼요?”
“도현 씨가요?”
“네.”
도현의 생각과 다르게 남영국 피디는 이유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하고 떨어진 허락은 선선하다 못해 어딘가 맹맹하기까지 했다.
똑똑. 문을 두어 번 두드린 남영국 피디는 곧장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에 가로막혀 들리지 않던 대화 소리가 선명하게 꽂혔다.
“조금 더 감정을 담아서, 자연스럽게 하란 말이에요!”
“아니. 감정을 담으라 하든가, 아니면 자연스럽게 하라고 하든가! 좀 하나만 해!”
“그것도 못 해요? 그것도 못 하면서 아이돌을 한다고요?”
“막내 또 눈 돌았다!”
음, 난장판이군.
저들끼리 투닥거리는 데 신경이 쏠린 건지, 세 사람이 안에 들어올 때까지 눈치챈 사람이 없었다. 제일 먼저 인기척을 알아챈 사람은 질린 표정을 짓던 엑스텐의 리더, 우진이었다.
우진의 눈이 커졌다.
“…어, 이도현 배우님?”
“뭐?”
“누구?”
다섯 쌍의 시선이 단숨에 몰렸다.
제일 놀란 사람은 영찬이었다.
“…도현이?”
눈을 의심하듯 한번 중얼거린 영찬은 다음 순간 활짝 핀 얼굴로 달려들었다.
“도현아!”
“윤영찬…!”
뒤늦게 멤버들이 손을 뻗었지만, 그보단 영찬이 빨랐다. 그는 단숨에 도현에게로 다가와 덥석 손을 잡았다.
“뭐야? 무슨 일로 온 거야? 언제 온 건데? 오랜만이다!”
신나게 방방 흔들어대는 통에 도현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사이에도 물음표는 끊임없이 쏟아졌다. 헉, 너 키 큰 거 같아! 얼마나 컸어? 그러고 보니 이제 2학년이야? 아직 중학생이네? 근데 우리 얼마 만이지? 물음표 지옥에 갇히려던 도현을 구해준 건, 리더 우진이었다.
“워워. 영찬이 착하지. 떨어지자.”
사람보단 개를 달래는 태도였다.
“왜? 우리 오랜만에 봤는데!”
“씁, 지금 배우님 부담스러워하는 거 안 보여?”
“…아!”
그제야 영찬이 떨어져 나갔다.
“미안…. 연락만 하다가 직접 보니까 반가워서….”
“죄송합니다.”
리더 우진에 곁들여, 방황하는 눈동자를 하던 매니저까지 합세해 사과하기 시작했다. 양쪽에서 쏟아지는 사과에 도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저도 반가웠으니까….”
“헐, 형. 도현이는 천사인가 봐.”
곧장 주접을 떠는 막내의 등을 한 대 친 우진이 머쓱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애가 착한데, 정신이 좀 없어서….”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지난번에 감사했어요.”
엑스텐이란 말을 듣고 안에 들어오길 택한 건, 단순히 반가워서만은 아니었다.
“지난번이요?”
“그때 비비 앱에서 저 언급해 주셨던데.”
도현의 인성 논란 당시, 한때 <전지적 참견쟁이들>을 같이 찍은 적 있는 엑스텐 멤버들에게도 질문이 쇄도했다.
그리고 비비 앱에서 영찬은 지나가듯 ‘정말 착하고 귀여운 친구였다’라고 말한 전적이 있었다. 나중엔 SNS에 같이 찍었던 사진을 업로드하기도 했다.
도현이 환하게 웃었다.
“큰 힘이 됐어요.”
멈칫하던 우진은 이내 양심의 소리를 들었는지, 주춤주춤 말을 꺼냈다.
“…그건, 영찬이가 독단으로 그런 거라.”
그럴 거 같긴 했다.
연차 쌓인 그룹도 아니고, 막 데뷔 2년 차가 된 신인 그룹이 논란에 말을 얹는 걸 어느 소속사가 허락할까.
