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76화 (477/582)

제477화. Winter Break (11)

친구의, 그것도 절친한 이의 부모에게 갖기엔 박한 평가. 그러나 도현이 판단하기엔 밀턴은 위험 요소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도현이 H라는 걸 짐작하고서도 지금까지 함구하는 건, 도현을 향한 호의가 아니었다. 딸을 위한 마음이었지.

오히려 그는 도현의 행보에 불만스러워했다. 아마도 그의 눈에 도현은 클래식을 부활시키고자 신께서 내려주신 희대의 천재인데, 방황하여 연기의 길로 빠져든 어린 양일 것이다.

가끔 밀턴이 저를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여기 가엾은 어린 양….’ 하며 기도를 웅얼거리니, 모를 수가 없었다. 도현은 그 은근한 압박을 모르는 척 넘겨버렸지만.

그래서 도현에게 밀턴은 마치 뒤에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는지 모르는 카드 같았다. 그러나 무척 매력적이라서 눈길이 가는 카드.

그것만 문제면 다행이지.

왈트와 다르게 밀턴은 도현에게 받을 만한 게 없었다. 그 성격상 딸의 친구한테 금전적 대가를 받을 리는 없으니. 이렇게 되면 완전히 밀턴의 ‘호의’에 기대게 되는 거였다.

“…….”

흰 낯에 껄적지근한 감정이 올라왔다.

일방적인 호의라니.

생각하기만 해도 속에서 거북함이 차올랐다….

‘역시 왈트인가.’

저울이 점점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때였다. 홍보 실장이 도현을 불렀다. 그의 낯은 어딘가 골치 아프다는 듯 찌푸려져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학생 한 명이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질 않아서요. 오 분 정도 지났는데.”

“화장실?”

도현은 녹음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승준과 예솔은 잘 놀고 있으니, 사라진 아이는 은혜였다. 도현은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방송국 안에 있을 테니까.

“화장실이 바로 앞이거든요. 혹시 도현 씨가 가서 불러줄 수 있어요?”

왜 저렇게 시선을 피하나 했더니.

여자 화장실 앞에서 애 부르기가 싫었던 거구나.

“…음, 네.”

그럴 수 있지.

도현은 짧게 수긍하고 승준이와 예솔이를 불렀다.

“넷!”

어쩐지 기합이 빡 들어간 대답이 돌아왔다.

“은혜 데리고 올 테니까, 여기, 이분이랑 같이 있어야 해. 혼자 어디 가지 말고. 알겠지?”

승준과 예솔은 그다지 얌전한 아이들은 아니었다. 활력이 넘치는 은혜와 어울리는 것부터 그들의 남다른 싹을 증명했다. 셋이서 반을 주름잡는 행동대장들이지만, 대부분이 그렇듯이 도현의 앞에서는 누구보다 순한 양이 되었다.

“네! 선생님!”

말간 낯으로 외친 말에 도현은 잠시 얼음이 되었다. 선생님이라니…. 일일 보호자 역을 맡긴 했어도, 그건 좀 그렇지 않나?

도현은 어색한 기분에 손을 몇 번 움직이다가 결국 모호하게 웃고 말았다.

도현은 홍보 실장이 말한 화장실 앞에 섰다. 은혜야, 작게 불러보자 대답이 없었다. 이번엔 조금 더 크게 불러봤다.

“은혜야, 안에 있어?”

돌아오는 건 고요였다.

도현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다시 한번 묻는 대신 다른 것을 보았다. 우주의 끝자락처럼 새카만 눈동자 위로 어렴풋한 빛이 어렸다.

은혜의 영혼은 토끼털처럼 하얗고 보들보들했다. 진짜 촉감이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양털처럼 몽글몽글한 영혼을 보고 있자면 그런 감상이 절로 일었다.

“…없네.”

화장실 안에는 아무도 없다.

도현은 일단 여자 화장실에서 몇 걸음 떨어진 후, 복도에 서서 생각했다. 스위스에서 니키를 놓쳤던 때와 비교하면 놀라우리만치 침착했다.

그곳은 외국인이 가득한 타지였고, 또 정체 모를 위협적인 인물이 존재했으니까. 그에 비하면 이건 단순히 방송국 안에서 길을 잃은 일일 뿐이었다.

