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3화. Winter Break (7)
힐끔.
우진은 일필휘지로 각종 기호 및 부호를 적어 내려가는 도현을 흘끔거렸다.
오 분 전, 악상 기호의 효용을 확인한 도현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본을 건네받았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우진 또한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하고 대본을 주었다.
그리고 현재.
도현은 우진이 녹음해야 할 모든 부분을 악보화(?)하는 중이었다.
우진은 엉거주춤하게 앉아서 그런 도현을 구경했다.
‘신기해. 나는 작곡을 배우고 있다지만, 얘는 뭔데 익숙하지?’
우진은 본디 음악 영재였다.
어렸을 땐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 상을 타 왔고, 사춘기에 접어들어선 그 음악적 관심을 피아노 대신 노래와 춤으로 표출했다.
거기다가 ‘자체 프로듀싱하는 아이돌’이 인기를 끌면서 소속사에서 우진을 프로듀싱 멤버로 밀고 있는 요즘, 그는 작곡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나를 시키면 둘을 하는 성실함을 가진 우진은 미디 공부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 놓았던 피아노도 틈틈이 건드는 중이었다.
그런 우진이 이런저런 기호에 익숙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저 애는?
‘아는 정도가 아니라 엄청 익숙해 보이는데.’
단순히 아는 정도면 별로 놀랍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도현은 기호를 적재적소에 사용하며, 다른 분야에 활용하는 능력까지 갖췄다.
신기하지 않을 수가 있나.
“-다 됐어요.”
“어? 아, 응, 고마워!”
“한번 확인하고 어색한 부분이나 궁금한 점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알았어.”
집중, 집중.
한참 어린 애가 밥숟갈을 떠서 입에 대주기까지 했는데 삼키지 못하면 어른이라고 할 수 없다. 애초에 어린애가 먹여주는 부분부터가 문제인 것 같지만….
잠깐 흐려졌던 우진의 초점이 바로 잡혔다. 우진은 어느새 집중해서 대본을 훑어 내렸다.
“와.”
탄식이 절로 새어 나온다.
분명 며칠 동안 틈틈이 읽었던 대본인데, 왜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
직업병인지, 머릿속에 저절로 리듬이나 운율이 그려졌다. 어떤 박자로 어떤 느낌을 살려야 하는지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게임으로 치면 버그를 쓴 기분이었고, 다르게 표현하자면 연기 천재가 된 기분이었다.
눈의 깜빡임이 느려졌다.
‘나… 연기에 재능 있을지도?’
소속사에 얘기해봐야 하나, 우진이 진지하게 고민할 때였다.
“그건 편법이에요.”
훅 치고 들어온 목소리가 우진의 망상을 깨트렸다. 속마음을 들킨 기분에 뺨이 조금 붉어진 우진이 헛기침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목소리만 녹음하는 경우라서 가능한 거고… 또, 이 방식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건 지금뿐이거든요.”
“왜?”
우진의 구제 불능인 연기력은 이것만으로도 크게 상승했다.
그런데 지금만 유용할 거라니?
“보면, 기호 표기 방법이 생각보다 단순하잖아요. 제가 표시한 건 한번 익숙해지면 형도 금방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그런가…?”
우진은 여전히 아리송했다.
“네, 게다가 이건 기존의 부자연스러움을 기계적으로 덜어내는 거에 불과해요. 여기선 이렇게 하고, 저기선 이렇게 해라, 입력한 대로 출력해서요. 그런 방식은 한계가 금방 드러나요.”
“노래에 감정을 싣는 거랑 같은 느낌인가?”
“아마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우진은 고개를 주억였다.
노래를 부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기교적인 부분을 지키는 건 무척 중요하다. 그러나 기교만 충족한다고 해서 좋은 노래가 되는 건 아니었다. 감정이 빠지면 아무리 결점 없는 노래라 해도 단팥 빠진 호빵처럼 맹맹하게 느껴진다.
