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2화. Winter Break (16)
예상치 않은, 아니, 예상보다 강한 복병이었다. 순간적으로 억울함이 울컥, 치솟았다. 왜 내가 괜찮다는데 안 된다는 거야.
반항적인 생각을 소리 내어 말하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저 진정하려 애쓰며 속을 달랬다. 그 모든 과정은 서늘한 살갗 아래서 이루어졌다.
서혜나는 그런 도현을 진중한 눈으로 바라봤다.
“꼭 가고 싶은 거야?”
“…네.”
“한국은 안 된다는 거, 그 말도 틀린 건 없어. 그런데 완전한 이유가 되진 못해. 너도 알겠지만.”
도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한국에서 H의 정체를 들킬 가능성이 큰 건 사실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 가능성이 꼭 백 퍼센트인 건 아니다. 미국이 안전하리란 것도 추측이고.
“네가 미국에서 그 일을 하려는 이유는 모르겠어. 우린 네가 H인 걸 숨기는 이유조차 모르니까.”
“…….”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정신이 얼얼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왜 당연히 미국에 가서 하려고 했지? 왜?
“그래도, 네가 그걸 바란다면….”
서혜나가 한 박자 쉬고, 다음 말을 이으려던 때였다. 갑자기 이장혁이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자연히 서혜나의 말은 끊겼다.
“여보?”
의아한 물음에 이장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멀거니 서 있는 도현을 향해 말했다.
“도현아, 미안한데 엄마 아빠가 방금 들어와서 조금 피곤해. 다음에 다시 얘기해도 될까?”
회피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도현은 그들을 붙잡을 수 없었다. 뭘 어떻게 하겠는가. 잔뜩 지친 낯빛으로 피곤하다는데.
그리고 이 순간.
기묘하게도, 정말 기묘하게도 그들 사이에 어떠한 벽이 세워진 거 같았다. 도현은 그 감각에 당혹감을 숨기며 태연한 척 답했다.
“…그렇게 해요.”
“그래, 고맙다.”
이장혁은 미안하다는 듯 도현의 어깨를 두어 번 쓸고선 서혜나를 데리고 방에 들어갔다. 두 사람이 무어라 대화하는 소리가 작게 흩어졌다.
그들이 사라진 복도.
띡,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한 센서 등이 완전히 꺼졌을 때가 되어서야 도현은 잠에서 깬 사람처럼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러다 얕은 한숨과 함께 등을 돌렸다.
아직 시간은 있다.
내일 즈음에 다시 이야기를 꺼내 보면 되겠지. 그때는 도현도, 부모님도 머리를 식힌 후일 때니 지금보다 대화가 통할 것이다. 그러기를 바랐다.
* * *
다음 날, 도현은 한층 차분해진 자신을 느꼈다. 시간이 흐르니 서혜나와 이장혁의 태도도 이해가 갔다. 그들의 눈에 도현은 평범한 열다섯의 소년일 테니. 그렇게 과잉 반응하는 게 당연했다.
도현은 잠시, 희운이 혼자 비행기를 타고 나가서 해외에서 자취하겠다고 말하는 상상을 해 보았다. …두통이 일었다. 그렇게 도현은 두 사람을 완벽히 이해했다.
‘어제는 내가 성급했어.’
조금 더 차분히, 그들이 걱정을 덜 수 있도록 말해야 했다. 마음만 급해서 밀어붙이기만 했으니, 그들이 튕겨 나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이라면 어제보다 조금 더 잘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도현은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이부자리를 정돈하고 일어났다. 그리고 거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을 부모님을 찾았다.
“일어났어?”
“네. 무슨 차예요?”
“캐모마일. 너도 마실래?”
요즘 홍차는 별로 안 마시네.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혜나는 예쁜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맑은 수색이 찰랑였다. 화장실에서 나온 이장혁도 그들에게 합류했다.
그들의 분위기는 평화로웠다.
차를 두어 모금 마신 도현이 어제의 화제를 다시 끌어오기 전까지는.