녹음실이 바로 앞이라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다는 걸 생각해보면, 은혜의 돌발행동일 가능성이 컸다.

도현은 차분히 생각했다.

화장실에 없으면 어디 있을까. 녹음실?

아니, 그렇다면 도현과 마주쳤어야 했다. 그럼 다른 곳으로 갔다는 건데….

도현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함부로 다니면 안 된다니까.”

그래, 은혜한테 무슨 죄가 있을까. 데려와 놓고선 홀로 다른 생각에 잠겼던 도현의 탓이지. 은혜는 죄가 없었다. 원래 애는 호기심이 왕성한 게 좋은 거였다.

한숨을 한 번 내쉰 도현이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평소에 영혼을 본다고 표현하지만, 사실상 그건 애매한 감이 있었다. 보긴 보는데 눈으로 본다기보단… 모든 감각이 합쳐져 ‘본다’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느낌일까.

그래서 이렇게 눈을 감아도 볼 수 있었다. 특정한 것에 집중할 때는 이편이 더 편했다. 그러면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것을 배제하고 오직 영혼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

도현은 집중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은혜를 찾았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괜찮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긴장했던 건지, 반사적으로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일단 도현은 녹음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은혜가 다른 층에 있음을 밝혔다. 홍보 실장은 조금 경악한 눈이 되었다.

“제가 데려올게요. 어디 있는지 알아요.”

“같이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빠르게 데리고 올게요. 다른 애들은 그냥 놀고 있게 해주세요.”

제 부주의로 일어난 사고다. 다른 애들까지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저렇게 씩씩해 보여도 친구가 사라졌다는 말을 들으면 놀랄 테니까.

홍보 실장은 탐탁지 않아 했지만, 도현의 거듭된 요청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이 가진 이미지가 한몫했고… 그리고 유독 어른스러운 아이들이 많은 연예계에서 열다섯이면 그리 어린 편도 아니긴 했다.

엑스텐의 영찬도 열여섯에 데뷔했고, 아이리스에는 열다섯에 데뷔한 사람도 있지 않던가.

도현은 어디 가냐는 아이들 물음에 음료수를 사 올 거라고 둘러대며 녹음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탈까 하다가 그냥 비상구 쪽으로 가서 계단을 올랐다.

‘은혜는 왜 위층에 간 걸까.’

은혜의 행동은 종종, 아니, 자주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었지만, 이번 것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행동을 한단 말인가. 장난은 쳐도 걱정은 끼치지 않는 애였는데.

계단을 한 칸 한 칸 올라가며, 오늘 있었던 일을 되짚었다.

‘별일은 없었던 거 같은데….’

방송국에 도착해서, 잡았던 손목을 놓자 손을 잡아달라고 한 것을 거절하긴 했다. 싫어서가 아니라 다른 애들이 소외감을 느낄까 봐서였다. 은혜만 신경 쓰면 안 되는 위치기도 했고.

역사관을 구경하면서도 장난을 잘 안 받아줬다. 근데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앞에서 홍보 실장이 설명해주고 있는데, 동생과 장난을 치다니. 도현의 사고 체계에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친구랑 싸울 때도 은혜 편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그건 은혜가 억지를 부려서고…. 녹음실에서 같이 체험해 보자고 하는 걸 거절하긴 했지만, 그건 이런 일이 익숙한 도현 말고 다른 애들이 더 많이 체험해 봤으면 해서였다.

역시 별일 없었던 거 맞는데.

도현은 머리를 굴리며 마침내 나타난 문을 열었다. 그러자 곧장 밝은 형광등 빛이 눈을 찔렀다. 도현은 눈이 적응하기 전에 은혜를 찾았다. 그러나, 찾는 것보단 귓가에 들어오는 소리가 빨랐다.

“아니야!”

“아니긴 뭐가. 거짓말도 적당히 해야지. 너 같은 애가 무슨 이도현이랑….”

“…이문?”

“뭐야, 누구….”

뒤를 돌아본 이문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도현은 잠시 그 얼굴을 응시하다가,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내렸다. 은혜가 흰 볼이 발개지도록 심통 난 얼굴로 씩씩대다가, 도현을 발견하곤 오도도 달려와 안겼다.