“조금 알 것 같아.”
동시에 아쉬워졌다.
‘난 연기는 아니구나….’
“형 연기에 재능 있어요.”
우진의 어깨가 찔끔 떨렸다. 그의 눈동자에 미약한 파문이 일었다.
뭐지. 얘 뭐지. 내 생각을 읽나?
아까부터 타이밍이 너무 공교로워서 절로 의심이 일었다. 우진이 괜히 닭살이 돋아난 팔을 쓱쓱, 쓸어내릴 때였다.
“익숙한 기호래도 그렇지, 바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거 절대 쉬운 일 아니거든요. 감만 잡으면 연기도 충분히 잘하실 것 같은데요?”
조곤조곤한 칭찬에 입꼬리가 씰룩였다. 우진은 기쁜 티를 내지 않으려 부러 입매에 힘을 주었다.
“큼, 큼. 그래?”
“네. 재능 있어요.”
“하하, 내가 좀… 다방면에서 유능하긴 하지.”
“우우우!”
리더의 잘난 척에 동생들이 곧바로 야유했다.
그쯤이야, 익숙하게 귓등으로 흘려 넘긴 우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다가, 슬슬 녹음을 시작하면 좋겠다는 남영국 피디의 말에 화들짝 놀라 녹음실에 들어갔다.
우진이 녹음을 시작하자, 기회를 엿보고 있던 영찬이 도현에게 말을 걸어왔다.
“여기서 만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
“저도요.”
“우린 우진 형이 사랑받은 만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우겨, 아니, 주장해서 온 거거든.”
영찬의 말에 다른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형이 과하게 성실하긴 해. 그래도 착하긴 하잖아. 그건 그렇지. 저들끼리 수런수런 얘기를 나누다가 도현에게로 타깃을 돌렸다.
“너는?”
“전….”
도현은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져서 말하기를 망설였다.
“그냥… 이번에 청소년 홍보대사가 돼서요.”
너무 속물 같은 대답인가.
지레 찔린 도현이 눈을 내리까는데, 옆에 있던 영찬이 호들갑스럽게 숨을 들이켰다.
“홍보대사? 진짜? 멋있다!”
“우리는 그런 거 언제 해보나. 시키면 잘할 텐데. 물론 우진 형이.”
“우린 아직 멀었어. 정진하도록.”
그들의 아무렇지 않은 기색에 도현은 슬그머니 내렸던 시선을 다시금 올렸다. 영찬의 얼굴에는 선망의 빛이, 다른 멤버들의 얼굴엔 부러움이 떠올라 있을 뿐, 그 외의 다른 감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도현은 남몰래 한숨을 삼켰다.
그때, 영찬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아까, 기호 되게 익숙해 보이던데. 악보 같은 거 자주 봐?”
영찬이 바꾼 화제에 신우도 호기심을 보였다.
“맞아. 나도 물어보고 싶었어. 뭐 배우는 악기라도 있어?”
“배우는 악기….”
도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기억을 통해 배우니 그것도 배우는 거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결국 내 기억이니 독학이라고 해야 하나. 세상은 영혼이 하나인 사람의 기준으로 되어 있어서 도현에겐 모호한 것이 꽤 많았다.
“가끔 연주하는 건 있어요.”
“뭐? 뭔데?”
“바이올린이요.”
그 대답에 신우는 머릿속으로 ‘자기한테 딱 어울리는 거 찾았네’라고 생각했다. 신우가 도현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그럼에도 느껴지는 특유의 섬세하고, 얇은 얼음 막 같은 분위기는 현의 예민함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가람도 비슷한 생각인지 저마다 탄성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억울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말? 왜 난 몰랐지!”
구겨진 미간이나, 아래로 처진 눈매 따위가 정말로 억울해 보여서 도현은 눈을 끔뻑였다. 그 와중에도 영찬은 분개했다.
“어떻게 이런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수가 있지?”
