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81화 (482/582)

제481화. Winter Break (15)

매니저 형이 올라가고 나서 삼십 분 만에 호출당했다. 설득하는 데 실패했나. 그런 생각을 하며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그런데… 피곤해 보이시네요.”

“전 괜찮습니다. 들어오시죠.”

그는 만성 피로를 달고 사는 직장인처럼 말했다. 아, 직장인이 맞구나.

도현이 들어가자 대표가 고개를 돌렸다.

“도현 씨, 어서 와요.”

“대표님.”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대표가 몸을 일으켰다. 서서 보고하던 경찬호가 도현을 보고 알은체했다.

도현은 어떻게 되었냐는 의미로 그를 쳐다보았는데, 그는 텔레파시를 받지 못했는지 도현의 어깨를 한 번 잡았다가 놓을 뿐이었다.

“자, 앉아요.”

책상에서 소파로 이동한 정한결이 자리를 권했다.

도현이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휴가를 가고 싶다고요?”

“네.”

“그러려면 이미 잡힌 일정들 취소해야 하는 것도 알고 있어요?”

협상 이후, 연기 외 활동까지 시작하면서 도현은 모든 활동을 일일이 확인하고 골랐다. 그러나 그것도 초반뿐이었다. 갈수록 일거리가 많아지자, 하나하나 확인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나중엔 대부분을 매니저에게 맡겼다. 적당한 스케줄을 고르는 것부터 일정 짜는 것까지. 도현이 하는 일은 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은 경찬호가 ‘이거 할래?’ 물으면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최근엔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어서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매니저 형에게 믿음이 있어서 그럴 수 있던 거지만. 아무튼, 도현은 일정 관리 부분에서 거의 손을 떼 버린 지 오래였다.

…내가 아는 것보다 스케줄이 많이 잡혀 있었나.

“한 달 뒤에 가고 싶다는 뜻은 아닐 거 아니에요. 출발을 언제로 생각했어요?”

“다음 주쯤….”

“후우.”

정한결이 한숨을 쉬었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움칠했다.

실수다. 정신을 빼놓고 산 탓에 머리가 굳은 모양이었다. 도현은 뒤늦게 자각한 현실적인 문제에 낯빛을 굳혔다. 미간을 좁힌 남자를 마주하고 있으니,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맞지, 그 어린애. 도현은 입 안의 살을 약하게 깨물었다. 그래서 어떡하지. 여기서 실언했다고 해야 하나. 그러면 이 상황은 해결되겠지. 하지만 음반은?

지난 이 주간 도현은 바이올린에 몰입했다. 촬영 이후 그만큼 바이올린에 집중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건 잠들어 있던 열망의 불씨를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아직 목적은 확실치 않은데 음반 자체를 향한 욕심은 짙어졌다. 그게 자신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이해됐다.

과거, 도현이 했던 ‘분리 작업’은 비단 정희운을 향한 감정뿐만이 아니었다. 바이올린을 향한 열정과 욕심, 집착 또한 형의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더욱 연기에만 매진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지 않나.

그 또한 도현의 것이다. 바이올린을 향한 애정과 열정, 집착 또한 감내하고 품어야 마땅하다.

‘어쩌면 음반을 떠올린 게 우연만은 아니었을지도 몰라.’

분리 작업으로 억눌려 있던 무의식이 깨어났을 수도.

도현의 머리는 타개책을 생각해내기 위해 바쁘게 굴러갔다. 그리고 그건, 본의 아니게 타인에게 침묵시위 정도로 비쳤다.

그건 뜻하지 않았지만, 꽤 효과적이었다.

‘작년 일을 거론했다고 했지….’

정한결은 머릿속의 계산기를 두드렸다. 그리고 작은 한숨을 삼켰다. 갑작스러운 휴가 요구가 당혹스럽긴 하지만… 이번 일로 작년의 실책이 탕감된다면 이쪽에선 나쁠 게 없었다.

“경 팀장.”

“네, 대표님.”

“일정 조정 가능한 거 있어요?”