폭삭! 도현은 자연스럽게 품에 파고든 은혜를 안아주었다. 스킨십에 익숙한 편은 아니지만, 은혜가 워낙 붙어 있는 걸 좋아하다 보니 은혜에 한해선 적응한 도현이었다.

은혜의 어깨를 도닥이고 있자니 이문이 당혹을 수습하지 못한 낯으로 말했다.

“네가 여기 왜…?”

“견학하러 왔는데.”

“견학?”

‘네가 왜 견학 따위를 하냐’는 얼굴이었다. 그가 어이없어할 만했다. 도현이 방송국을 견학하는 건 집주인이 자기 집을 소개받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으니까.

도현은 말 대신 은혜를 눈짓했다.

그러자 이문이 입을 다물었다.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저 아저씨가 나 경찰에 신고할 거라고 했어!”

“경찰에…?”

“은혜가 여기 숨어들어 와서 무시무시한 사람들이 잡아갈 거래! 콩밥 먹을 거라고도 했어!”

도현의 시선을 받은 이문이 주춤했다.

“아니, 난… 멋대로 들어온 일반인인 줄 알고. 여긴 일반인 금지 구역이라.”

멋대로 들어온 것도 맞고, 일반인인 것도 맞다. 도현은 차마 뭐라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 모호한 눈빛을 했다. 이문은 그 눈빛을 제 나름대로 해석했다.

“정말 너랑 관계 있는지 몰랐어. 아니, 시발. 알면 안 그랬겠지. 그냥 저 꼬맹이가 거짓말하는 줄 알았지.”

그때, 도현의 품에 머리를 박고 있던 은혜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베-’ 하며 혀를 내미는 모습에 이문이 눈초리를 세웠다.

“저 애새끼가….”

“말 좀 예쁘게 하지?”

어떻게 된 건지는 알겠는데, 아까부터 말본새가 마음에 안 들었다.

지금 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은혜가 듣고 있는데, 그런 말투라니. 아까도 은혜한테 ‘너 같은 애’ 운운하지 않았나.

날카로운 눈빛에 이문이 도로 입을 다물었다.

“일단 무슨 오해가 있었는지는 알겠어. 그런데 우리는 성진수 감독님한테 가고 싶은 곳은 다 가도 된다고 허락받았거든.”

“아, 네가 아는 애인지 몰랐다니까?”

이문은 조금 억울해 보였다. 도현은 그를 무시한 채 은혜를 쳐다보았다. 은혜가 꼼질꼼질 고개를 들었다.

“그거 말고, 저 사람이 나쁜 말 한 건 없었어?”

“오빠랑 친하다니까, 망상은 병이래.”

“…….”

도현은 말문이 막혀 차마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일반인으로 오해…는 아니지만, 아무튼 생각한 건 알겠다. 금지 구역에 와서 기분이 상한 것도 알겠고. 하지만 척 봐도 어린 애한테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나?

도현의 얼굴이 점점 싸늘해지자, 위기감을 느낀 이문이 황급히 변명했다.

“씨…가 아니라, 머리가 아프면 병원에 가란 소리였지. 정신병자라고 욕한 건 아니었거든? 하, 내가 왜 해명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정신 병원을 추천해 줬다는 소리 아닌가. 그 당시 상황을 모르는 도현은 이문이 정말 망상이 있어 보이는 아이를 위해 친절하게 병원을 추천해준 건지, 아니면 인신공격을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이 상황이 무척이나 황당했다.

“문아! 이문!”

“아… 귀찮게.”

그를 찾는 목소리에 이문이 짜증스레 말을 뱉었다. 그는 잠깐 도현을 보는가 싶더니, 툭 하니 말을 던졌다.

“네 동생인지 뭔지는 잘 챙겨 가라. 또 방생했다가 괜한 사람 잡지 말고. 나는 간다.”

이문은 도현이 잡기도 전에 뒤돌아서 가버렸다. 도현은 그 자리에 멀거니 서 있었다.

그러다, 느릿하게 고개를 내렸다.

움칠.

은혜가 도현의 시선을 받고 움츠러들었다. 아까 이문이 있을 때 기세등등했던 태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우리 할 얘기 있지, 은혜야?”

은혜의 동공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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