“어제 제가 조금 성급했던 거 같아요. 두 분이 저를 걱정하는 게 당연한데, 그 부분을 생각하지 못했어요.”
도현은 침착하게 방을 나오기 전 이미 생각해 두었던 말을 꺼냈다.
“두 분 말씀도 맞아요. 어쩌면 여기서도 제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겠죠.”
타협의 의미로 이해한 이장혁이 안타까이 말했다.
“미안해, 도현아. 대신에 아빠가 최대한 도와줄게.”
“아니요, 생각해 봤는데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전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그곳에서 하고 싶은 거예요.”
약간의 거짓이 섞인 말이었다.
하룻밤 새 왜 미국에 가려고 한 건지 고민해봤다. 의외로 답은 쉬이 나왔다. 거기가 그 자신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은 곳이니까.
열셋 전까지는 미국에서 살았다.
아직 과거를 담을지, 현재를 담을지 결정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곳이 선택에 도움이 될 거다. 도현이 고민 끝에 도출해낸 답은, 일단은 이러했다.
그러나 도현은 알았다.
이러한 이유는 도현에게나 중요한 거지, 타인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란 걸. 이런 이유엔 ‘꼭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라는 대답이 나올 가능성이 컸다. 어제 말한 이유에 그랬듯이.
때로는 그냥 그러고 싶었다는 게 훨씬 강력하며, 반박 불가능한 이유였다.
지금처럼.
도현의 말에 두 사람은 안색을 굳혔다.
“이유 없이?”
“네. 그냥, 그러고 싶어요.”
두 사람은 복잡한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도현이 평범한 또래처럼 사고 치고, 떼쓰고, 그러는 건 그들이 늘 바랐던 일이다. 그러나 막상 그 상황이 닥치니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런 이유는 안 돼요?”
“…….”
두 사람은 차마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도현이 처음으로 떼를 쓰는 상황이다.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상황 속에서, 어떻게 안 된다는 말을 꺼낼 수 있을까.
서혜나의 눈이 흔들렸다.
그 맞은편에 있던 이장혁은 그녀의 동요를 그대로 읽어냈다. 이장혁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렸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움직였다.
“안 돼.”
“…안 된다고요?”
“아무리 그래도 너를 혼자 보낼 수는 없어.”
어제의 도돌이표 같은 대화였다.
도현은 어제처럼 성급하게 굴지 않았다. 대신 차분한 태도로 상대를 설득하려 굴었다.
“오후에는 케일리에게 집에 와 달라고 부탁할게요. 그리고 일곱 시 이후에는 밖에 나가지 않을 거예요. 매일 일곱 시마다 전화를 걸게요. 제가 안전히 집에 있는지 확인하실 수 있도록요.”
도현은 그들을 안심케 할 방안을 열다섯 가지 정도 생각해 놓았다. 그것들을 차례대로 늘어놓으려던 때였다.
도현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장혁이 고개를 저었다. 부정의 뜻이었다. 도현은 약간 당혹감에 젖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세 개밖에 말 안 했는데?
“네가 뭘 말해도 마찬가지야.”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토록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나.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마치 벽하고 대화하는 것 같다.
“대신 다른 방안을 생각해보자. 음반을 꼭 지금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조금 기다렸다가 같이 미국에 가는 방법도 있고….”
“싫어요.”
그렇게 간단히 결심한 문제가 아니다. 도현 나름대로 심사숙고를 거쳐 힘겹게 마음먹은 거였다. 그걸 타인이 바꿀 수는 없었다. 변화와 결심은 오로지 도현의 내부로부터 비롯되어야 했다.
“도현아….”
이장혁이 애탄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러나 도현은 머리를 굴리느라 바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역시 ‘그냥’이라는 이유로는 부족했나?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진짜 이유를 댔어야 했을까?
내가 원하는 걸 다 들어주겠다던 말은, 거짓말이었을까?
“도현아.”
“왜 혼자 보낼 수 없는데요?”
“당연하잖아. 우리가 어떻게 너를 그 먼 곳에 혼자 보내겠어.”
