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8화. Winter Break (12)
“왜 그랬어?”
“…구, 궁금해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게 ‘나 거짓말하고 있어요’라는 티가 확 났다. 도현은 이걸 속아 넘어가 줘야 하는지, 짚고 혼을 내야 하는 건지 잠깐 고민했다.
“그, 근데 나 어떻게 찾았어?!”
누가 봐도 화제를 돌리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저걸 봐줘, 말아? 갈등하던 도현은 결국 실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어딨는지 어떻게 몰라.”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지만, 도현은 스위스에서 한 마을 단위로 영혼을 읽어 니콜라스를 찾아낸 전적이 있었다. 그러니 방송국 건물 안에서 찾아내지 못하는 게 더 이상했다.
설령 방송국을 벗어났다 하더라도, 서울 시내 안에만 있다면 어떻게든 찾아냈을 것이다. 왠지 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후유증은 좀… 크고 오래갔겠지만.
섬세한 눈매가 느리게 깜빡였다.
확실히 비정상적인 능력이다.
도현은 영혼이 하나가 된 이후로 그 능력의 가능성이 무한히 뻗어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젠 어디까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조차 가늠키 어려웠다. 마치 아득한 우주를 바라보는 기분이다.
그 거대한 우주가 내미는 손짓은 가끔은 도현도 혹할 만큼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도현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전쟁의 시대도 아니고 마법이 필요한 세상도 아니다. 사람들은 원하는 바를 스스로 이뤄낼 힘과 가능성을 가졌으며, 도현이 상식을 벗어난 능력을 발휘해야 할 일은 없다. 무엇보다, 그가 추구해야 하는 건 개인의 행복이며, 그 행복은 너머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서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차차, 머릿속이 정리되자 다시금 정신이 명료해졌다. 도현은 자신이 집중해야 하는 게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힘이 아닌, 은혜라는 사실을 깨우쳤다.
그래, 저 사고뭉치가 먼저지.
“잘 들어, 은혜야.”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은혜의 긴장한 찹쌀떡 같은 얼굴을 바로 응시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어딜 가든, 어디에 있든, 난 알 수 있어. 그러니까 함부로 단독 행동하지 말고, 가출할 생각도 말고, 위험한 곳엔 가지 말고, 누가 맛있는 거 준다 해도 따라가지 말아야 해. 아니면 내가 찾아내서 혼낼 거야.”
도현은 진심이었다.
오늘이야, 방송국 내에서 사라졌다지만 타지에서 같은 일이 일어나면? 니콜라스 때처럼 금방 찾아내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게다가 은혜는 모험심이 강한 편이라서 이런 때 확실히 말해두어야 했다.
“알겠어?”
“응…!”
풀이 죽은… 아니, 왜인지 아까보다 더 기분이 좋아 보이는 은혜가 눈치를 보다가 팔에 달라붙었다. 도현은 의아하면서도 은혜가 기분 상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한쪽 손을 내어주었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녹음실로 돌아갔다. 음료수를 깜빡하는 바람에 승준이의 원망을 사긴 했으나, 이후에 간식거리를 입에 물려줌으로써 수습했다.
은혜는 한번 사고를 치고 나니 얌전해져서 친구들이랑 다투지도 않고 잘 따라다녔다. 덕분에 남은 시간은 별다른 문제 없이 지나갔다.
견학을 마치고 팸플릿과 기념품까지 알차게 챙긴 후 방송국 건물을 나오자, 오늘의 과제가 끝났단 생각에 어깨에서 힘이 풀렸다. 초등학생 셋을 데리고 다니면서 저도 모르게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도현은 약간 뻐근한 고개를 돌리며, 친구랑 쉴 새 없이 재잘대는 은혜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놀고도 여전히 기운이 남아도는 게 신기했다. 은혜는 사실 운동선수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픽 웃은 도현이 세 아이에게서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환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이 시간이면 집에 도착해도 다섯 시경일 테다.
