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79화 (480/582)

제479화. Winter Break (13)

눈을 뜨니 아슴푸레한 새벽이었다. 살갗에 닿는 보드라운 감촉에 무의식적으로 뺨을 비비다가, 문득 마지막 기억이 방이 아니라는 걸 생각해냈다.

“…….”

또 엄마 아빠가 옮겨줬구나.

요즘 자주 있는 일이었다.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하다 보니, 거기서 그대로 곯아떨어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연습실이라 해서 휑하니 마루만 있는 게 아니라 소파와 담요, 쿠션 등. 있을 게 다 있어서 침대만큼은 아니더라도 잠들기 편한 환경이었다.

그래도 매번 거기서 잠들면 곤란한데.

다음부터는 주의해야겠다 생각하며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켰다. 도현의 몸을 옮기면서 같이 챙겨주었는지, 침대 옆 탁자에는 핸드폰과 헤드폰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도현은 그걸 가져와 익숙하게 헤드폰을 꼈다. 푹신한 쿠션감이 양쪽 귀에서 느껴졌다. 그대로 나른하게 눈꺼풀을 깜빡이다가, 핸드폰을 켜 ‘Jung Hee-sung’으로 분류된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했다.

음악이란 역사와 같다.

한 사람의, 집단의, 사회의, 종교의, 시대의, 세계의 역사.

문자로, 악보로, 오디오로, 온갖 방법으로 기록되는 과거의, 그리고 현재로 이어지며 미래로 뻗어나갈 역사. 그리고 도현은 희성의 역사를 듣고 있었다.

그의 바흐는 무척이나 독특하다.

바흐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하느님을 향한 신앙심이며 찬미였다.

‘음악은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인간에게는 기쁜 마음을 갖게 한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마음을 신성하게 하는 힘을 부여하는 것은 모든 음악의 목적이다.’ 이것이 바흐가 자신의 음악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희성은?

태어나서부터 버려지고, 여러 번 파양을 거쳐 입양된 후에는 배신당하고.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홀로 고독했던 그 사람은, 저 먼 곳에 있을 추상적인 대상에게 신앙심이 있었을까?

어느 날부터 그가 기도하기를 그만두었는지 도현은 알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종교를 혐오할 거 같지만… 그런 그는, 의외롭게도 바흐를 싫어하지 않았다. 바흐의 곡을 연주하는 것도 말이다.

아마 그건 바흐의 곡은 신앙으로 시작했지만, 동시에 신앙을 초월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엔 인간으로 태어나, 가질 수밖에 없는 거대한 것을 향한 열망, 허무, 절망, 기쁨… 그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래서 형의 바흐를 듣고 있다 보면 뭐랄까, 속내가 까발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표면적인 감정부터 원초적인 감정까지, 인간이 지닌 모든 감정이 그의 현 아래서 해부되는 것 같았다.

동시에 위로받는 거 같다.

멋대로 들춰내어 전시했으면서 그는 그것을 비웃지 않는다. 선을 넘어 다가오지도 않는다. 그저 거기에서, 무심하고도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바흐가 인간을 이해하되 간섭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또한 그렇게 연주했다. 그리하여 누구보다 인간적이며, 누구보다 비인간적인 면모가 연주에 공존했다.

도현은 음악을 멈추지 않은 채 침대에서 나와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어둑한 방 안, 어질러진 악보들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그중 재생되고 있는 음악과 같은 악보를 들어 올리며, 가늠했다. 그의 연주와 나의 연주가 얼마나 멀리 있는가, 하는 가늠을.

머릿속으로 나의 연주를 그렸다.

“…….”

딱히 기대한 건 아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아득한 거 아닌가.’

아주 멀리서, 희끄무레한 빛처럼 얼핏 보일 뿐이다. 그 반짝임도 찰나여서 환상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헷갈렸다.

음반이라는 중단기적이고, 구체적인 목표를 잡은 후 도현은 제 음악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간은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의 마지막 음악을 전하려면 언젠가 그를 따라잡아야 하겠지만, 그건 애초에 쉬이 이뤄지리라 생각한 적 없는 일이다. 도현은 아주 먼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매일 짧으면 두 시간, 길면 네 시간을 투자해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장거리 마라토너가 속도를 조절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러나 음반은 아니다.

