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80화 (481/582)

제480화. Winter Break (14)

팔랑, 손짓에 따라 종이가 한 장, 두 장 넘어갔다. 저번 주처럼 한 페이지에 못 박혀 멍하니 있는 일은 없건만, 경찬호는 미묘한 찝찌름함을 느꼈다.

“…그래서, 어때?”

“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도현의 고개가 움직인다. 스르르, 소리 없이 움직이는 시선과 가지런히 드러나는 단정한 낯에 경찬호는 오랜만에 감탄했다. 도현의 외양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이따금 순수한 경탄이 새어 나올 때가 있었다.

도현은 생각에 잠긴 듯, 팔걸이에 올린 손을 까딱였다. 할 말을 고르는 것 같기도 했다.

“재밌어 보이는데….”

서두는 나름 긍정적이었다만, 도현의 표정이 미묘했다. 경찬호는 그를 재촉하는 대신 테이블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가 쌉싸름하게 입 안에서 퍼졌다.

“제 전작을 의식한 거 같네요.”

“…아아.”

경찬호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에게 온 배역은 <구미호뎐>의 여우야와 종족과 배경은 달랐지만, 성격이 비슷했다.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어도 묘하게 연상되는 느낌이었다.

‘작가가 의도한 건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을 마친 경찬호가 말했다.

“나도 그 부분을 느끼긴 했어. 뭐, 워낙 그 드라마가 잘됐잖아. 그리고 사실, 대중에게 인식된 이미지로 밀고 나가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니….”

“전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럴 거 같았다.

저렇게 말하긴 했어도 그 또한 도현의 생각에 동의했다. 아직 이미지를 한정하기엔 도현은 너무 어렸다. 그 수많은 가능성을 벌써 재단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말을 꺼내본 건, 한 번 정도는 비슷한 역할을 맡는다고 해도 별 타격이 없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도현은 배역을 받으면 맞춤옷처럼 저에게 딱 맞춰서 오는 배우였다. 고작 두 번으로 이미지가 고정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그때, 그를 흘끔 바라본 도현이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촬영 시작 일정도 너무 늦고요.”

“…어,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다.

촬영 일자는 상반기에서 하반기로 걸쳐 있었다. 도현의 패스파인더 촬영 일정을 생각하면 조금 아슬아슬한 시점이었다. 아직 패스파인더 촬영 일정이 픽스되지 않았다는 부분까지 고려하면 더욱이.

그러니 논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럴듯한 말인데….

경찬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근데 왜 변명하는 거 같지?

그의 눈초리가 길어지자, 도현의 말이 잠깐 끊어졌다. 도현은, 그의 착각이 아니라면 조금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흐려진 눈매가 허공을 부유하다가 뚝 아래로 떨어진다.

후우, 짧게 숨을 내쉰 도현이 대본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는 찌푸린 눈으로 그걸 응시하다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 한 번으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담담하고 태연한, 약간은 서늘한 맑음이 어린.

경찬호는 본능적으로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나오리란 걸 직감했다.

“…솔직히 말할게요.”

담담한 눈길이 이쪽을 향한다. 도현은 침착해진 거 같은데, 이번엔 그가 불안해졌다. 뭐지, 막상 저렇게 나오니까 불길한데.

경찬호는 저런 도현을 본 적이 있었다. 난데없이 대표님을 만나야겠다고 하던 도현이, 대표실에서 재계약을 두고 협상, 혹은 협박하던 도현이 꼭 저랬었다. …설마.

“지금 작품보다 우선해야 할 게 있어요.”

“…작품보다?”

“네, 개인적인 일이라서 자세히 말씀드릴 순 없지만….”

“아니, 잠깐.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작품보다 중요하다고 한 거 맞아? 그러니까… 연기보다 더 중요하다고?”

조금 떨떠름한 시선이 경찬호의 얼굴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네.”

“진짜라고?”

질문보다는 믿기지 않아 중얼거린 것에 가까웠다. 도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찬호는 도현이 진심이란 걸 확인하고, 약간은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작품을 시작하면 저도 모르게 그쪽에 신경을 쏟을 거 같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요.”

도현은 보이는 것과 다른 부분이 많았다.