“연락해봐야 알겠지만… 몇 개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럼 가능한 거 모두 일정 조정하고 안 되는 건 캔슬해 버려요. 아쉬우면 그쪽에서 일정을 바꾸든가 하겠죠. 그리고 도현 씨, 아니, 도현아.”

“네.”

“요구가 너무 갑작스러웠던 거 알지? 이런 일방적인 통보는 우리도 곤란해.”

도현이 입술을 살짝 말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죄송해요.”

순순한 사과에 정한결이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그래. 다음부터는 적어도 두세 달 전에는 고지하고… 이번은 네 말대로 하자.”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절한다 해도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긴 했는데…. 이렇게 쉽게 허락한다고? 작은 얼굴에 떠오른 의아함에 정한결이 말했다.

“네가 작년에 고생했던 거 아니까 들어주는 거야.”

“아.”

그 말만으로 도현은 그의 뜻을 이해했다. 소속사에서 잘못한 건 딱히 없지만, 아무튼 도현이 고초를 겪었던 건 사실이니.

“대신 이번 주에 바쁜 건 네가 감당해야 해.”

“당연히 그렇게 할게요.”

정한결은 잠시 도현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대치는 정한결이 평소와 같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허무하게 마무리되었다.

“…좋아. 얘기 끝! 온 김에 코코아 마시고 갈래?”

도현은 바짝 긴장했던 어깨의 힘을 풀며 덩달아 미소 지었다.

“한잔 부탁드려요.”

코코아 한 잔을 마시고 정한결과 시시콜콜한 잡담을 조금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도현을 데려다준 건 당연히도 경찬호였다.

차에서 내리며 도현은 결심했다.

충동이었다지만, 이미 얘기는 꺼내졌고, 결과적으로 소속사의 허락까지 받아 냈다. 이제는 뭐가 되든 한번 해봐야 했다.

그리고, 그러려면 보다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다.

* * *

한번 결심한 도현은 불도저처럼 직진했다.

“…미국에 가고 싶다고?”

퇴근하자마자 미국행에 관한 말을 들은 이장혁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심각한 눈으로 서혜나를 쳐다보기도 했다.

서혜나는 의외로 침착했다.

“도현아, 혹시 그거 때문이니? 바이올린?”

“…네.”

도현은 조금 허를 찔린 느낌으로 대답했다.

‘종종 꿰뚫어 보는 것 같단 말이지….’

함께 산 지 오래되어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너무 뻔하게 행동한 건가.

음, 후자일 수도 있겠다.

요즘 연습실에서 잠드는 게 일과였으니까.

그래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숨기는 건 불가능해.’

도현이 법적 미성년자인 이상, 음반을 내려면 부모님이 알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알면 안 될 것도 없었다. 애초에 두 사람은 H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도현의 눈이 두 사람을 훑었다.

상황을 보아 하니 거짓으로 이유를 댄다고 허락해줄 것 같지도 않고….

도현은 솔직히 말했다.

“음반을 만들려고 해요.”

“음반?”

생각지 못한 말에 반사적으로 되물은 이장혁이 잠시 후, 눈을 크게 떴다.

“바이올린 음반 말하는 거야?”

“네.”

두 사람은 놀람과 의외로움이 섞인 눈으로 도현을 응시했다.

도현은 그런 그들을 이해했다.

- 도현아, 혹시 바이올린을 가르쳐줄 분이 필요하진 않니?

- 아니요, 괜찮아요.

- 도현아, 혹시 학원에 가고 싶다면….

- 음, 괜찮아요.

- 도현아, 이번에 국내에서 콩쿠르가….

- 별로 흥미가 없어서요.

…갑작스러울 만하네.

이래도 싫다, 저래도 싫다고 하던 도현이었다. 갑자기 음반을 내겠다고 하니 무슨 바람이 분 건가 싶겠지. 그러나 사실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영혼을 거론했다간 미국이 아니라 상담사를 찾게 될 수도 있었다.

상담 선생님은 메리로 충분했다.

“소속사에서 허락은 받았어요. 일단 제 계획은 다음 주 중에 가는 건데….”