그건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이었다. 도현은 당장 조금이라도 바이올린 실력을 끌어올려야 했고, 조금이라도 더 형에게 가깝게 다가가야 했다. 그렇게 압박이 생기고 나니, 형이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 새삼 뼈저리게 실감했고, 실감하는 중이었다.

도현이 미간을 좁혔다.

내가 뭘 고민했더라.

과거의 나, 과거의 형, 그리고 현재?

도현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웃기지도 않네, 진짜….”

너무 우스워서 헛웃음도 나지 않는다. 고작 이 주 전의 일이건만, 그때의 나는 얼마나 무지하고 멍청했던가…. 귓불과 뒷목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자신감도 정도가 있어야지.

나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형의 음악을, 과거의 정희성을 담아내겠다고 생각했지? 도현은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의심했다. 제정신인가?

이 주 전의 내가 눈앞에 있다면 정신 차리라고 멱살이라도 잡아주고 싶었다.

무엇을 담을지 고민하는 건 좋다.

그러나 일단 담을 수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 아니겠는가. 현실을 보기도 전에 이상만 올려다봤다간 목이 꺾여 나가는 거다. 도현은 아주 현실적으로, 합리적이고도 이성적으로, 자신이 형의 음악을 담아낼 만큼의 능력이 없음을 인정했다.

당연히도, 후보 하나 탈락이다.

도현은 지끈, 울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하나….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인데,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차마 다행이라고 말해주고 싶진 않았다. 도현은 자기 자신을 꽤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헤드폰을 벗었다.

그저 음악 소리가 사라진 것뿐인데, 순식간에 색채로 가득 찼던 환상 세계에서 현실로 뚝 떨어진 기분이다. 도현은 그 괴리감에 적응하려 애쓰며 오늘 연주해볼 악보를 챙겼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은 여전히 생각으로 가득했다.

과거의 형을 담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살면서 불가능을 입에 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 생각할 필요도 없이 불가능했다.

조금 입맛이 씁쓸했다.

내심 그의 음악을 담아내며, 그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하고 싶었던 마음이 존재했으니까…. 사실, 맨 처음 ‘음반’이라는 걸 떠올렸을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게 그거였다.

이제는 들을 수 없을 이의 연주를, 도현이 재현하는 것. 그가 사라졌되,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세상에 증명하는 것.

약간은 어리광도 섞여 있었겠지.

내가 아직 이만큼 형을 그리워하고 귀히 여기며 경애하고 있으니 알아달라고. 아니면, 그저 그를 그렇게라도 옆에 두고 싶었던 걸 수도 있다.

이제 와선 아무 의미 없는 생각이지만….

슬쩍, 후회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조금 더 연습을 부지런히 할 걸 그랬나.’

반사적으로 든 생각에 도현은 고개를 털어냈다. 아니다. 그런다 한들 마찬가지였을 거다. 형과 도현의 사이에 존재하는 건 단순히 기술적 차이뿐만 아니라, 음악적 영혼의, 감각의, 본질의 차이니.

그건 단순히 영혼을 물려받은 것만으론 좁힐 수 없는 차이였다. 도현과 합쳐진 순간부터, 어떤 식으로든 형의 영혼은 본래의 형태와 달라졌으니까.

어찌 되었든, 처음 생각해냈던 이유는 실현 불가능하게 되었다. 바란다 한들 이뤄질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니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고, 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했다.

미련을 접은 도현이 연습실에 가져갈 악보를 한쪽에 곱게 쌓아둔 뒤, 욕실로 향했다. 창백한 전등이 달린 천장 아래, 커다란 거울이 상대를 담아냈다.

도현은 거울 속 희멀건 소년을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그를 감싼 새벽 공기는 어딘가 소년을 파르라니, 서늘하게 보이도록 했다. 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도현은 굳이 미소를 만들지 않았다.

그저, 낯선 것을 보듯 거울 속의 자신을 응시했다.

과거의 나, 혹은 현재의 나.

무엇을 기록해야 할까.

쏴아- 세면대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시원하게 손을 적셨다. 도현은 했던 생각을 머릿속 한쪽에 고이 보관해두며, 시원한 물을 얼굴에 부었다.

* * *

“이거 확인하셨어요?”

2팀 직원이 흰 종이를 팔랑이며 묻는 말에 경찬호가 잠깐 미간을 좁히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정희주 작가님 대본이죠? 네, 봤습니다. 괜찮더군요.”

“그렇죠? 저도 재밌더라고요. 내부에서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던데.”

