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6화. Winter Break (10)
제일 신경 쓰였던 위촉식 일정이 끝나자 도현은 마음의 여유를 조금이나마 되찾았다. 물론, 유리 진열장에 베니스, MTV, KBN 시상식 트로피와 함께 진열된 위촉패를 보면 종종 묘해졌지만.
홍보물 촬영도 수월하게 끝났다.
청소년 협회라고 해서 다른 건 없었다. 주어진 옷을 입고, 사진을 찍고, 응원 영상을 남기면 되는 것이다. 촬영된 영상은 다음 날 유튜브에 올라갔다.
그렇다고 해서 도현의 할 일이 모두 끝난 건 아니었다.
- 협회에서 분기별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거든요. 혹시 시간 되면 참가해 주시면 좋을 거 같은데… 다 참여하라는 건 아니고, 한 번만 해줘도 좋으니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봐요.
매니저 형한테는 위촉식 참여와 홍보물 촬영만 해도 된다고 했던 게 무색하게도, 두 개의 활동이 끝나자마자 협회 측에서 은근하게 권유해왔다.
- 아니면 아예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해도 좋고요. 도현 씨는 청소년 홍보대사니까, 이런 솔선수범을 보여도 좋지 않을까요? 그럼 우리 청소년들이 조금 더 도현 씨를 보고 꿈과 희망을 키우고, 건전한 어른으로 자라날 거 같은데….
말이 권유지, 친절한 압박에 가까웠다. 살살, 돌려 말하며 홍보대사의 책임을 거론했다. 어이없는 것과는 별개로 감투만 쓰고 나머진 모른 척할 생각은 없었던 도현은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관계자는 아쉬워하면서도 수긍했다. 그렇게 청소년 홍보대사 건과 관련해서는 얼추 정리되었다.
여유가 생기고 나니 미뤄두었던 약속이 생각났다. 도현은 은혜에게 연락해, 당근으로 내밀었던 소속사 투어 일정을 잡았다.
그게 지금, 도현이 반짝이는 세 쌍의 시선을 받는 이유였다.
세 명의 초등학생과 도현은 SBC 방송국 앞에 서 있었다. 왜 소속사가 아니라 방송국이냐 하면, 새솔 소속사보단 방송국을 구경하는 게 더 재밌을 거 같단 도현의 판단 때문이었다.
‘솔직히 새솔은 그냥 회사니까.’
엔터라는 말이 붙어서 신비롭게 보일지 몰라도, 도현이 보기엔 그다지 구경할 만한 건 없었다. 아이돌이 주력인 엔터처럼 지하에 비밀스러운 연습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회사였다.
견학은 방송국이 낫지.
“들어갈까?”
“응!”
힘차게 대답하는 은혜와 달리 두 아이는 도현의 눈치를 보았다. 힐끔힐끔 훔쳐봤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화드득 놀라는 게, TV에서 보던 사람을 실제로 보는 게 낯선 거 같았다.
“은혜야, 거기 아니야.”
처음 오는 곳도 앞장서서 걷는 씩씩함은 참 좋은데, 저러다 길을 잃을까 걱정이었다. 도현은 은혜가 손길을 피해 뛰어다니는 토끼라도 된 것처럼 손목을 붙들었다.
“은혜야, 내가 뭐라고 그랬지?”
“함부로 다니면 안 된다고….”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명이라는 적은 수지만, 도현은 오늘 이들의 보호자였다. 열다섯이 보호자 역할을 맡기에 적절한지는 넘어가고-도현은 자신이 데려간다는데 아무런 불안도 표하지 않은 세 아이의 부모님에게 묘한 감정을 느꼈다-, 아무튼 오늘의 도현은 평소보다 조금 더 조심스러웠다.
“그래, 잘 기억하고 있네. 너희도 마찬가지야.”
두 친구를 보며 말하자 아이들이 고개를 휙휙 끄덕였다. 바람 소리가 날 것같이 빠르게 움직이는 고갯짓에 도현이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두 아이의 눈이 커졌다.
“어….”
“와….”
이상한 탄식을 흘리는 친구들에 은혜의 볼이 부풀었다. 은혜는 갑자기 경계심이 차오른 눈으로 도현의 옆구리에 딱 붙어 섰다. 성장이 더딘 은혜는 아직 도현의 가슴팍에도 오지 않아서, 동글동글한 예쁜 두상이 훤히 보였다.
‘귀엽다….’
오늘로써 세 번째 감상을 떠올린 도현이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내리눌렀다. 방송국에 온다고 아침부터 공들여 땋은 머리였다. 망쳤다간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세 아이를 데리고 로비에 가자 한 직원이 다가왔다.
“이도현 씨, 맞으시죠?”
“아, 네.”