도현이 두 사람의 안색을 살폈다.

“갈 수 있을까요?”

“음… 그게.”

이장혁이 곤란한 낯으로 침음을 흘렸다. 그는 서혜나를 흘깃거리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도현아, 미안하지만 우리가 시간이 안 날 것 같은데….”

“…그런가요?”

“응, 미안하다. 그, 어떻게 다음번에라도….”

“그럼 저 혼자 가도 돼요?”

“뭐?”

두 사람의 부릅뜬 눈이 도현에게로 닿았다. 하지만 이 정도 반응은 예상했던 터라 도현은 침착하게 말했다.

“두 분 시간 안 되시면 저 혼자 다녀올게요.”

곧장 경악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장혁이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그건 안 돼. 아무리 그래도 해외를 혼자 보낼 수는 없어.”

“하지만….”

“안 돼. 그건 아니야. 네가 원하는 거 다 들어줄 수 있는데, 그건 안 돼. 어떤 부모가 열다섯밖에 안 된 애를 혼자 보내겠어?”

형네 부모님이 그랬는데.

형은 정확히 열다섯의 나이에 콩쿠르를 위해 혼자 해외에 나갔다. 아, 그쪽은 양부모라 그런가. 도현은 태연히 생각했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반대가 거세네.’

소속사처럼 쉽사리 허락해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말을 꺼내자마자 딱 잘라버릴 줄은 몰랐다. 도현은 난감함에 눈동자를 굴리다가 말했다.

“두 분은 시간이 안 되시고, 저는 가야 하고. 그럼 혼자 가는 게 맞는 거 아닌가요?”

“네가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건 알아. 그런데 도현아, 우리 입장에선 너를 혼자 미국에 보내는 게 전혀 합리적인 일이 아니야.”

“…혼자 지내는 게 걱정이라면, 케일리가 있잖아요. 그녀는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줄 거예요. 그리고 밖에 안 돌아다닐게요. 어차피 집 안에만 있을 생각이었어요.”

“안 된다고 했잖니.”

“왜 안 돼요?”

“말했잖아. 너를 혼자 보낼 수는 없다고.”

도현이 눈을 찌푸렸다.

“그건 비이성적이에요. 저는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고, 걱정할 만한 일을 만들지 않을 거예요. 심지어 저는 집에 혼자 있어도 되는 나이인걸요.”

이장혁은 진정하려는 듯이 깊이 심호흡했다. 그는 몇 번의 호흡 끝에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다시 생각해보자. 미국에 가려는 게 음반을 만들고 싶어서잖아. 그렇지? 그런데 도현아. 그거라면 한국에서 만들어도 돼. 한국에도 잘 찾아보면 괜찮은 스튜디오가 있을 거야. 아빠가 찾는 거 도와줄게.”

“한국은 안 돼요.”

“왜?”

“여긴 저한테 관심이 너무 많아요.”

도현은 제 이름으로 음반을 내려는 게 아니었다. 오로지 H로서. 누군지 모르는 신원미상의 연주자로서 내려는 거였다.

과연 그게 한국에서 가능할까?

“제가 내려는 음반은 H의 음반이고, 저는 제가 H라는 게 밝혀지지 않길 원해요.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안 돼요.”

“…끄응.”

이장혁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도 도현의 말이 옳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뭐, 어디 변두리에 있는 낙후된 스튜디오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도현이 그런 식으로 녹음하는 걸 원할 것 같진 않았다.

미국도 비슷할 테지만, 적어도 여기보단 나을 거다. 가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두었든 르옌 누바라는 몹시 적은 비중으로 등장했으니.

게다가 주인공 역을 맡은 헤레이즈는 단숨에 스타로 등극했지만, 미국에서 도현의 위상은 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높았다. 인종 차별을 겪은 동양인 배우, 그런 느낌으로.

“그러니까 허락해 주세요.”

도현이 진심을 담아, 꽤 간절하게 말했다. 그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이장혁은 눈을 감았다. 평소보다 한층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안 돼.”

잘근,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도현이 입술을 짓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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