지나가는 사람이 알아보기 전에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그전이 동생들의 방학 과제를 도와주는 시간이었다면, 지금부터는 도현의 과제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 * *
달칵. 집에 돌아온 도현은 피곤한 눈을 끔뻑이며 방문을 닫았다. 부모님이 회사에 계시는 시간이라 집에는 그밖에 없지만, 그래도 마음의 안정을 위해선 단절된 공간이 필요했다.
검은 시선이 닿은 곳은 바이올린 가방이 놓인 책상이었다. 도현은 천천히 걸어가 가방 표면을 두어 번 쓰다듬은 후, 안에서 쉬고 있던 바이올린을 꺼냈다. 나무의 결이 손바닥에 알맞게 감겼다.
털썩, 침대에 앉은 도현이 뒤로 넘어갔다. 여전히 한 손에는 바이올린을 쥔 채였다. 바이올린을 배 위에 올려두고는, 형광등이 켜지지 않은 방 천장을 바라보며 두 눈을 깜빡였다.
왈트 혹은 밀턴.
아니, 거기까지 가기 전에 짚어야 하는 게 있었다. 근본적인 문제부터 답을 내리는 게 우선일 테니까.
…하지만, 애초에 그게 답이 있긴 한 건가.
음반.
음반을 내 볼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루카처럼 제 재능을 뽐내고 싶어서도, 우진처럼 영원히 남을 기록을 남기고 싶어서도, 남영국 피디처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자 해서도 아니다.
그저, 도현은 전해야 할 음악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그러나 언젠가는 세상에 전할, 형의 음악.
‘아직은 아니지만.’
정희운이나 그의 부모 같은 문제 때문은 아니었다. 도현은 그의 마지막 순간, 삶의 모든 기록을 담아내어 황홀하게 불타올랐던 그 연주를 따라 해낼 자신이 없었다.
순수한 실력 부족도 부족이고….
‘아직 난 형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했어.’
알되,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음악을 쌓아온 예술가였다. 고작 기억을 건네받았단 이유 하나만으로 그 모든 걸 이해한다는 건, 너무 오만한 일이 아닌가.
물론, 음악적 영혼이 높은 경지에 도달한 다른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연주를 부탁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도현이 기억대로 악보만 그린다면, 누구든 연주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도현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일종의 유언이자 동시에 유산이었다. 도현이 집행해야 하는, 그의 영혼을 받은 도현만이 그럴 자격과 의무가 있는, 이젠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혹은 존재하는 사람의 미련.
병원을 나온 순간부터 마음 한구석에 고이 품어온 목표였다. 한평생 걸리더라도 해내야 할 과업이었다. 죽음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기로 한 이상, 도현은 결국 그 일을 해내고 말리라. 지금껏 해온 모든 것이 그러했듯이.
음반에 대한 도현의 인식은 그토록 비장했다. 그래서 형의 음악을 전하는 게 아닌, H로서의 음반이라는 건 너무도 이상하고… 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정답, 오답, 그렇게 비유하긴 했지만….
사실 그보다는 ‘그래도 되는 건가’의 문제에 가까웠다.
정말 그래도 되나? 형의 영혼을 이어받은 책무로서의 음반이 아니라, 다른 의미의 음반을 만들어도 되는 걸까? 그러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 외에도 어려운 문제는 많았다.
만약 한다면, 그러면 누구의 연주를 해야 하지?
에 실린 달빛은 굳이 구분하자면, 형보다는 도현의 음악이었다. 도현의 자아와 스타일이 압도적인 지분을 차지하는 연주였으니.
그렇다면 이번에 음반을 만들 때 누구의 음악으로 해야 할 것인가. 과거의 도현의? 아니면 과거의 희성의? 아니면 현재의, 구분할 수 없는 상태의?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저 셋 중의 무엇이 되느냐에 따라 음반의 의미도, 담기는 음악도 전부 달라질 테니까.
그때, 흰 낯 위로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도현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입을 벌렸다.
“…그렇네.”
상생, 환원, 기록.
그것들은 누군가에게는 그 자체로 의미겠지. 하지만 도현에게는 계기가 되어줄 수는 있어도 의미가 되어줄 수는 없다. 그건 도현이 찾아야 하는 거니까.