도현의 표정은 꽤 머쓱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도현은 SBC에서 정식으로 주관하는 견학 프로그램을 이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매니저가 너무 유능하고, 실천력이 좋은 게 문제였다.
도현의 계획을 들은 매니저는 곧장 방송국에 연락했고, 방송국 측에서는 견학 날짜만 알려달라는 말을 전해왔다. 이쪽의 의사에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그 소식을 언제 전해 들었는지, 성진수 감독이 전화해서 직접 안내해주지 못하는 걸 아쉬워했다. 그가 도현의 안내인을 맡았던 적이 있기에, 그게 더없이 진심이란 걸 알아서 도현은 더욱 뻘뻘댔다.
- 용인에 있어서 아쉽네요. 아무튼 내가 그쪽에 말은 잘 해뒀습니다. 구경하고 싶은 곳 대부분은 구경할 수 있을 테니까, 편하게 놀다 가요.
이래서 인맥이 중요하다고 하는 건가.
열다섯의 나이에 인맥의 효용성을 알아버린 도현은 약간 미묘한 눈빛을 했다. 편하긴 한데, 마음이 완전히 편치는 않았다. 사회에 물들어가는 기분이 이러할까….
‘내가 무슨 생각을.’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이상한 감상에 고개를 저어 털어낼 때였다.
“SBC 홍보 담당 실장 유준철입니다.”
“아, 네. 이도현이에요. 오늘 견학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우리 방송국에 이렇게 관심을 주시니 좋은걸요. 이쪽 친구들은…?”
은혜와 두 아이가 차례로 자신을 소개했다. 인사 앞에 초등학교 반과 번호까지 붙어서, 도현은 입 안의 살을 깨물어야 했다.
“이번 방학 동안 견학 보고서를 써야 한대요.”
“아하, 그렇군요. 그럼 돌아갈 때 팸플릿이랑 기념품 챙겨 드릴게요. 이따가 원하시면 사진 촬영도 가능합니다.”
“감사합니다.”
네 사람은 견학홀로 이동했다. 견학홀에는 선객이 있었는데, 견학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온 사람들인 거 같았다.
그들은 도현을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해설원의 설명은 어느새 뒷전이 된 후였다. 도현은 해설원의 일을 방해한 것에 미안함을 느끼며 그들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눈인사를 받은 사람이 깜짝 놀라 얼음이 되었다.
그 후로도 시선은 등 뒤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도현도 이곳에 견학생의 입장으로 온 것이라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여긴 우리 방송국의 역사를 기록해놓은 곳입니다.”
처음으로 간 곳은 역사관이었다.
‘성진수 감독은 여기로 안 데려왔었는데.’
도현이 방송국 역사에는 관심 없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역사관은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세 초등학생의 견학으로 온 건데, 어느새 도현이 더 집중하고 있었다.
과거 작품들부터 현재 작품에 이르기까지. 도현이 아는 작품도 있었고, 모르는 작품도 있었다. 그리고 왕의 길은 아직 역사관에 걸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다음에는 전시된 카메라를 구경하기도 했다. 이 또한 도현은 흥미로웠는데, 다른 아이들은 아닌 듯 점점 집중력이 분산되었다.
“은혜야, 가만히 있어야지.”
특히 은혜가 자꾸만 도현의 옷을 잡아당기며 장난을 쳤다. 니트라서 이미 늘어난 거 같았다. 도현이 옷을 살짝 집으며 말했다.
“이거 봐, 늘어났잖아.”
“나 때문 아니야!”
“그럼 누가 이랬어?”
“스, 승준이가!”
“?!”
옆에 서 있던 승준이란 친구가 난데없이 맞은 물벼락에 토끼 눈이 되었다.
“나 아닌데?”
“내가 다 봤거든?”
“거짓말!”
“네가 더 거짓말!”
“네가 더…!”
문어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실랑이를 하던 승준은 갑자기 원망의 화살을 도현에게 돌렸다. 씩씩거리는 얼굴에 도현은 조금 억울해졌다.
그러나 은혜가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건 맞기에, 은혜를 잘 타일렀다. 처음에는 아니라고 부정하던 은혜는 곧 통하지 않을 걸 알았는지 팩 토라졌다.
‘쟤가 사춘기인가….’
은혜의 친부모도 안 하는 고민을 하며 도현이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 후로도 크고 작은 티격태격이 있었다. 그때마다 도현은 최대한 부드러이 타이르며, 승준이와 예솔이라는 아이의 눈치를 봤는데, 그건 그들이 친분이 있는 은혜와 저의 사이에 소외감을 느끼거나, 아니면 혹은 은혜와 사이가 틀어질까 봐서였다.
그런 간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견학 간다고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두꺼운 흰색 코트에 흰색 스타킹, 보라색 구두를 신은 은혜는 불만스레 발걸음을 쿵쿵 내디뎠다.