최종 결정자는 도현이었으나, 도현이 보는 대본들은 모두 새솔 직원의 손을 거쳤다. 누가 봐도 찔러보기 식의 작품은 쳐내고, 괜찮은 작품이 있으면 별표를 달아놓고. 때로는 배우에게 권유하는 것도 모두 그들의 일이었다.

“이제 당사자 마음에만 들면 되는 건데. 어때요, 팀장님이 보시기엔 도현이가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아요?”

“음….”

경찬호는 생각했다.

정희주 작가의 신작은 상당히 재밌는 내용이었다. 요즘 트렌드를 섞은 건지, 판타지가 가미된 로맨스 코미디 드라마였다. 도현에게 온 배역도 흥미로운 역할이었고.

그런데, 걸리는 게….

‘요즘 정신이 다른 데에 가 있는 거 같던데.’

믿기지 않지만 정말 그랬다.

도현을 그리 오래 봐온 건 아니지만, 도현이 일할 때 누구보다 진심이라는 건 알았다. 그와 한 번이라도 일해 본 사람은 모두 알 만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런 도현이, 요즘 이상했다.

화보 촬영장에서 멍을 때리는 건, 그래. 그럴 수 있다. 도현도 사람이니 피곤할 수도 있는 거고….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스태프들 도와준다고 빨빨대며 돌아다녔던 게 더 비범한 행동이었고, 이쪽이 평범한 축이다.

차로 이동 중에 침묵하는 것도…. 그래, 이것도. 조금 숨 막히긴 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말을 하기 싫은 날도 있는 법이니까. 딱히 화가 나서 그러는 거 같지도 않았다. 그냥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었을 뿐.

그러나.

‘대본을 읽다가 다른 생각에 빠지질 않나….’

이건 좀 이상했다.

연기를 향한 도현의 열정은, 때로는 집착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집요했다. 그 엄숙하기까지 한 진심에 가끔은 종교를 대하는 것 같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저번 주 월요일. 평소처럼 새솔 엔터테인먼트에 출근해서 밀린 대본을 읽어보던 도현은 읽다 말고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경찬호는 처음에 그 대본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에 그 대본이 마음에 드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 …아, 뭐라고 하셨죠?

- 그 대본 괜찮냐고 물었어.

- 이 대본이요? 이 대본이….

도현은 어딘가 넋 나간 얼굴로 대본을 앞으로 돌렸다. 그러니까 마치, 제목을 확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팀장님?”

“…아, 네. 그 부분은 저도 잘 모르겠네요. 도현이는 자기만의 기준이 있는 편이라. 어차피 오늘 오는 날이니 이따 물어볼게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직원은 어딘가 신난 얼굴로 말했다. 일거리가 잡혀서 신난 건 아니었다. 그보단, 새솔의 대부분이 잼잼이는 아니더라도 잼ㅈ까지는 되기 때문이었다.

“네, 잘 말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수다를 조금 더 떨던 직원을 보낸 후 경찬호는 핸드폰을 들었다. 오늘은 언제쯤 오는지 물을 겸, 괜찮은 대본이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띠링, 기본적인 벨 소리가 울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네, 전화 받았습니다.

“도현아, 형인데.”

- 네. 말씀하세요.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목소리로만 대화할 때 도현은 조금 더 낯선 느낌이 들었다. 그 특유의 침착하고, 고저 없이 부드러운 억양이 도드라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서늘하지만 맑은 물. 혹은 해가 뜨기 전 새벽 공기. 도현의 목소리는 그런 느낌이었다. 팬들이 도현의 목소리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오늘 언제 올 예정이야?”

- 오늘?

의아한 목소리도 잠깐.

- 아… 월요일인가 보네요.

무언가 깨달은 듯, 모호한 음성이 울렸다.

설마 월요일인 것도 몰랐나, 싶다가도 금방 생각을 지웠다. 이 완벽주의자가 요일도 모를 리는 없었다. 적어도 경찬호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 음, 지금은 조금 애매하니까… 점심 먹고 갈까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해.”

- 그럴게요. 용건은 이게 전부인가요?

“더 있긴 한데, 네가 와서 확인해야 해.”

- 뭔데요?

“괜찮은 대본이 있거든.”

경찬호는 말하면서 내심 기대했다. 도현이 요즘 이상하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결국 도현 아닌가. 그가 아는 도현이라면 아닌 척 신이 나 이것저것 물을 게 틀림없었다.

- 아….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