근본적인 문제부터 답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면서, 정작 이상한 문제에 집착하고 있었다. 정답 오답을 따지기 전에, 내가 이 음반에, 음악에 무엇을 담을 것인지부터가 우선이었는데.
허, 도현이 허탈한 숨을 뱉었다.
‘혹시 나 바보인가?’
답을 어떻게 찾겠는가. 문제조차 제시되지 않았는데. 세상에 번호만 매겨진 문제의 답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건 사람이 아니라 덩어리 님일 것이다.
‘바보 맞네.’
도현은 씁쓸히 사실을 인정했다.
주변에 음악가가 있다면 조언을 받아 금방 답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홀로 생각하다 보니 뱅뱅 돌았다.
“…이제라도 찾아서 다행인가.”
도현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쓰며 바이올린을 만지작거렸다. 바이올린과 배가 맞닿은 곳부터 미약한 온기가 퍼졌다. 그 온기를 느끼다가,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무엇을 담고 싶은가.
답은 몰라도, 답을 찾아내는 법은 알았다. 본디 모든 앎은 그 속에 발을 디디는 것부터 시작한다. 숲을 알고 싶다면 숲에 들어가 흙을 밟고, 풀 내음을 맡고, 그 안을 헤매야 한다. 밖에서 멀뚱히 구경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도, 해결할 수 없다.
그러니.
“연주해야지.”
방은 불이 꺼져 어스름한데, 새카만 눈동자는 불빛이라도 받은 것처럼 거세게 타올랐다. 거의 집착적인 열기가 어린 두 눈은 약간 정상의 궤도를 벗어나 있었다.
모르면 알 때까지.
연주, 오직 그것만이 답이었다.
* * *
가볍게 연습곡 몇 개를 연달아 연주한 도현은 머릿속에 펼쳐진 리스트를 훑어보듯 읽었다. 그리고 선택한 건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비엔나 기상곡이었다.
크라이슬러는 형이 연주회를 열 때, 앙코르곡으로 자주 등장했던 작곡가였다.
형은 대체로 엄격한 곡보다는 자유분방한, 조금은 가벼운 곡들을 좋아했는데 크라이슬러의 소품들이 그랬다.
그 매혹적인 선율 아래에는 때로는 집시스러운 분방함이, 때로는 비엔나 특유의 귀족적인 우아함이, 때로는 동양적인 서정이, 때로는 사랑스러운 투명함이 자리했다.
형이 가진 특유의 독특한 감각은 크라이슬러의 소품곡과 만나 그만의 인간적이고도 매력적인 연주로 승화했다. 형도, 그리고 청중들도 그가 연주하는 크라이슬러를 사랑했다.
도현의 손에서 비엔나 기상곡이 펼쳐졌다. 음악의 도시, 빈 특유의 정서가 손끝에서부터 피어났다.
비엔나 기상곡의 주요 선율은 고아하면서 활력 있는 빈의 정서였지만, 그게 전부였더라면 이토록 사랑받진 못했으리라. 그 속에 교묘하게 들어간 집시풍의 몽환적인 느낌은 곡에 특별함을 부여했다.
누군가 들었더라면 소년의 손끝에서 탄생한 음악을 믿지 못해 몇 번이고 귀를 의심했을 연주를 마치고선, 도현은 만족하지 못했다는 듯 곧바로 다른 곡으로 넘어갔다.
드보르작, 네 개의 낭만적 소품, 작품 번호 75, 1악장.
형이 춤곡이나, 집시 특유의 느낌이 가미된 곡들을 좋아한다면, 도현은 조금 더 조용하고 부드러운 선율을 선호했다. 이번에는 한 편의 시 같은 선율이 흘러나와 공기를 적셨다.
도현은 그렇게, 부모님이 기다리다 못해 방문을 두드릴 때까지 끊임없이 연주했다. 아홉 시가 다 되어서야 저녁밥을 먹으러 나온 도현에 두 사람은 아들이 잠깐 연주에 빠졌다고 생각했지만, 훗날 되돌아 생각해 보건대,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