호리호리, 얄쌍해 보여도 발레와 달리기, 양궁으로 다져진 몸은 군살 하나 없이 단단하다거나. 예민한 도련님 같은 얼굴과 다르게, 물론 예민하긴 하지만, 그래도 굉장히 독립심이 강하고 불도저 같은 면모가 있다거나.

평소에 잘 웃고 친절하게 구는 걸 보면 사람이 엄청 강할 것 같진 않은데, 실제로 겪어보면 심지가 굳었다. 나이를 떠나서 강한 사람이었다, 도현은.

그런 도현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퍽 약한 발언에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 반응에 도현은 별말 없이 본론부터 꺼냈다.

“그래서 부탁드릴 게 있는데, 이미 잡힌 일정 말고 새로운 일정은 잡지 말아주세요. 아, 물론 협상을 잊은 건 아니에요. 계속 안 하겠다는 건 아니고… 그래요. 겨울 방학이 끝날 때까지 가벼운 휴가라 생각해 주시면 좋겠네요.”

“무슨 일이길래… 아니. 개인 사정이라고 했지.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활동이랑 함께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일정이 힘들다면 여유롭게 잡을 수도 있는데….”

“아. 그걸 뭐라 해야 할지.”

도현이 말을 고르는 사이 초조해진 경찬호가 말했다.

“작품은 그럼 아예 안 하겠다는 거야? 활동도?”

“한동안만요.”

“…그 한동안이 겨울 방학 동안인 거는 확실하지?”

그 이상은 곤란하다.

도현은 한참 화제를 몰고 다녔다.

어디에 나타나든, 무엇을 하든 시선과 관심이 쏠리는 상황이었다.

작품은 연 단위의 휴식기를 갖는 배우들도 있으니 그렇다고 치자. 어차피 올해에는 패스파인더 촬영도 예약되어 있었다. 드라마 몇 개 안 찍는다고 해서 도현의 주가가 낮아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외의 활동까지 하지 않겠다니. 이 황금 같은 시기를 그냥 떠나보내겠단 소리가 아닌가. 일단 정한결 대표부터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협박한다거나 압박을 준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냥 집에 찾아가서 애걸하겠지. 필요하다면 무릎도 꿇을 양반이었다.

“확답이 필요한 문제인가요?”

“아무래도 그렇지.”

도현의 얼굴에 난처함이 떠올랐다. 도현이 살짝 찡그린 눈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생각이 많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일단, 그 안에 돌아오긴 할 거예요.”

경찬호는 잠깐 도현의 말을 따라가지 못했다.

돌아온다니? 어디서?

그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읽은 것인지, 도현이 짧게 탄식했다. 그리고 부연했다.

“샌디에이고에 있는 집으로 갈까 하고 있거든요.”

“예? …뭐?”

저도 모르게 존댓말을 뱉은 경찬호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소년을 쳐다보았다. 덤덤하게 말하던 도현의 얼굴 위로 설핏, 머쓱한 미소가 스쳤다.

“정해진 건 아니에요. 방금 생각한 계획이라.”

“무슨….”

이게 뭔 날벼락이란 말인가.

도현의 실행력이 남다르단 건 알고 있었다. 다짜고짜 대표실로 직행해서 계약 기간도 안 끝난 배우를 데리고 오자 할 때부터, 모를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그 실행력이 이런 식으로 튈 줄이야…. 경찬호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매니저가 배우 앞에서 넋 놓은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는 직업 정신의 발로였다.

“잠깐, 정리해 보자. 그러니까 네 말은… 네가 해야 하는 게 있는데, 그게 개인적인 사정이라 말은 못 하고, 그런데 중요한 거라서 겨울 방학 동안 활동을 일체 멈추고 샌디에이고로 가 있겠단 거… 맞아?”

“네. 정확해요.”

도현은 빠르게 정리한 그를 조금 놀란 눈으로 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잼잼이들이 봤으면 귀엽다고 했을 모습이지만, 경찬호에게는 작은 악마 같았다.

“이렇게 갑자기?”

“갑자기 결정하게 됐네요.”