“그래도요. 저를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게 기뻤거든요. 한번 제대로 인사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게 돼서 다행이네요.”
도현이 영찬을 보며 다시금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자 영찬이 쑥스러워했다. 그러나 올라간 입꼬리에서 뿌듯한 감정이 전해졌다.
“저….”
그때, 애매하게 서 있던 멤버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도현의 시선이 그에게 닿자, 조금 어색한 얼굴을 한 남자가 말했다.
“리더 형이랑 막내랑은 안면이 있으신 거 같은데… 엑스텐 멤버 정주찬입니다.”
“전 신우요!”
“가람입니다. 가람은 예명이고, 본명은 강규람인데, 편한 대로 불러주세요.”
차례로 세 명의 멤버가 자신을 소개했다. 조금 민망한지 눈을 굴리는 모습이 앳됐다.
‘그때 전원이 미성년자라고 했지.’
재작년에 미성년자였으니, 그 당시 열아홉이었던 리더 우진과 몇을 제외하면 아직 고등학생일 터였다.
지난번에 본 아이리스도 그렇고, 엑스텐도 그렇고. 나이대가 참 어리다 싶었다.
“이도현이에요. 말은 편하게 해주세요. 우진 형도요.”
“어, 그, 그래도 돼?”
“네, 그럼요.”
이문처럼 초면부터 반말하는 것도 별로지만, 아직 고등학생밖에 안 된 이들이 과도하게 예의 차리는 것도 불편했다. 본인이 제일 어리다는 사실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 도현이 부드러이 웃었다.
그때, 조용히 있던 남영국 피디가 입을 열었다.
“서로 친분이 있는지 몰랐네요.”
“아, 피디님. 죄송합니다! 빨리 다시 녹음을….”
“아니, 아닙니다. 그보단, 내 생각엔 이왕 이렇게 된 거 도현 씨가 우진 씨를 도와주면 될 것 같은데.”
“제가요?”
어리둥절해하는 건 도현뿐이었다.
엑스텐 멤버들, 특히 영찬은 구세주라도 만난 눈으로 눈동자를 반짝였다. 묘한 압박감을 느낀 도현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을 정도였다.
상황 파악이 덜 된 도현에게 설명을 해준 건 신우였다.
“우진 형이 연기를 진짜 못하거든….”
“진짜, 진짜, 심각해.”
옆에서 영찬이 거들었다. 우진은 약간 울컥한 기색이었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제가 도움이 될까요?”
도현은 배우였지, 선생님이 아니었다. 신우도 도현과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는 약간 멋쩍은 기색으로 말했다.
“그냥 간단한 조언이라도….”
“아. 그 정도는 괜찮지만. 불편하지 않겠어요?”
뒷말은 우진을 보면서 물은 거였다.
아무리 배우와 아이돌이라는 차이가 있다고 하나, 저보다 어린애에게 무언갈 배우는 걸 싫어하는 이들도 있으니까. 도현의 시선을 받은 우진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홱홱 저었다.
“아니, 아니아니! 완전 괜찮아! 도와주면 나야 고맙지.”
우진은 그런 성격은 아닌가 보다.
하긴, 동생들과 이렇게 허물없이 잘 지내는 것만 봐도 보였다. 나이나 권력을 내세우지 않으니까 이렇게 화기애애 지내는 거겠지.
“좋아요. 저라도 괜찮다면요.”
“차고 넘치지. 그런데… 정말 괜찮아? 솔직히 내가 연기를 진짜 못하긴 하거든.”
“전 괜찮아요. 어차피 제가 다음 순서라서, 도와드리는 편이 저한테도 도움 되고요.”
“아!”
엑스텐 멤버들이 탄식했다. 그제야 도현이 이곳에 와 있는 이유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도현은 사과 릴레이가 다시 시작되기 전, 재빨리 말을 꺼냈다.
“일단, 제가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어, 지금?”
“네, 지금.”