딴에는 짜증을 내는 거 같은데 솔직히 하찮고 귀여웠다.
‘어차피 크게 사고 치는 것도 아니고.’
갈등도 가벼운 투닥거림에 가까웠고, 진짜로 서로 미워서 씩씩대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티격태격대다가도, 재밌는 게 보이면 눈을 빛내며 같이 달려들었으니까.
지금도 그랬다. 실제로 촬영을 진행하는 스튜디오에 들어온 아이들은 연신 탄성을 터트리더니, 직접 체험해볼 수 있다는 말에 꽃처럼 화색을 띠었다. 알아서 잘 놀아서 도현은 별로 할 게 없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이네.’
아무래도 은혜는 학교에서 잘 지내는 거 같았다.
하긴, 원래 그랬지. 은혜는 이보다 더 한 주먹만 했을 때도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야무진 아이였다. 아직도 도현은 아이스 스케이트장에서의 스파르타 수업을 잊지 못했다.
‘문제는 나지.’
은혜는 저렇게 어린데도 자기 앞가림을 스스로 할 줄 안다. 도현의 앞에선 종종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았지만, 듣기론 다른 곳에선 의젓하다는 거 같았다. 의젓하기를 넘어 장군감이라고.
아직도 제일 친한 친구에게 주기적으로 눅눅해지진 않았는지 의심받는 도현과는 달랐다.
“후….”
도현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는 망설임이 검은 눈 위에 응어리졌다. 기실, 목소리 기부를 한 날 이후로 매일 그랬다.
상생, 환원, 그리고 영원불멸한 기록. 그 힌트에서 도현은 답을 찾아낸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게 정답인지, 오답인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였다.
둘 다 답은 답인데, 의미가 너무 다르지 않은가….
조금 더 객관적인 시야를 갖추고자 문제를 멀리 떨어트리고, 눈앞의 일정에 집중해도 보았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고민만 더욱 깊어졌다.
도현은 자신의 답 없음을 익숙하게 인정하며, 그날 차 속에서 생각해냈던 계획을 다시금 떠올렸다.
형의 이름을 밝히거나, 형과의 관계를 알리기엔 이르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니까. 적어도 희운이도 진실을 모르고, 그의 부모님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패닉에 빠지는 지금은 아니었다. 그건 확실했다.
하지만, H라면?
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맡아 단숨에 유명세를 탄 연주자. 그러나 그 후로 단 한 번도 소식을 알 수 없어 그저 미지로 남은 존재. 지금 와서는 간혹가다 회자되는 게 전부인, 신원 미상의 바이올리니스트.
그 H의 이름으로 음반을 낸다면?
도현이 마른침을 삼켰다. 심장이 엇박자로 쿵쿵 뛰어댔다. 아무것도, 프로필을 포함해 그 무엇도 밝히지 않고 오직 H라는 이름과 연주만을 담은 음반을 세상에 내보내는 거다.
여전히 세상은 H가 누구인지 모를 것이다. 설마하니 열다섯의 꼬마라곤 상상도 못 하겠지. 영화가 나온 게 몇 년 전이니만큼, 더욱 연상하지 못할 것이다.
음악계에서 건방지게 느낄 일이란 건 알았다. 거긴 조금 보수적인 면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 음반 수익을 전액 기부한다면? 그게 순수한 자선 음반이라면, 익명성에 트집을 잡지는 못하리라.
도현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일이 착착 굴러가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몇 군데 비어 있던 퍼즐을 완벽하게 맞추어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정답인지 오답인지 고민하고 있으면서, 머릿속으로는 이미 계획이 촤르륵 펼쳐진 후였다.
이 비밀스러운 활동을 도와줄 사람도 둘이나 리스트에 존재했다.
한 명은 에서 연주 립싱크를 가르쳐주었던 바이올리니스트, 왈트 레이먼. 그와의 첫 만남은 썩 좋다고 할 수 없었지만, 어쩐지 도현은 그가 별로 싫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진실을 알리지 않았던 그가 새삼스레 비밀을 퍼트리려고 할까? 어쩐지 도현은 왈트가 그러지 않으리란 직감이 들었다.
그는 오랫동안 음악계에 몸을 담았던 사람이니, 괜찮은 음반사나 레코딩 스튜디오에 연결해줄 수 있겠지. 적당한 대가를 제시하면 그에게도 나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은….
“밀턴….”
도현이 신음을 흘리듯 작게 중얼거렸다.
밀턴 레이시. 지니 레이시의 친부이자, 저명한 음악 평론가. TV에 출연할 정도이니 그가 음악계에서 가지는 입지는 가볍지 않을 것이다. 도현을 도와주기엔 최적의 효율을 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믿을 수 있는가의 문제를 제외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