그렇게 태연하게 남의 일처럼 말하지 말란 말이지…. 한숨을 삼킨 경찬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내가 이 애를 말릴 수 있나?

곧 그는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바랄 걸 바라야지.

“…언제, 언제 갈 건데?”

한층 기운 빠진 목소리에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몰라요. 원래 이번 겨울은 한국에 머무를 계획이어서, 말했듯이 샌디에이고에 가는 것도 방금 생각했거든요. 아직 부모님이 가능한지도 모르고….”

“두 분이 안 된다고 하시면 안 갈 거야?”

“네? 아니요?”

“그럼 어떡하게?”

“혼자 가야죠.”

“…혼자?”

도현이 매우 당연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보통 국제선은 만 12세 이상이면 혼자 탑승할 수 있고, 나라별로 조금 다르긴 한데, 만약 나이가 걸린다면 UM 서비스를 신청하면 되니까요.”

“그걸 말한 건 아닌데… 그래, 철저하구나….”

말끝을 흐린 그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데 그게 비행기 탄다고 다가 아니잖아. 혼자 지내야 하는 건데.”

‘그러기에 너는 너무 어리지 않냐’라는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도현은 그의 시선을 받고서도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건 문제없어요.”

“어떻게 장담해. 해본 것도 아닌데.”

“간접 경험도 경험이라면 해본 거겠죠?”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자연스럽게 흘려 넘겼다. 오늘의 도현은 유독 헛소리가 많아, 모든 말을 일일이 신경 쓰다간 그의 머리털부터 빠지게 생겼으니.

“내가 첫 자취를 시작한 게 대학생 때였는데, 그때도 쉽지 않았어. 혼자 산다는 게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거든. 너를 도와줄 사람 하나 없이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거야. 하물며 거긴 미국이잖아.”

그는 진심으로 충고했다. 이 어리고 무모한 소년이 치기 부리는 걸 막고 싶기도 했고, 또 이렇게 해서 도현이 마음을 돌리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경찬호의 경고를 들은 도현은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걱정 고마워요. 하지만 몇 가지 오류가 있어요. 전 그렇게 간단히 생각해서 결정한 게 아니고, 그리고 저는 절 혼자 책임질 필요가 없어요. 케일리의 도움을 받아도 되고, 정 안 된다면 친구 집에서 지내면 돼요.”

그 표정을 보고 나서야 그는 깨달았다. 방금 생각났다고 한 것과 다르게 도현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결론이 내려졌다는 것을.

“그 부분은 부모님 의견도 물어봐야 하니까요. 제가 잘 해결해 볼게요. 그래서, 제가 부탁드린 부분은 들어주실 수 있는 건가요?”

개인적인 부분은 딱 자르고, 경찬호가 어물쩍 피해 갈 수 없게 직접적으로 묻는다. 물론 돌멩이를 맞은 개구리는 잠시 반항했다.

“큼,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

순간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그러나 경찬호는 그걸 되짚어 볼 겨를이 없었다. 도현이 딱딱했던 공적인 태도를 집어 던지고, 갑자기 친한 척 굴었기 때문이었다.

“형, 저 휴가도 안 보내줄 거예요?”

…얘가, 왜 이러지. 이렇게,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친밀하게 구는 애는 아니었는데. 그는 조금 떨떠름히 답했다.

“어, 물론 난 보내주고 싶지. 그런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그의 말이 끝나자 도현의 표정이 흐려졌다. 마치, 애수에 찬 것처럼 흰 낯 위로 얄브스름한 우울이 드리웠다. 그것만으로도 소년은 무척이나 처연해 보였다.

“저, 작년에 조금 힘들었는데….”

경찬호의 입이 딱 다물렸다.

언제 들어도 그의 죄책감을 콕콕 자극하는 문제였다. 도현도 그걸 아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도 도현이 이 점을 안다는 걸 알았다. 저 가증스러운 불쌍한 낯짝이 그걸 증명했다. 하지만….

“…기다려봐. 대표님한테 보고드리고 올게….”

안다 해서, 모른 척할 수가 있나.

그는 오 년은 늙은 낯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따라 소파의 삐걱거림이 구슬프게 들렸다. 직장인의 비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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