안 될 건 또 뭐야.
“너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네가 너무 걱정돼서 그래. 소중한 우리 아들인데 혹시라도 아프면 어쩌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쩌지. 그렇게 걱정돼서.”
이장혁의 말이 길어질수록 도현의 머릿속은 차게 식었다.
걱정돼서.
비집고 나오는 차가운 숨결을 막을 수가 없었다. 조소에 가까운 바람 소리에 이장혁의 얼굴에 당혹이 퍼졌다. 도현은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두 번. 도현이 병원에서 살던 시기에 그들이 도현을 찾아왔던 횟수였다. 고작 일 년에 두 번.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를 알면서도, 동시에 머리 한구석에서 드는 생각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 게 걱정이면 너무… 가벼운 거 아닐까?
“도현아?”
“정말 제가 걱정돼요?”
“그럼, 당연하지.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아빠가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그 대신에 뭐든지 도와줄 테니까. 응?”
그는 모르는 걸까. 가장 바라는 것을 외면하고 말하는 ‘뭐든지’는 한없이 가벼울 뿐이라는 걸.
…아니지. 그들의 눈에 난 열다섯의 아이니까, 그런 식으로 달랠 수 있다고 생각한 걸 수도. 역시 그쪽이 가능성이 커 보였다.
한번 잔가지가 흔들리자, 어설프게 심은 나무는 쉽사리 휘청거렸다.
그럼 그들이 그동안 했던 말 중에서 가볍지 않은 말이 얼마나 있었을까.
있긴 했나?
속에서부터 시린 냉기가 퍼져나갔다. 그건 독처럼 혈관을 타고 몸 곳곳으로 흘렀다. 도현은 잠시 침묵한 채 두 사람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평소의 미소조차 완전히 가신 채였다.
독은 목을 타고 올라와 입술에까지 번졌다. 도현은 이 말을 하면 안 되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순간 돌이킬 수 없을 거라는 것도.
멈추자. 여기서 멈추고, 진정하고 다시 생각해보자. 어쩌면 내가 너무 냉소적으로 굴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순수하게 걱정했을 뿐인데, 홀로 앞서나가고 있는 걸 수도 있다.
그러니, 멈춰야 하는데.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의지를 벗어난 입술이 멋대로 문장을 만들어냈다. 당장에라도 입을 막고 싶은데, 혈관에 퍼진 독이 몸을 마비시켰는지 말을 듣지 않았다.
“제가 걱정돼요?”
“지금까지 계속 말했잖아. 걱정된다고.”
픽, 도현이 미소 지었다. 무표정했던 얼굴에 떠오른 미소에 이장혁이 조금 안도하며 따라 호선을 그렸다. 도현은 그걸 잠자코 지켜보다가 물었다.
“왜 걱정할까요?”
“그야, 네가 아들이니까….”
“예전엔 안 그랬는데.”
말이 뚝 끊겼다.
그제야 이장혁은 도현의 입술 위로 올라온 미소가 무척이나 차갑다는 걸 깨달았다. 웃고 있지만, 동시에 웃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정도로 거리감이 느껴졌다.
“아, 죄송해요. 제가 조금 새삼스러워서요. 그도 그런 게…. 알잖아요, 두 분 모두. 제가 얼마나 혼자서 잘 지내는지요.”
두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크게 경악한 낯은 무척이나 뻣뻣했다. 그 표정을 보자, 도현은 돌이킬 수 없음을 인정했다. 받아들이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이상하리만치 이 순간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가슴을 눌러 봐도, 딱히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도현은 딱 보이는 것만큼 평온했다.
다만,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의 행동의 이유를 모르겠지만, 도현은 알고 있었으니까.
사실 지금 누구보다 억울한 건 그들일지도 모른다.
도현의 표정이 미약하게 누그러졌다. 동시에 이전보다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걱정을 이해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그래요. 혼자 지내는 게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차는 잘 마셨어요.”
웬만하면 진에게 부탁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방법이 그것밖에 없을 것 같네. 도현은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 먼저 등을 진 건 도현이었다.