“…어, 제가 말해준 적 없으니까요?”
“하지만!”
영찬이 항변했다.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었을 거 아니야!”
“…아마, 다른 사람들도 몰랐을걸요?”
대부분은 말이다.
도현은 왜 달래는지도 모르면서 영찬을 달랬다. 영찬은 도현을 말을 듣고 ‘어?’ 하더니 점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영찬이 크게 뜬 눈으로 더듬더듬 물었다.
“이거… 혹시, 오프더레코드야?”
“네, 따져 보자면요.”
아직 공식적으로 밝힌 바 없고, 앞으로도 별다른 일이 없는 한 그럴 것 같으니, 결과적으로는 오프더레코드가 맞았다.
“헐….”
억울한 너구리 같던 얼굴이 단숨에 초롱초롱해졌다. 도현은 그런 영찬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멤버들은 차고 넘치게 이해했다.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비하인드라니. 그야말로 성덕 아닌가.
‘근데 왜… 아니꼽지?’
같은 멤버가 좋아하고 있는데 기쁜 마음이 든다기보단 괜히 아니꼬웠다. 아니, 사실은 도현이 나타난 순간부터 치와와 같은 성질머리를 팍 죽이고 내숭을 떠는 게 꼴같잖았다.
멤버들이 흐린 눈을 하든 말든, 신이 난 영찬은 이것저것 물었다.
“언제부터 배웠어? 나도 언젠가 들을 수 있을까? 아! 우리 소속사 놀러 올래? 아니다, 나중에 내 싱글 음반 낼 때 네가 반주를 해주면….”
저러다 머릿속에서 정규앨범까지 콜라보해서 낼 기세였다. 이럴 때 급발진하는 막내를 말리는 건 우진의 몫이었지만, 지금은 녹음실에 갇혀 있으니 가람이 나서야 했다.
도현의 안색을 살피던 가람이 적당히 말을 끊으려던 때였다.
“아! 그럼 혹시, 그때 <방랑자>에서 연주한 것도 너야?”
질문 폭탄을 터트리던 영찬이 뒷걸음치다가 결국 진짜 폭탄을 찾아냈다. 영찬의 질문 세례에 무념무상의 낯을 하고 있던 신우가 픽 웃었다.
“영찬아, 그건 너무 갔다. 아무리 그래도 H가 어떻게 도현이야. 그때 도현이 나이가 몇인데. 뀨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신우는 그가 대답해 주리라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가람은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고 있을 뿐이었다.
그 시선이 향한 건 도현이었기에, 신우의 시선도 자연히 도현에게로 향했다.
“어… 신우 형 말이… 맞겠죠?”
?
“그때 여덟 살이었으니까요.”
신우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왜… 어색해 보이지?
스튜디오에 들어온 이후로 능수능란한 모습만을 보여줬던 도현이 유난히 뻣뻣해 보였다.
착각인가?
신우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잘못 본 게 맞았네.”
“네?”
“아니야, 아무것도.”
다시 본 도현은 여느 때의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수긍하고 넘어가려던 차였다.
근데 방금 의문문이지 않았나?
문득 든 생각이 스러지려던 의심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벌컥!
“으아아! 끝났다아!”
감격에 찬 외침을 뱉으며 녹음실에서 뛰쳐나온 우진에 의해 미약하던 의문은 흩어져 버렸다. 신우는 생각하던 것을 잊고 우진에게 달려가 장난을 걸었다. 영찬도 그 위에 달려들었다.
가람은 피식 웃으면서 멤버들에게 다가가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남영국 피디와 대화를 나누는 도현의 모습이 보였다.
혼혈임을 나타내는 녹갈색 눈이 잠깐 묘한 빛을 띠었지만, 금방 거두어졌다.
‘나랑은 상관없지.’
이러나저러나, 가람은 제 앞가림과 성격은 착한데 어딘가 많이 모자란 멤버들만으로도 바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