묘하게 단호한 태도에 우진은 싫다는 말도 못 하고 어물어물 대본을 들었다. 정말 하냐는 듯, 조금은 불쌍한 눈빛을 지었지만, 도현은 칼 같았다.
“시작해 주세요.”
“…넵.”
어쩐지 존댓말로 회귀했다.
우진은 결국 부담감 속에서 한 페이지 분량의 낭독을 마쳤다. 대본에 코를 박듯이 읽고 나자, 고개를 들기 무서워졌다.
‘도현이가 비웃고 있으면 어쩌지.’
멤버들이 비웃는 건 괜찮다. 그 또한 그들의 볼꼴 못 볼 꼴을 다 봤으니. 그러나 도현은 아니었다. 도현이 비웃는다면 마음의 상처로 남을 거 같았다.
배우상이라는 말을 곧잘 듣는 남성적인 외향과 다르게 은근히 여린 우진은 미적미적,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진지한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나쁘지 않아요.”
“…응?”
“형이 메인보컬이죠? 확실히 발성도 좋고, 힘도 좋네요. 다 좋은데, 그냥 어느 부분에서 힘을 주고 어느 부분에서 힘을 빼는지 감을 못 잡는 거 같아요.”
“어어….”
“대본 좀 볼 수 있을까요?”
우진은 홀린 듯이 대본을 건네주었다. 도현은 테이블로 가는가 싶더니, 남영국 피디에게 양해를 구해 그 위에 굴러다니는 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쓱쓱, 쓱.
펜 끝이 종이 위를 거침없이 지나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그 행동이 너무 확신에 차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뭘 하는 거냐고 묻거나, 대본에 낙서하면 안 된다고 말리지 못했다.
“자요.”
우진은 얼떨결에 대본을 건네받았다. 방금 그가 읽었던 페이지가 어떤 표시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체크해 둔 부분은 숨을 쉬는 타이밍이에요. 그 외의 부호는, 잘 알죠?”
우진은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장과 문장 사이, 그리고 단어 위에 표시된 기호는 우진이 잘 아는 것이었다. 악보에서나 쓰는 악상 기호였으니까.
“연기라는 걸 너무 의식해서 어색해지는 거 같아요. 그래서 조금 더 익숙한 기호로 표시했어요. 연기보다는 노래라고 생각해봐요. 스타카토는 악센트에 힘을 주고 아지타토는 조금 더 성급하게, 흥분조로 치고 들어가는 느낌으로.”
익숙한 기호들에 우진은 저도 모르게 대본을 주르륵 읽어 내렸다.
도현의 지침은 상당히 섬세했다.
어느새 우진의 머릿속에 하나의 리듬이 떠오를 정도로. 우진은 무의식중에 입 안에서 대사를 따라 읽고 있었다.
처음엔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인가 했는데….
‘왜 될 것 같지?’
우진의 혼란을 모를 도현은 차분히 설명했다.
“표정까지 사용하는 연기면 이런 방식을 쓰긴 어렵겠지만, 목소리만 녹음하는 거니까요. 어떤 박자에 쉬고, 어떤 문장에서 악센트가 들어가는지 정도만 알면 훨씬 자연스러워질 것 같아서 해봤는데… 어때요? 한번 해볼 수 있어요?”
우진이 아까보다 자신감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갸웃하며 약간은 불안한 낯으로 리더를 보던 엑스텐 멤버들은 이어진 연기에 입을 벌렸다.
물론 가장 놀란 건 우진이었다.
‘이게 진짜 되네?’
연기하는 게 아니라, 마치 음이 일정한 노래를 부르는 기분이었다. 나중에는 어떠한 정형화된 박자가 느껴졌다. 그걸 느끼고 나니 대사가 나오는 타이밍은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아까 했던 부분을 다시 한번, 그러나 완전히 다르게 마친 우진이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대박….”
“와, 이걸 해내네….”
멤버들이 저마다 놀란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